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마뉴는 재위기간 중 열 차례의 큰 전쟁과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으며, 그 결과 프랑크의 영토를 두 배로 늘려 놓았다. 서유럽에서 영국,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한 전부가 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특히 무려 33년 동안 계속된(772~804) ‘작센 전쟁’의 결과 그때까지 유럽 문명권의 바깥에 있었던 게르만족의 상당수가 유럽에 포함되었고, 그것은 이후 유럽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또한 8년 동안 계속된 훈족(아바르족)과의 전쟁으로 헝가리 지역이 정복되었고, 이 때 프랑크인이 그 어느 전쟁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막대한 부가 획득되었다고 한다. 샤를마뉴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스크인들과도 싸웠는데, 이는 그의 전쟁 중 성과가 좋지 못했던 몇 안 되는 경우로서 불의의 습격에 롤랑을 비롯한 명장들을 잃기도 했다(778년). 이 이야기는 후일 ‘롤랑이 이슬람군과 벌인 영웅적인 전투’로 각색되어, <롤랑의 노래>라는 중세 기사도 문학의 걸작을 낳았다.
‘서로마 황제’가 펼친 카롤링거 르네상스
한편 샤를마뉴의 전쟁에는 768년의 롬바르드 전쟁과 787년의 베네벤토 공략, 그리고 800년의 로마 원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모두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서 전쟁을 벌인 경우였고, 샤를마뉴는 그 때마다 로마를 방문해 교황에게 예우를 다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800년에는 교황 레오 3세의 손으로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서로마 황제’의 황제관이 샤를마뉴의 머리에 씌워졌다.
이는 프랑크와 로마 교회 양쪽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으로써 성사된 일이었다. 샤를마뉴는 사방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침략과 반란을 억누르기에 무력만으로는 한계를 느꼈으며, 따라서 교회의 권위와 옛 로마제국의 권위를 빌리고 싶어 했다. 한편 로마 교회는 726년에 비잔틴제국의 레오 3세가 ‘성상파괴령’을 내리고 로마교황에게도 교회 안팎의 모든 성화상을 없애라고 지시하자 이를 거부함으로써 비잔틴제국과 등진 처지였다. 샤를마뉴처럼 한 국가의 정점에 있는 사람도 글을 모를 정도였던 당시의 서유럽 사정상, 예수나 성인들의 그림이 없이는 교회가 유지되기 힘들었으므로 이를 우상숭배라며 무조건 파괴하라는 비잔틴 황제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곧바로 정치적 고립을 가져왔다. 비잔틴 황제는 로마에 인접한 롬바르드를 부추겨 교황을 공격하게 했으며, 로마 교회 내에서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비잔틴 계열의 성직자들에게도 음모를 꾸미게 했다. 그리하여 역대 교황은 생존을 위해 프랑크 왕국의 힘을 빌리려 해왔으며, 샤를마뉴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한 것은 그 결정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