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초원의 왕자, 중국의 황제가 되다 - 원세조 쿠빌라이

지식창고지기 2010. 1. 20. 15:14

원세조 쿠빌라이

“제너두에 쿠빌라이 칸은/웅장한 환락의 궁전을 세우라고 명령했다네/거룩한 강 알프가 한없이 깊은 동굴을 통해/태양이 비치지 않는 바다로 흘러드는 그 땅에….” 19세기 초 영국의 시인인 코울리지가 쓴 [쿠빌라이 칸]의 첫머리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의해, 쿠빌라이의 이름은 그의 할아버지인 칭기즈칸에 못지 않을 만큼 서양에 일찍부터 널리 퍼져 있었고, 요정과 마법이 가득한 신비의 나라를 다스리던 위대한 황제로 상상되었다. 하지만 실제의 제너두, 즉 상도(上都)는 쿠빌라이가 1256년, 지금의 내몽골 지역에 세운 도시였다. 그 신도시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 받을 만했다. 기존의 몽골 도시와는 전혀 다르게 중국의 도시 건축법과 풍수지리에 따라 지어졌다는 점, 그리고 당시의 쿠빌라이가 제국의 황제 또는 대(大)칸이 아니라 화북 지역의 행정권을 위임 받은 ‘막남한지 구국서사’였다는 점이었다. 이는 쿠빌라이에 대한 의심과 적개심을 몽골 황족들 사이에 퍼지도록 했으며, 그것은 결국 하나의 대제국의 출현을, 그리고 동시에 거대한 분열을 가지고 왔다.

 

 

초원의 왕자, 중국의 황제가 되다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족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세상을 정복했다. 제국의 최대 판도는 그때까지 알려져 있던 세계의 약 절반에 달했다. 동시에 그것은 유사 이래 되풀이되고 있던 농경문명과 목축문명의 대결에서 목축문명이 획기적인 대승을 거두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일단 농경문명의 땅을 정복했어도, 피정복민의 수적인 우위와 경제, 문화적인 영향력 때문에 결국 정복한 나라에 흡수되고 마는 것이 그 동안 유목민 정복 왕조의 운명이기도 했다.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은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모색했다. 하나는 농경문명을 철저히 착취하고 파괴하여 온 세상을 목축 민족의 세상으로 바꿔 버리는 것, 다른 하나는 농경 민족과 융화를 꾀하면서도 정복자로서의 주도권과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1227년에 칭기즈칸이 사망했을 때, 이미 거대해질 대로 거대해진 제국을 누가 이어받아 다스리느냐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원래 몽골족은 쿠릴타이라고 하는 족장회의에서 ‘민주적’으로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칭기즈칸이라는 인물의 업적과 카리스마가 워낙 엄청났으므로, 후계자는 그의 자손들에게 계승되며 쿠릴타이는 추인만 해주는 왕조 시스템이 일단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그러면 과연 자손들 중 누가 차기 대칸이 되느냐?”의 문제가 확실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다행히 제2대 대칸은 칭기즈칸이 생전에 셋째 아들 오고타이를 지명해 두었기에 잡음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오고타이가 셋째임에도 계승자가 된 까닭은 첫째인 주치는 “칭기즈칸의 부인 보르테가 납치되었을 때 가진 아이로, 칭기즈칸의 친아들이 아니다”는 소문에 시달렸고, 둘째 차가타이는 대칸이 되기에는 인물됨됨이가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본래 몽골족에는 막내아들에게 집안을 잇게 하는 관습이 있었으므로 “막내 툴루이야말로 대칸이 되었어야 하지 않은가”는 숙덕임이 있었고, 주치의 아들인 바투는 자기 가문이 소외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1241년에 오고타이가 죽자 바투와 오고타이의 장남 구유크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고, 구유크는 1246년에 바투를 배제한 채 쿠릴타이를 열어 제3대 대칸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주치 가문뿐 아니라 ‘오고타이에게서 차기를 약속 받고 있던’ 툴루이 가문의 불만도 불러왔으며, 구유크가 2년 만에 죽자 다시 분쟁이 이어져 결국 1251년, 바투와 손을 잡은 툴루이 가문의 몽케가 오고타이 가문의 시라문을 물리치고 제4대 대칸이 되었다. 이처럼 황위 계승이 순조롭지 못하고 매번 몇 년씩의 공백과 분쟁을 거쳐 가까스로 이루어짐으로써, 칭기즈칸의 세계제국은 빠른 분열의 조짐을 나타내고 있었다.

 

 

4대 대칸에 몽케가 즉위한 후 몽골제국의 대칸 자리는 툴루이 가문에게 대대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툴루이 가문 사람끼리의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그 중심에 툴루이의 둘째 아들이자 몽케의 동생인 쿠빌라이가 있었다. 1215년에 태어난 그는 어려서는 별로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다. 1251년이 될 때까지 툴루이 가문이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되었고, 쿠빌라이는 툴루이 가문에서도 둘째 아들이라는 모호한 위치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 소르칵타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 중에는 “중국인들을 탄압하고 착취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살피고 다독이는 정책을 취해 우리 몽골에 충성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을 멸시하기보다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찍부터 해운, 장덕휘, 유병충, 왕순 등 중국의 학자나 승려를 초빙하여 자문을 구했고, 가장 사랑했던 둘째 아들에게는 친킨(眞金)이라는 중국식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대칸이 된 형 몽케가 그를 막남한지 구국서사에 임명하자, 그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겨 옛 중국의 ‘성왕’을 지향하는 듯한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상도(처음에는 개평(開平)이라고 불렀다)의 건설을 통해 자신의 친중국적 성향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는 몽골 황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널리 의심과 반발을 불러왔다. 쿠빌라이는 몽골인의 긍지를 버리고 ‘만지(蠻子, ‘버러지’라는 뜻으로, 북방민족이 중국인들을 업신여기는 표현이었다)’에게 홀렸단 말인가? 온 세상을 말발굽으로 짓밟고 말을 먹일 초원으로 만들라는 칭기즈칸의 말씀을 잊어버린 것인가? 그것은 중국의 부와 인구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경우 쿠빌라이가 갖게 될 힘에 대한 경계심도 포함했다. 몽케가 1252년에 지시했던 대리국 원정에서 쿠빌라이가 대승을 거두고 정복자로서의 위상을 갖춘 것도 불편했다. 그래서 몽케는 쿠빌라이를 숙청하기로 하고, 1257년에 쿠빌라이의 영지에 전격적 세무조사를 실시해 숱한 비리 혐의를 포착했다. 그러나 숙청이 실현되지는 않았는데, 쿠빌라이가 반발하지 않고 몽케에게 공손히 용서를 구했던 데다 남송을 정복한다는 목표의 실현에, 또 당시 골칫거리가 되고 있던 도교도와 불교도 사이의 종교갈등을 해결하는 일에 중국에 정통한 쿠빌라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몽케는 일단 쿠빌라이를 용서했으나, 1258년 시작된 남송 정복전에서는 쿠빌라이를 제외했다. 그러나 세 방향의 원정군 중 한 축을 맡은 다가차르가 갑자기 사퇴하는 바람에 쿠빌라이가 대신해서 남송으로 진격한다. 그리고 몽케가 원정 도중에 사망하자(1259년), 쿠빌라이에게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처음에 쿠빌라이는 빨리 본토로 돌아가 쿠릴타이에 참석해야 한다는 말에 “아무런 공로가 없는 내가 가 봐야 뭘 하는가? 송나라를 정복하고 가겠다”고 했으나, 막냇동생 아리크부카가 병력을 모아 상도로 진군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1260년, 상도에 자신의 지지자들만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고는 제5대 대칸에 오른다. 몽골식 즉위였지만 중통(中統)이라는 연호를 쓰는 등 중국적 색채도 갖췄다. 당연하게도 불복자가 속출했으며, 아리크부카는 몽골에서 별도로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을 선언한다. 킵차크, 오고타이, 차가타이한국이 아리크부카의 편에 섰고, 훌라구가 이끄는 일한국은 쿠빌라이를 지지했다. 이후 4년 동안의 내전 끝에 쿠빌라이가 승리하지만, 이번에는 오고타이 가문의 하이두가 도전에 나서서 쿠빌라이가 죽을 때까지도 끝나지 않을 내전을 일으켰다.

 

이로써 몽골제국의 분열은 결정적이 되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1271년에 국호를 원(元)이라 하여 중국 왕조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1279년에 마침내 남송을 멸망시켜 전 중국을 지배하에 두었다. 역사상 이민족이 중국의 일부를 차지해 왕조를 세운 일은 많았지만 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왕조는 없었다. 쿠빌라이에 의해 비로소 북방민족과 중국의 세계가 하나로 합쳐진 대제국이 세워진 것이었다. 

 

 

모순을 넘어서 융합과 창조의 비전 제시


대원제국의 황제가 된 쿠빌라이는 지금의 북경 지역에 대도(大都)를 건설하고, 가을과 겨울에는 대도에서, 봄과 여름에는 상도에서 지내며 제국을 다스렸다. 대도와 상도는 모두 그의 직할지인 중서성에 속해 있었고, 지방은 10개 행성과 그 밑의 로-주-현으로 분화되었다. 주와 현이란 중국의 전통적인 지방행정단위로 북방민족에게는 없었던 것이며, 중앙관제에도 중국 전통의 중서성, 상서성, 추밀원이 각각 내정, 재정, 군정을 담당하는 체제가 되어 중국색이 뚜렷했다. 따라서 원세조 쿠빌라이는 출신만 몽골이지 완전한 중국 왕조의 군주였다는 평가도 후세의 역사가들 사이에 많이 나왔다.

 

하지만 쿠빌라이가 아리크부카나 하이두에 비해 훨씬 친중국적이기는 했어도, 결코 몽골의 혼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제국이 순수한 중국 왕조라고도 할 수 없었다. 쿠빌라이는 주변에 유명한 유학자들을 두면서도 끝내 한문과 중국어를 공부하지 않았고, 공문서를 작성하기 위해 티베트의 승려 파스파에게 새로운 문자를 만들게 했다. 지방관제도 얼핏 보면 중국적인 것 같지만, 행성의 담당자가 중앙에서 파견한 관료가 아니라 분봉을 받고 독자적으로 그 지역을 다스리는 몽골 귀족이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북방민족의 전통을 본받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한인들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지 않아, 유학을 익힌 한인 관료들이 정부를 장악하는 일을 피했다. 그리고 제국민의 출신성분을 네 등급으로 나누어, 첫 번째로 몽골인을, 그 다음으로 아랍이나 투르크 등 서방민족인 색목인을, 그 다음으로 보다 일찍 몽골에 복속된 북중국의 중국인인 한인을 꼽았으며 가장 나중에 제국에 들어온 남송 출신 중국인인 남인은 최하위에 두었다. 이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나 히틀러의 인종체계 같은 혈통에 따른 인종차별제도가 아니라, 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함에 있어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분류한 제도였다. 그래서 행성 이하 모든 지방장관들은 몽골인 아니면 색목인만이 임명될 수 있었고, 한인이나 남인은 재주가 뛰어나면 특채되었으나 과거제와 같이 공개적이고 일반적으로 정부에 들어갈 방법은 없었다.

 

 

 

쿠빌라이의 조정에는 용맹한 몽골인 장군, 박식한 중국인 유학자, 티베트의 라마승, 이슬람 상인, 중앙아시아에서 온 천문학자, 유럽의 가톨릭 선교사 등이 북적거리며 ‘세계정부’의 모습을 띠었다. 그 중에는 멀리 베네치아에서 찾아온 마르코 폴로도 있었다. 쿠빌라이의 통치 비전은 중국의 덕치 이념을 받아들여 정복한 중국인들을 달래고 융합시키는 한편 북방민족의 전통에 따라 군사적인 지배를 확실히 하고, 여러 인종과 종교를 망라한 각양각색의 의견과 재능을 하나로 합쳐, 다채롭고 빼어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원곡(元曲)’이라 불리는 희곡 문화가 융성했고, 조맹부, 안휘를 비롯한 한인 지식인들의 예술과 서하 출신의 곽수경이나 서양인 선교사들이 선도한 과학기술, 네팔의 아니코를 비롯한 장인들이 발전시킨 조각과 건축, 황실 후원의 가마에서 만들어진 도자기 등이 소박하고 단출했던 몽골인의 문화를 풍성하게 꾸며주었다.

 

 

길이 이어지지 못한 제국의 꿈


대원제국 수립 후 쿠빌라이가 실시한 주요 외정은 고려, 동남아시아, 일본에 대한 것이었다. 고려는 1231년 이래 수십 년간 몽골에 항쟁해 왔으나, 쿠빌라이가 집권하면서 화해 무드가 급속히 조성되었다. 1260년, 아리크부카에 대항하려고 막 남송 원정을 접고 북상하려던 참의 쿠빌라이에게 고려의 태자가 찾아온다. 두 사람은 매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회담을 했고, 그 태자가 고려 제24대 왕 원종이 됨으로써 오랜 여몽전쟁은 삼별초의 난이라는 최후의 걸림돌을 제거하면서 끝맺게 된다. 이후 고려는 대대로 원나라 황실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는 ‘부마국’이 되면서, 좋게 보면 세계제국 원나라의 파트너, 나쁘게 보면 원나라의 복속국가로 이어진다.

 

고려와 손을 잡고 1274년부터 진행한 일본 원정은 실패로 끝났는데, 일본의 입장에서는 실로 민족적인 쾌거라고 할 수 있었지만 쿠빌라이는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수양제와 같은 패배감을 갖지 않았고, 실제로 왕조의 위기도 전혀 없었다. 당시 원정의 주력군은 육군은 남송에서 항복한 중국군, 수군은 고려군이었다. 따라서 원정에서 이들이 숱하게 전사한다 하더라도 쿠빌라이의 몽골군에게는 별 피해가 없었고, 오히려 언제 적으로 돌아설지 모르는 이들의 힘을 빼는 효과가 있었다. 1285년부터의 베트남 원정과 1292년의 참파 원정도 군사적으로는 실패였지만 베트남을 고려처럼 복속국으로 만들고 참파와의 교역로를 확보함으로써 실속은 충분했다. 아무튼 초원을 바람처럼 달리며 가는 곳마다 승리를 쟁취했던 칭기즈칸 시대의 몽골인들이 보면 답답할 노릇이었겠지만, 쿠빌라이는 정복군주보다 수성군주의 입장에서 헛된 영광보다 실리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교적 덕치와 군사적 강권통치의 병행, 중국 역대 왕조의 계승과 북방인 정복체제의 조합이라는 비전은 아무래도 기반이 불안정했다. 쿠빌라이의 만년은 만주에서 티베트, 중앙아시아까지 제국 각지에서의 잇따른 반란과 끝날 줄 모르는 통치권 도전으로 시끄러웠다. 게다가 어머니 다음으로 존경하고 의지했던 황후 차비가 1281년에 죽고, 그녀가 낳은 황태자 친킨 역시 1285년에 병사하자 쿠빌라이는 인간적인 고통과 고독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이후 10년 동안은 정치 업무를 새 황후인 남비에게 일임하고는 폭음과 폭식을 거듭했다. 그 결과 급속도로 건강을 해친 그는 결국 1294년에 사망했고, 친킨의 아들인 티무르가 대를 이었다. 이후 원왕조는 8대를 더 이어갔지만 모두 불과 몇 년씩 재위하고 마는 병약한 인물들이었으며, 다시는 쿠빌라이 같은 걸출한 황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미 쿠빌라이 말년에 불거진 원왕조의 모순은 해결되지 못하고 악화를 거듭해, 결국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의” 왕조로 대체되고야 만다.

 

칭기즈칸이 보기에 손자 쿠빌라이의 선택은 옳았을까, 틀렸을까. 그는 자신의 후계자가 보다 진취적이고 용맹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의 소유물과 생명을 빼앗고 자신만의 영역을 한없이 넓혀 가는 삶도 장쾌하지만, 자신을 믿지 않고 틈만 나면 덤벼들려는 상대를 타이르고 껴안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삶도 위대하지 않을까.

   

 

 

함규진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