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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산은 산인가 - 3. 산은 산이 아니다 - 1) 하이데거의 무

지식창고지기 2010. 1. 17. 20:13

4. 산은 산인가

    3. 산은 산이다 - 1) 하이데거의 무

     

      ‘ ‘산은 산이다’를 ‘산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이해할 경우, ‘산은 산이다’는 ‘산은 이데아의 모사물이다’ ‘산은 신에 의한 피조물이다’ ‘산은 표상 작용의 대상이다’라는 식으로 변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특정한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확답을 내리기에 앞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산이 존재하고 있다는 그 신비스러운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의 진상에 다가가기 위해 취해야 할 자세는, ‘존재자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존재자의 존재자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왜 도대체 존재자는 있고, 도리어 무는 아닌가·’라고 묻고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엄청난 수수께끼에 대면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종래의 형이상학에서는 ‘왜 도대체 존재자는 있고, 도리어 무는 아닌가·’라는 물음을, 모든 존재하는 사물들의 제일원인(causa prima)을 묻는 물음으로 이해했었다. 그러나 이제 하이데거는 그 물음을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근원적인 사태를 원초적으로 지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신비로운 수수께끼가 오히려 ‘존재자가 아닌 것’인 무를 실마리로 하여 해명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런데 전적으로 존재자가 아닌 것으로서의 무(Nichts)는 존재자 전체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존재자 전체와 먼저 대면할 수 있어야 하는데, 개별적인 존재자만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뿐인 유한한 인간이 존재자 전체를 그 자체에서 파악하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자 전체의 한가운데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거나, 존재자가 전체로서 우리를 엄습해 오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며,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유없이 모든 것에 권태로움을 느낄 때, 특정한 대상에 대한 두려움인 공포(Furcht)와는 달리, 왠지 모를 섬뜩함에 그저 모든 것이 뿌리없이 둥둥 떠 있는 느낌인 불안(Angst)이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안개처럼 드리울 때, 존재자 전체가 허물어져 내리면서 그 자리에 무가 입을 벌리고서 등장한다.

    우리는 불안이라는 근본 기분 속에서 존재자 전체와 함께 무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안 속에서는 존재자 전체가 의미를 잃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체 존재자 그 자체가 없어져 버리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무에 대한 단적인 타자로서 존재자 전체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허물어져 내리는 존재자 전체를 총체적으로 거부하면서도 지시하는 것을 무화(無化, Nichtung)라고 하는데, 이런 작용이 곧 무의 본질을 이룬다. 따라서 무화 작용을 본질로 하는 무는 존재자의 절멸(Vernichtung)이 아니라, 도리어 존재자의 개방 가능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무를 드러내주는 불안에는 혼란으로 허둥대는 공포와는 달리, ‘어떤 독특한 안정이 스며들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존재자 전체에 대한 완전한 부정인 무가 도리어 존재자 자체의 개방 가능성을 보장해 준다는 것은, 무가 드러날 때 비로소 존재자 자체를 탐구할 수 있는 이상, 존재자만을 중심으로 하여 존재자성을 추구하는 전통적 사고 방식으로는 오히려 존재자 자신도 또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원초적인 사실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존재자 전체를 부정하면서도 무는 존재자 자체를 개방시킨다고 할 때, ‘존재자가 개방된다’는 것은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하이데거식으로 표현하면, 존재자가 존재의 빛 속에서 비은폐되어 드러난다는 것이 된다. 이렇게 존재자에게 빛을 던져 모든 존재자를 위한 개방된 장(das Offene)이 됨으로써, 존재자를 탈은폐된 것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을 일러 하이데거는 ‘존재의 밝힘(Lichtung des Seins)’이라고 부른다. 존재의 밝힘이라는 이 개방된 장 위에서만 ‘존재자의 비은폐성(Unverborgenheit des Seienden)’은 가능하다.

    그런데 존재의 밝힘이라는 개방된 장에서 존재자가 비은폐되어 드러날 때, 존재 자신은 스스로를 감추어 은폐하고 만다. 왜냐하면 만약 존재자의 비은폐성 속에서 존재가 이처럼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존재는 존재자적 표상의 대상이 될 뿐이지, 존재자와는 차이나는 존재 자체, 모든 존재자에게 빛을 주는 밝힘 그 자체는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의 밝힘은 무조건적인 밝힘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자기 은폐로서의 밝힘’이며, 존재자의 드러남(존재자의 비은폐)은 동시에 존재 자체의 물러남(존재의 은폐)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물러나기만 하는 존재 자체가 존재자 배후의 초월적인 근거와 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근거란 영속적 현존성으로 포장된 또 하나의 존재자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그 어떤 존재자도 아니기에 무이며, 이런 무에서는 그 근거가 더 이상 물어질 수 없기 때문에 무는 곧 심연(Abgrund)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한다는 점에서 존재도 분명 존재자의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지만, 이때의 근거는 고정화된 영속적 현존성에 따라 인간이 장악하여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자적인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무근거적인 심연이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다. 존재는 우리가 존재자와 존재자성에만 매달릴 때에도 의연히 남아 있는 그런 ‘있는 그대로의 있음’ 자신인 것이다.

    그러나 존재가 존재자의 비은폐성 속에서 자신을 은폐하자 존재자의 비은폐성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지만, 그럴수록 존재자에 주어진 밝음은 오히려 존재의 빛을 흐리게 하여 사람들은 은폐를 본질로 하는 존재 자체에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도리어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시선을 존재자와 그것의 존재자성에 집중시킨다. 존재자를 넘어 이렇게 존재자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기존의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존재자와 존재자성에만 매달릴 경우, 존재와 존재자 간의 비은폐적인 이중성의 사건은 망각되고 만다. 그렇다면 ‘산이 무엇이다’는 특정한 형이상학의 입장에 앞서서 ‘산이 존재하고 있다’는 원초적인 사태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산뿐만 아니라 일체의 존재자를 무로 보아야 한다. 즉 더 이상 존재자성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제 산은 산이 아니다. 산은 지배와 장악의 대상이 아니다. 산은 항상 처리 가능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려는 형이상학적 욕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