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볼셰비키-러시아 혁명 - 리어왕

지식창고지기 2010. 1. 25. 12:42

 

 

 

레닌과 스탈린

  

볼셰비키

 

단수형은 Bolshevik.(러시아어로 '다수파'라는 뜻)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한 분파.

 

레닌이 이끌었다. 1917년 10월 러시아 정부의 통제권을 잡았으며 주도적 정치세력이 되었다. 1903년 제2차 전당대회에서 당원은 직업 혁명가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레닌의 추종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당 중앙위원회와 기관지 〈이스크라 Iskra〉 편집진에서 한때 다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스스로 볼셰비키라는 이름을 썼으며 반대파에게는 '소수파'를 뜻하는 멘셰비키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 분파는 1905년 혁명에 같이 참여했으며 1906년과 1910년경에는 화해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서로의 차이점은 점점 커졌다. 볼셰비키는 계속 고도로 중앙집중화하고 훈련이 잘된 직업 정당을 주장했다.

 

 이들은 1906년의 제1차 전국 두마(의회)선거를 거부했으며 그뒤에 소집된 두마에서도 정부 및 다른 정당들과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더욱이 강도짓까지 무방하다는 자금조달 방식은 멘셰비키 및 당 외부의 비난을 받았다.

 

1912년 당시 극소수파가 되어 버린 볼셰비키를 이끌던 레닌은 이 조직을 완전히 구분해 조직함으로써 비공식적이지만 결정적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분리시켰다. 한편 레닌은 이 분파를 계속 엄격히 조직화하겠다고 결정함으로써 비혁명적 활동을 바라거나 정치전술 및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무오류성(無誤謬性)에 관해 그와 의견이 다른 많은 볼셰비키 동지들과 멀어졌다. 사실 1912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탁월한 지도자들 가운데 레닌과 합류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1917년 2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도시노동자와 병사들 사이에 점점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특히 레닌이 돌아온 4월 즉각적인 평화를 요구하고 노동자 의회인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더 큰 인기를 얻었다. 10월경에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차지했으며, 임시정부를 무너뜨린 뒤 이 행위를 제2차 소비에트 대회(농민대표들은 빠짐)에서 승인받고 공식적으로 정부통제권을 넘겨받았다.

 

10월혁명 직후 볼셰비키는 사회혁명당 좌파를 제외한 다른 혁명그룹들과 권력을 나누어 갖지 않으려 했고 마침내는 경쟁관계에 있는 모든 정치조직을 탄압했다. 이들은 1918년 3월 러시아(볼셰비키) 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다시 1925년 12월에 전연방(全聯邦)(볼셰비키) 공산당으로, 그리고 1952년 10월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Kommunisticheskaya Partiya Sovetskogo Soyuza/KPSS)으로 바꾸었다. 

 

볼셰비즘 Bolshevism

 

볼셰비키의 정치사상. 레닌이 내세운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시대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전위당의 지도하에 혁명적인 투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추구하였다. 직업적 혁명가에 의한 소수정예주의, 중앙 집권적 당 조직, 노농 동맹 따위가 특징이다.

  

러시아 혁명 [Russian Revolution, 볼셰비키 혁명]

1905년과 1917년에 러시아에서 일어났으며 통상 러시아 혁명이라고 하면 1917년의 혁명을 가리키기도 한다.

 

 

 

 

1905년의 혁명

 

러시아 제국의 정치·사회 체제에 대한 불만은 1905년 이전 몇 년 동안, 특히 굴욕적인 러일전쟁(1904~05)이후 다양한 사회단체의 시위로 폭발했다. 그들의 항거는 자유주의적 의사개진으로부터 파업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양상을 띠었으며, 학생소요와 테러범들의 암살이 포함되었다. '해방동맹'과 연계되어 있었던 이러한 시도들은 '피의 일요일'(1905. 1. 22)에 동궁(冬宮) 앞 광장에 집결해 있던 평화로운 시위군중들을 제국 군대가 무차별 살상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피의 일요일).

 

 총파업이 수도와 산업 중심지에서 뒤따라 일어났으며, 2월에 니콜라이 황제가 정부의 자문기관으로서 의회의 설립을 약속했지만, 이러한 제안은 파업중인 노동자와 농민, 심지어 젬스트보(지방자치적 농민공동체)의 자유주의자들이나, 4월경에 제헌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진보적 전문 직업인들조차 만족시키지 못했다.

 

폭동은 비러시아 지역, 특히 폴란드, 핀란드, 발트해 연안지방, 그루지야 등으로 확산되어갔으며 민족주의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반혁명세력인 '검은 백인단'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는데,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습격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군대 또한 폭동에 가담했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변에 주둔한 부대들이 반기를 들었다. 6월에는 오데사 항에 정박중이던 전함 '포툠킨호'에서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자문의회의 선거절차를 알리는 8월 6일자 정부포고문은 더욱 큰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9월 1개월 간 가중된 폭동은 10월과 11월 사이에 극도로 악화되었다.

 

 10월 7일에 시작된 철도파업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총파업으로 발전되었다. 파업위원회의 구실을 한 '소비에트'는 이바노보보스네센스크에서 최초로 결성되었다. 초기에 총파업을 주도한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였으나 사회민주주의자들, 특히 멘셰비키가 가담하자 혁명정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소비에트는 모스크바·오데사 등 러시아 내 여러 도시로 급속히 파급되어갔다.

 

니콜라이는 엄청난 규모의 파업에 당면하자 마침내 반응을 보였다. 그는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의 자문을 받아 헌법제정과 의회(두마)의 창설을 약속하는 '10월선언'을 발표했다(→ 10월선언). 비테는 새로운 각료회의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의회 혹은 공화국에 대한 급진 반대파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혁명지도자들은 타협을 거절했으며 심지어 자유주의자들조차 비테의 내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일부 온건파는 만족스러워했으며, 10월선언을 승리로 받아들인 많은 노동자들은 작업대로 복귀했다. 이것은 반대파의 제휴를 해체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약화시키기에 충분했다.

 

11월말 정부는 소비에트 의장이며 멘셰비키인 흐루스탈레프 노사르를 체포하고, 12월 3일에는 소비에트 건물을 점거하고 레프 트로츠키를 비롯한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는 새로운 총파업이 무르익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무력충돌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다.

 

일부 악법을 철폐함으로써 핀란드는 질서를 회복했지만 폴란드, 발트 해 연안지역, 그루지야에는 특별원정부대가 파견되어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감행했다. 1906년초 정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군대의 통제권을 다시 장악하게 되었으며 혁명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05년의 봉기는 전제정치를 민주공화정으로 대체하지 못했고, 제헌의회 소집에도 실패했으며, 혁명의 지도자들은 거의 체포되었다. 그러나 제국 정부로 하여금 광범위한 개혁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실은 헌법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제정된 '기본법'(1906) 및 합법적인 정치활동과 정당활동의 발전을 촉진시킨 의회의 창설이었다(→ 두마).

 

1917년의 혁명

 

1917년에 두차례에 걸쳐 일어난 혁명. 3월(구력 2월) 혁명은 차르 체제를 붕괴시켰고, 11월(구력 10월)의 혁명으로 볼셰비키는 권력장악에 성공했다. 차르와 러시아 국민들 사이의 유대는 1917년에 이르러 완전히 해체되었다. 정부의 부패와 무능은 누구나 명백히 아는 사실이었다. 1905년 혁명의 주요성과의 하나인 의회가 걸핏하면 해산되는 등, 반동정책이 계속되자 온건파들에게까지 불만이 확산되었고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는 소수민족들도 점차 반항적으로 되어갔다.

 

그러나 제국정권에 결정적으로 타격이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러시아의 전쟁수행능력 부족이었다. 장비의 열세와 지휘관들의 무력함으로 인해 러시아 군대는 참패를 거듭했다. 전쟁은 2가지 면에서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는데, 러시아가 더이상 중부 유럽과 서유럽 국가들의 군사적 상대가 아님을 입증해주었고, 러시아의 국민경제를 대책도 없이 파탄 직전에까지 몰고 갔다.

 

3월 8일,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식량부족을 견디다 못해 일으킨 시민의 봉기에는 대다수의 수도경비대도 참여했다. 니콜라이 2세는 3월 15일 퇴위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300년 이상 지속되어온 로마노프 왕조는 니콜라이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이 제위승계를 거절함으로써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두마 위원회는 제정의 뒤를 이을 임시정부를 결성했지만,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경쟁세력으로 등장했다. 이 소비에트는 페트로그라드 시내와 외곽지역의 공장 및 군부대에서 선출된 2,500명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비에트는 유럽 전쟁 참전을 지지한 임시정부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3월 14일, 소비에트는 임시정부의 명령이 아닌 오로지 소비에트의 명령에만 복종할 것을 군대에 지시한 유명한 '명령 제1호'를 공표했다.

 

 임시정부는 그러한 명령을 철회시킬 능력이 없었다. 소비에트는 자신들이 실질적인 러시아의 정부임을 대내외에 선포할 수도 있었지만, 보수파의 쿠데타를 유발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자제했다. 임시정부는 3~10월에 4차례나 개편되었다.

 

최초의 내각은 사회혁명당(SR) 당원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를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각료들로 조직되었으며, 후속 내각들은 일종의 연립내각이었다(→ 케렌스키). 이 가운데 어느 내각도 국가의 위기를 초래한 제반 문제들, 즉 농민들의 무단 토지점유, 비(非)러시아 지역에서의 소수민족 독립운동, 전선에서의 사기저하 등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도시·촌락·군대에서 페트로그라드를 본보기로 삼아 많은 소비에트들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임시정부보다 민중들에 훨씬 더 가까이 있었다. 소비에트들에서는 거의 무조건적인 참전중지를 요구하는 패배주의적인 기운이 무르익어갔는데, 급진사회주의자들이 점차 소비에트 운동을 지배하게 된 것이 그 원인 중의 하나였다. 6월 16일에 소집된 제1차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최다석을 차지한 단일 블록은 사회혁명당이었으며, 그 다음이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순이었다.

 

7월에 임시정부의 총리가 된 케렌스키는 라브르 게오르기예비치 코르닐로프 총사령관의 쿠데타를 진압했다(→ 코르닐로프). 그러나 그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대혼란에 빠져드는 러시아의 현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으며, 사회혁명당은 좌익의 탈퇴로 인한 심각한 내분사태에 직면했다.

 

 이렇게 임시정부의 권력이 쇠퇴해가는 동안 소비에트와 소비에트 내부에서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되어갔다. 9월 무렵에는 볼셰비키와 그들의 제휴세력인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이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제압하고,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다수파로 군림했다.

 

가을이 되자 '평화·토지·빵'을 약속하는 볼셰비키의 강령은 굶주린 도시 노동자들과, 이미 무더기로 부대를 이탈해 있던 사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비록 7월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혁명의 때가 무르익은 듯이 여겨졌다.

 

 11월 7일 볼셰비키와 좌익 사회주의 혁명당원들은 정부청사와 전신국 및 기타 전략적 요지를 점거함으로써 거의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10월혁명). 저항운동을 전개하려던 케렌스키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고, 그 자신은 국외로 망명했다. 쿠데타와 때를 같이하여 페트로그라드에서 소집된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조직된 새 정부인 인민위원회를 승인했으며,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의장직에 취임했다.

 

혁명의 영향

 

유라시아 대륙에 폭넓게 걸쳐 있는 러시아 제국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은 세계사에 프랑스 혁명에 못지 않은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러시아 혁명이 세계적으로 확대된 정치적 메카니즘이 된 것은 1919년에 발족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이었다.

 

인류사상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 전쟁(제1차 세계 대전)에 고통을 받고 있던 서구는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공산주의에서 하나의 복음을 발견했다. 서구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 내의 좌파들은 우파와의 대립이 격렬하게 되어갔으며 공산당의 결성을 서둘렀다. 러시아 혁명은 1918년에 독일에서도 계속되었으나 이것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구미의 여러 나라들은 러시아 혁명을 위험시했다. 볼셰비키들이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독일을 돕는 세력 정도로 여겼으나, 차츰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파괴할 만한 적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소련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사회개혁을 서두르고 노동자를 체제 질서 속으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가속시켰다. 러시아 혁명은 공산주의 운동과 지도층의 개혁의욕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대전 후의 서구에 혁신적인 파급효과를 미쳤다.

 

더욱이 제국주의적 세계질서로부터 피압박 민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이념을 내걸었던 러시아 혁명은 대전 중에 태동된 식민지 해방운동에 확실한 방향을 제시했고, 민족해방운동을 고양시키고 촉진시켰다.

 

이러한 측면에서 코민테른 제2회 대회에서 채택된 '민족 식민지문제 테제'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구체적으로는 중국에 미친 영향이 제일 컸으며, 쑨원[孫文]에서 시작하여 마오쩌둥[毛澤東]으로 완성되는 중국혁명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면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또다른 영향으로는 러시아 혁명이 종래의 국제질서를 부정하여 국제정치에 새로운 요소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 정부는 러시아 제국이 지고 있던 대규모의 부채를 인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대전 후 유럽에 생겨난 베르사유 체제는 소련을 배제했는데, 이것은 베르사유 체제의 압박 하에 있던 패전국이며 채무국인 독일이 소련에 접근하는 한가지 이유가 되었다. 1922년 소련과 독일은 라팔로 조약을 맺었고 급기야 비밀리에 군사적 협력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시아와 중동의 여러 나라들도 소련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1919년 7월의 카라한 선언은 중국에 대한 소련의 모든 권익을 포기한다고 선언한 것으로서 전 세계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소련과의 외교 관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아프가니스탄에게 있어서 하나의 현실적 근거가 되었다.

 

소련의 정책은 때에 따라 국익우선으로 기우는 적도 있었지만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나라가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서구 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자립의 길을 걸으려는 여러 식민지 약소 민족에게 현실적으로 상당한 힘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은 정치·외교의 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상·문화의 면에도 폭넓게 미쳤다. 서구세계의 위기를 느끼고 있던 지성인들은 이 혁명으로부터 받은 정신적 충격을 바탕으로 하여 현대 사상과 예술을 새롭게 모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