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여섯 차례 로마를 향하다 - 프리드리히 1세

지식창고지기 2010. 1. 20. 15:18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1세, 그는 프리드리히 2세의 할아버지이면서 동시에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독일 역사에는 그와 혈연관계가 없는 프리드리히 1세가 일곱 명이나 더 있다. 역사 공부하는 사람을 무척 헷갈리게 할 이런 사실은 그가 슈바벤 공으로서는 프리드리히 3세(프리드리히라는 이름을 가진 세 번째)이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는 첫 번째 프리드리히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독일의 독립된 정치단위는 수없이 많이 있었기에, 그만큼 프리드리히라는 이름의 군주가 널리고 쌓였던 것이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1세라는 공식 이름보다 ‘바르바로사(붉은 수염)’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은 그는 이런 복잡한 독일의 상황, 중세적 상황 덕에 황제가 되었고, 바로 그런 상황을 극복하려 평생 노력했다.



여섯 차례 로마를 향하다

독일의 왕권은 911년에 카롤링거 프랑크 왕조가 단절되고 콘라트 1세가 ‘독일 왕국’을 세운 이래 작센 왕조, 잘리에르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로 이어졌다.

 

그러나 왕조의 변천이 동양에서처럼 ‘역성혁명’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유력한 귀족들의 ‘선거’로 왕을 뽑는 제도가 왕의 후계자 지명 제도와 혼용되고 있었다. 선거로 뽑힌 왕이 자기 혈통을 잇는 사람을 후계자로 지명해 선거에서도 인정받으면 왕조가 계속되는 것이었으나, 선거로 다른 혈통의 왕이 나오면 그 왕조는 끝났다. 그래서 기존의 왕을 인정하지 않고 귀족들이 새로운 왕을 뽑아, 한 나라에 동시에 두 명의 왕이 있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처럼 독일 내지 중세 유럽 전반의 왕권은 미약했으며, 절대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는 존재라기보다 귀족들 중 ‘대표자’에 지나지 않는 성격이 강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도 잘리에르 왕조의 하인리히 5세가 죽은 뒤 처음에는 작센 공 로타르가 즉위했으나(1125년) 불복한 귀족들이 호엔슈타우펜 가의 콘라트를 따로 왕으로 뽑음으로써(콘라트 3세) 시작되었다. 로타르가 1137년에 죽자 콘라트 3세는 정식으로 즉위할 수 있었으나, 로타르는 벨프 가의 하인리히를 지명했기 때문에 호엔슈타우펜은 계속해서 벨프와 대립 관계에 놓였다. 콘라트 3세는 1146년에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는데, 이 때 아들 하인리히를 공동 왕으로 지명하고 선거도 거쳤으나 당분간 이를 비밀로 한 채 출정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곧 죽었으며, 콘라트 3세가 1152년에 죽을 때는 지명된 후계자가 없었고 그의 또 다른 아들 하인리히는 6세에 불과했다. 이 때 콘라트 3세의 임종을 한 슈바벤 공 프리드리히(그의 조카뻘이었다)와 밤베르크 대주교는 “죽기 직전 콘라트 3세가 프리드리히를 지명했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선거를 거쳐 프리드리히가 독일 왕으로 즉위한다.

 

오토 1세 이래 독일 왕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왕이 직접 로마에 가서 교황에게서 황제관을 받는 절차가 필요했는데, 콘라트 3세는 그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에 황제 자리는 로타르 이후 공식적으로는 비어 있었다. 그것은 당시 교황과 황제 사이의 알력도 개입된 결과였는데, 이른바 ‘서임권 투쟁’이 그것이었다.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은 성직자로서 교회의 자체적 절차로 서임되는 게 원칙이었지만, 이들은 사실상 봉건영주이기도 했으므로 황제가 그들을 임명하는 권리를 고집해왔다. 이는 세속권력이 교회의 고유권한을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으로 여겨져, 11세기 이후 교황은 황제의 서임권을 부정할 뿐 아니라 반대로 세속권력을 간섭하려 애썼다. 이는 ‘카노사의 굴욕’ 사건(1077년)을 비롯한 교황과 황제의 극한대립까지 빚었다가 1122년의 보름스 협약으로 일단 잠잠해졌지만 불씨는 여전했고, 콘라트 3세가 황제 지위를 순조롭게 계승하지 못했던 것도 그것과 연관되었다. 전임자 로타르도 교황 앞에 엎드려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치르고서야 황제에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프리드리히 1세는 먼저 교황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일에 착수, 즉위 이듬해인 1153년에 교황과 콘스탄츠 협약을 맺어 “황제는 교황의 교회 지배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교황은 황제의 권위를 지지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로써 프리드리히는 서임권 문제에서 교황에게 원칙적 양보를 하는 한편 왕권 강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이탈리아 왕에 즉위하고, 그 다음 해인 1155년에는 로마로 가서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했다. 하지만 즉위식은 성난 로마 시민들의 소요 때문에 도중에 끝나고 말았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교황이 로마를 세속 영주처럼 지배하는 것에 반대하며 고대 폴리스와 같은 자치 정부를 세우려고 했다. 그리고 교황과 맞서기 위해 황제의 힘을 빌리려 했는데, 샤를마뉴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프리드리히는(그는 1165년에 샤를마뉴를 성인으로 축성하기도 했다) 샤를마뉴처럼 교황을 돕고 그의 축복을 받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교황과의 밀월관계는 오래지 않았다. 교황은 노르만족의 침공 등에서 프리드리히가 충분한 도움을 주지 못한 데 실망했고, 프리드리히는 교황이 자신을 “신하 취급”하는 서신을 보낸 일에 분개했다. 여기에 오토 1세 이래 독일 왕들의 중요한 영지였던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이 단결하여 황제에 반기를 들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1세는 힘에 의지하기로 했다. 1158년에 밀라노를 점령해 북부 이탈리아의 반란에 쐐기를 박았고, 1166년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대항해 자신이 내세운 대립교황 파스칼 3세를 보호하고자 로마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말라리아로 많은 병사들이 쓰러진 틈을 타서 교황과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이 손을 잡고 프리드리히를 몰아붙여, 그는 소수의 병력만으로 간신히 알프스를 넘어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174년에도 다시 이탈리아로 들어갔지만 병력이 부족해져서 벨프 가의 하인리히(하인리히 사자공)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리고 레냐노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1176년) 프리드리히는 교황과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에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맺어야 했다. 이로써 프리드리히 1세는 샤를마뉴의 길을 따르기 위해 ‘교황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여섯 차례 이탈리아 원정을 벌였으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아들 하인리히를 시칠리아 왕국의 콘스탄스와 결혼시켜 장차 남부 이탈리아를 손에 넣고 교황령을 포위할 구도를 만들었으며, 프랑스와 연대를 시도하고 부르고뉴의 왕권도 얻어 제국의 세력권을 확대할 교두보를 쌓았다.

 

 

봉건질서에 맞서 제국의 건설을 꿈꾸다


프리드리히 1세는 단지 봉건질서에 따른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닌 제국’의 황제로 만족하지 않고, 고대의 로마 황제처럼 영토 구석구석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존재가 되고 싶어했다. 어머니가 벨프 가문 사람이었던 그는 본래 호엔슈타우펜의 라이벌인 벨프 가에 우호적이었으나, 하인리히 사자공이 1174년에 병력 지원을 거절한 일을 빌미로 그를 제거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1180년에 그를 독일에서 추방하고 영지를 몰수했다. 하지만 ‘귀족의 대표자’인 황제가 유력한 귀족을 그처럼 철저히 제거하는 일은 법적, 정치적으로 무리가 따랐다. 그래서 프리드리히는 하인리히에게서 빼앗은 영지를 자신을 지지해 준 귀족들에게 나눠줄 수밖에 없었고, 이를 ‘강제수봉제’로 법제화해야 했다. 그렇다면 황제가 직접 지배하는 직할령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셈이었다.

 

그래도 프리드리히가 여기서 “남 좋은 일만 시킨” 것은 아니다. 빼앗은 땅을 나누어주며 기존의 관습적인 영지 배치와 다른 새로운 영지 배치를 황제의 손으로 결정할 수 있었고, 황제에게 영지를 받은 귀족들은 ‘제국 제후’로서 황제에게 직속되는 가신이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또한 “황제는 그 누구의 신하도 될 수 없다”는 원칙을 수립하고, 사법 질서도 개편하여 사형을 포함하는 중범죄는 황제에게만 재판권이 있도록 했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식 지배구조를 수립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웅대한 구상은 현실적으로 실현이 어려웠다. 황제에 직속한다지만 제국 제후들의 충성을 보장할 수단이 없었고, 각 지방의 실권은 여전히 지방 영주들의 손에 있었다. 이를 극복하려면 강력한 중앙 관료제가 필요하다고 여긴 프리드리히는 귀족이 아닌 신분에서 ‘미니스티알렌’이라는 가산 관료단을 선발하여 황제 직할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예루살렘을 보지 못한 죽음, 그러나 전설은 시작되다


프리드리히 1세는 불타는 듯한 수염과 건장한 키로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았다. 또한 뛰어난 검술과 말솜씨, 흠잡을 데 없는 예의범절 등으로 ‘기사도의 모범’이라 불렸다. 이런 개인적인 카리스마는 허약한 제국의 권력 기반에 다소나마 보탬이 되었다. 1184년에는 마인츠 궁전에 유럽 각지의 기사들을 초빙해 만찬을 가졌는데, 7만 명이 모여 프리드리히를 연호하는 모습은 마치 유럽이 그의 발 아래 하나로 통일된 듯한 환상을 주었다고 한다. 이런 이미지를 한껏 고취하려 했음인지, 그는 1189년에 제3차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한다. 그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아시아에 상륙해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 진영은 긴장했으나, 프리드리히 1세는 원정 도중 살레프 강에서 67세의 나이로 익사하고 만다(1190년). 그가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는 이야기가 여럿인데, 낙마하여 차디찬 강물에 떨어지자 심장마비로 죽었다고도 하고, 목욕을 하다가 뇌졸중이 왔다고도 한다.

 

 

이처럼 프리드리히 1세는 제국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어이없이 숨졌고,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그의 아들 하인리히 6세, 손자 프리드리히 2세로 이어지며 계속해서 왕권의 강화와 유럽의 제패를 꿈꿨으나 결국 여의치 못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죽은 후에 웅장한 전설의 주인공으로 남았다. 독일 어딘가의 산에 프리드리히와 그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잠든 동굴이 있고, 때가 되면 그가 다시 깨어나 흰 수염을 휘날리며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르며 독일의 적들을 말끔히 무찌를 것이다. 그리고 독일은 위대한 제국이 된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이후 수백 년 동안 독일이 정치적, 사회적 혼란에 휩싸일 때마다 활발히 거론되며 “프리드리히 1세가 다시 나타난다!”는 속삭임을 퍼지게 했다. 히틀러가 소련 침공 작전의 이름을 ‘바르바로사’로 한 것도 이 전설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주제로 인물 엮어보기‘위대한 기독교 전사 군주’라는 이미지를 심고, 후대에 전설로 남은 군주들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1세
‘제국다운 제국’을 위해 노력했던 신성로마 황제
샤를마뉴 샤를마뉴
(742~814) 서유럽을 제패한 카롤링거 프랑크 왕국의 군주. 많은 기사도문학과 전설의 주인공이 됐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 고드프루아 드 부용
(1060~1100)제1회 십자군원정에서 예루살렘을 점령해 지배자가 되어 여러 기사도문학에서 미화됐다.
리처드 1세 리처드 1세
(1157~1199)프리드리히 1세와 제3차 십자군에 참여했다가 그의 사후에 살라딘과 대결하고 영웅으로 추대됐다.

 

 

 

함규진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