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대칸에 몽케가 즉위한 후 몽골제국의 대칸 자리는 툴루이 가문에게 대대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툴루이 가문 사람끼리의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그 중심에 툴루이의 둘째 아들이자 몽케의 동생인 쿠빌라이가 있었다. 1215년에 태어난 그는 어려서는 별로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다. 1251년이 될 때까지 툴루이 가문이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되었고, 쿠빌라이는 툴루이 가문에서도 둘째 아들이라는 모호한 위치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 소르칵타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 중에는 “중국인들을 탄압하고 착취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살피고 다독이는 정책을 취해 우리 몽골에 충성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을 멸시하기보다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찍부터 해운, 장덕휘, 유병충, 왕순 등 중국의 학자나 승려를 초빙하여 자문을 구했고, 가장 사랑했던 둘째 아들에게는 친킨(眞金)이라는 중국식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대칸이 된 형 몽케가 그를 막남한지 구국서사에 임명하자, 그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겨 옛 중국의 ‘성왕’을 지향하는 듯한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상도(처음에는 개평(開平)이라고 불렀다)의 건설을 통해 자신의 친중국적 성향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는 몽골 황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널리 의심과 반발을 불러왔다. 쿠빌라이는 몽골인의 긍지를 버리고 ‘만지(蠻子, ‘버러지’라는 뜻으로, 북방민족이 중국인들을 업신여기는 표현이었다)’에게 홀렸단 말인가? 온 세상을 말발굽으로 짓밟고 말을 먹일 초원으로 만들라는 칭기즈칸의 말씀을 잊어버린 것인가? 그것은 중국의 부와 인구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경우 쿠빌라이가 갖게 될 힘에 대한 경계심도 포함했다. 몽케가 1252년에 지시했던 대리국 원정에서 쿠빌라이가 대승을 거두고 정복자로서의 위상을 갖춘 것도 불편했다. 그래서 몽케는 쿠빌라이를 숙청하기로 하고, 1257년에 쿠빌라이의 영지에 전격적 세무조사를 실시해 숱한 비리 혐의를 포착했다. 그러나 숙청이 실현되지는 않았는데, 쿠빌라이가 반발하지 않고 몽케에게 공손히 용서를 구했던 데다 남송을 정복한다는 목표의 실현에, 또 당시 골칫거리가 되고 있던 도교도와 불교도 사이의 종교갈등을 해결하는 일에 중국에 정통한 쿠빌라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몽케는 일단 쿠빌라이를 용서했으나, 1258년 시작된 남송 정복전에서는 쿠빌라이를 제외했다. 그러나 세 방향의 원정군 중 한 축을 맡은 다가차르가 갑자기 사퇴하는 바람에 쿠빌라이가 대신해서 남송으로 진격한다. 그리고 몽케가 원정 도중에 사망하자(1259년), 쿠빌라이에게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처음에 쿠빌라이는 빨리 본토로 돌아가 쿠릴타이에 참석해야 한다는 말에 “아무런 공로가 없는 내가 가 봐야 뭘 하는가? 송나라를 정복하고 가겠다”고 했으나, 막냇동생 아리크부카가 병력을 모아 상도로 진군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1260년, 상도에 자신의 지지자들만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고는 제5대 대칸에 오른다. 몽골식 즉위였지만 중통(中統)이라는 연호를 쓰는 등 중국적 색채도 갖췄다. 당연하게도 불복자가 속출했으며, 아리크부카는 몽골에서 별도로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을 선언한다. 킵차크, 오고타이, 차가타이한국이 아리크부카의 편에 섰고, 훌라구가 이끄는 일한국은 쿠빌라이를 지지했다. 이후 4년 동안의 내전 끝에 쿠빌라이가 승리하지만, 이번에는 오고타이 가문의 하이두가 도전에 나서서 쿠빌라이가 죽을 때까지도 끝나지 않을 내전을 일으켰다.
이로써 몽골제국의 분열은 결정적이 되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1271년에 국호를 원(元)이라 하여 중국 왕조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1279년에 마침내 남송을 멸망시켜 전 중국을 지배하에 두었다. 역사상 이민족이 중국의 일부를 차지해 왕조를 세운 일은 많았지만 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왕조는 없었다. 쿠빌라이에 의해 비로소 북방민족과 중국의 세계가 하나로 합쳐진 대제국이 세워진 것이었다.
모순을 넘어서 융합과 창조의 비전 제시
대원제국의 황제가 된 쿠빌라이는 지금의 북경 지역에 대도(大都)를 건설하고, 가을과 겨울에는 대도에서, 봄과 여름에는 상도에서 지내며 제국을 다스렸다. 대도와 상도는 모두 그의 직할지인 중서성에 속해 있었고, 지방은 10개 행성과 그 밑의 로-주-현으로 분화되었다. 주와 현이란 중국의 전통적인 지방행정단위로 북방민족에게는 없었던 것이며, 중앙관제에도 중국 전통의 중서성, 상서성, 추밀원이 각각 내정, 재정, 군정을 담당하는 체제가 되어 중국색이 뚜렷했다. 따라서 원세조 쿠빌라이는 출신만 몽골이지 완전한 중국 왕조의 군주였다는 평가도 후세의 역사가들 사이에 많이 나왔다.
하지만 쿠빌라이가 아리크부카나 하이두에 비해 훨씬 친중국적이기는 했어도, 결코 몽골의 혼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제국이 순수한 중국 왕조라고도 할 수 없었다. 쿠빌라이는 주변에 유명한 유학자들을 두면서도 끝내 한문과 중국어를 공부하지 않았고, 공문서를 작성하기 위해 티베트의 승려 파스파에게 새로운 문자를 만들게 했다. 지방관제도 얼핏 보면 중국적인 것 같지만, 행성의 담당자가 중앙에서 파견한 관료가 아니라 분봉을 받고 독자적으로 그 지역을 다스리는 몽골 귀족이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북방민족의 전통을 본받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한인들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지 않아, 유학을 익힌 한인 관료들이 정부를 장악하는 일을 피했다. 그리고 제국민의 출신성분을 네 등급으로 나누어, 첫 번째로 몽골인을, 그 다음으로 아랍이나 투르크 등 서방민족인 색목인을, 그 다음으로 보다 일찍 몽골에 복속된 북중국의 중국인인 한인을 꼽았으며 가장 나중에 제국에 들어온 남송 출신 중국인인 남인은 최하위에 두었다. 이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나 히틀러의 인종체계 같은 혈통에 따른 인종차별제도가 아니라, 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함에 있어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분류한 제도였다. 그래서 행성 이하 모든 지방장관들은 몽골인 아니면 색목인만이 임명될 수 있었고, 한인이나 남인은 재주가 뛰어나면 특채되었으나 과거제와 같이 공개적이고 일반적으로 정부에 들어갈 방법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