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이후 한성시기 후반의 백제 왕실은 지방 유력자들에게 귀금속 장신구를 사여(賜與)해 그들을 매개로 지방 지배를 실현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고고학)가 최근 출간한 저서 《장신구 사여 체제로 본 백제의 지방 지배》(서경문화사)에서 "백제의 장신구는 신체를 장식하는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소유자의 사회적 위세(威勢)를 보여주는 징표였다"고 주장했다.
한성시기(서기전 18년~서기 475년)의 백제 장신구가 출토된 곳은 서울을 비롯해서 성남·오산·원주·천안·청원·청주·서산·공주·익산·고흥 등 11개 지역으로 대부분 금강 수계(水系)에 밀집해 있다.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5세기 고구려의 위세에 눌리면서 한반도 남쪽으로 눈길을 돌린 백제는 충청과 전라지역 지배자를 정치적으로 편입시키는 대신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등 최고 위세품(威勢品)을 대가성으로 줬다는 것이다.
지금껏 출토된 한성시기 백제의 금동관은 모두 6점이다. 충남 공주 수촌리 1·4호분, 충남 천안 용원리 9호분, 충남 서산 부장리 5호분, 전남 익산 입점리 1호분, 전남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이다. 이 교수는 "이들은 고깔 모양의 기본 구조에 금동판을 도려내어(투조·透彫) 무늬를 새겼고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덧붙인 형태로 외형·도안·제작기법 등 일정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귀걸이는 서울 석촌동 4호분을 비롯해 원주 법천리, 천안 용원리, 공주 수촌리, 충북 청원 주성리 등에서 출토됐는데 고리가 가늘고 단순한 양식이 공통적이다. 금동신발은 원주 법천리, 공주 수촌리, 서산 부장리, 고흥 안동고분 등에서 출토됐으며 신발의 중심선에서 좌우 측판이 결합되고 바닥에 금동 못이 박혀 있는 등 백제 양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 교수는 "사여된 장신구의 내용을 보면 위계(位階)가 드러난다"며 "집단의 규모나 세력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금동관의 경우 출토지가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무늬의 격이 떨어진다. 충남 공주나 서산 등에서 발굴된 금동관이 용이나 봉황 장식인데 반해 전남 안동고분은 잎사귀 무늬를 장식했다. 왕실의 장례용품인 금동신발을 중앙에서 사여받은 원주 법천리, 공주 수촌리, 서산 부장리 세력은 다른 지역보다 더 유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신구 사여 체제'는 백제의 지배력이 강해지는 6세기 이후가 되면 해체된다. 웅진 시기에는 대부분의 지방에서 더 이상 귀금속 장신구가 출토되지 않는다. 이 교수는 "사비 시기에는 엄격한 관위제(官位制)가 실시되면서 관등에 따라 장신구 소유에 제한이 있었고 그 성격도 관복의 부속품으로 변했다"고 했다.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
금동관은 알고있다 주인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조선일보] 2010년 01월 20일(수) 오전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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