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산업혁명 - 리어왕

지식창고지기 2010. 1. 25. 12:37

산업혁명

 

지구라는 제한된 자연환경을 이용하면서도 인구수가 지난 200년간 수직 상승할 수 있었던 것은 산업혁명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1800년 이전에는 생활수준이 정체되어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인구수의 증가뿐만 아니라 인류의 평균적 생활수준(평균수명, 영양섭취량, 위생상태, 주거상태 등)도 같이 향상되었는데 이는 생산기술의 발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 자본주의의 발전과정

 

① 상업의 발달과 도시의 성장 : 농업 생산성의 확대에 따른 생산물의 증가로 중세가 시작된 이래 자취를 감추었던 국지 시장을 통한 교역이 되살아났으며, 지중해와 북해를 중심으로 하는 원격지 무역은 국제적 규모의 교역을 활성화시켰다.

 

② 본원적 축적 : 자본주의의 핵심은 자본이다. 그렇다면 서유럽에서는 언제 자본이 형성되었는가? 16세기 이래 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 금과 은 및 각종 산물이 유입되고, 노예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윤이 남게 되어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 가능하게 되었다.

 

③ 임금 노동자의 탄생 : 자본주의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자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가 필요하였다. 즉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분리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인클로저이다.

 

④ 시민혁명 : 자유로운 시장경제 질서를 원하는 부르주아지들은 귀족들에 의한 봉건적 규제가 자신들의 경제활동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혁명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 그러나 빈곤과 기아의 악순환이 계속되던 멜더스적 세계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산업혁명 때문이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이 이루어지고, 시장이 분업에 기초하여 편성되며, 시장이 세계적으로 확장된 산업혁명이후를 본격적인 자본주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잡는다.

 

1. 멜더스의 세계와 근대적 경제성장의 세계

 

- 멜더스의 가설 : 제한된 지역에서 인구가 계속 증가하면 생산량도 증가하다가 어느 일정 시점을 지나면 생산량 증가 속도가 느려진다(수확체감의 법칙). 이는 결국 생활수준의 하락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인구와 생활수준은 역관계라 할 수 있다.

 

- 근대적 경제성장 : 그러나 19세기 이후 영국에서는 인구증가와 동시에 생활수준도 같이 향상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1820년 약 2.100만이던 영국인구가 1989년에는 5,700만으로 늘어났고, 같은 기간의 1인당 생산은 열 배 증가했다. 이처럼 빠른 생산기술의 발전으로 인구와 생활수준이 동시에 증가하는 현상을 ‘근대적 경제성장’이라 한다.

 

2. 왜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는가?

 

① 부르주아지 계급의 존재 : 부르주아지들은 유능한 제조업자이자 무역업자들이었다. 이들은 국가 경제와 중앙 정부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 이를 통해 부르주아지들은 국가로부터 재산의 소유권을 인정받고,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은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세계 속에서 보다 합리적인 경제활동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② 시장의 확대 :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세계 전지역이 유럽의 경제 팽창에 예속되어 유럽의 명령에 따라 경제 형태를 갖추었으며, 원료공급지와 상품판매시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③ 인구증가 : 해외팽창가속, 잉여노동력 공급, 내수시장의 확대 ..

④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

 

※ 특히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이유

 

① 해외 및 국내 시장의 확대 :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에 승리한 이후 식민지 경쟁에서 계속된 승리로 해외시장이 날로 확대되었다. 내부적으로는 내국관세가 없고, 봉건적인 통행세가 없었으며, 교통로가 잘 정비되어 매우 견실한 국내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영국의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생활수준을 영위할 수 있었기에 1인당 상품 구매력이 대륙의 노동자들보다 높았다.

 

② 명예혁명 이후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고, 부유한 상인층의 정치적 발언권이 증대하여 정부의 간섭 없이 자유로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③ 부의 성공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관대해서 gentry나 yeoman의 사업 활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

 

④ 면공업 : 장원에서의 자급자족적인 생산방식이 붕괴되면서 면직물은 이제 일상적인 의생활에 이용되는 대량소비형 생필품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한편 광대한 해외 시장의 확보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입되는 값싼 원면으로 인해 면직물은 매우 시장성이 높은 상품임이 증명되었다.

 

 방대한 수요 시장의 형성은 약간의 자본과 기술 지식을 가진 중산 계층(초기 산업 자본가)에게 기술 혁신의 동기를 제공하여, 방적기와 직조기의 연이은 혁신이 이루어졌고, 이는 다시 값싸고도 능률적이며 지리적 제한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동력원으로서 증기력과 증기 기관의 혁신을 촉발했다.

 

그 결과 종래의 가내수공업적인 단계를 넘어서서 보다 새롭고 노동집약적인 공장제생산이 출현했다. 여기에 공장제는 제철공업 및 석탄공업을 자극하고, 교통과 통신을 발전시킴으로써 산업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즉 면공업은 영국의 산업혁명이 전 분야로 확산되는데 있어 기폭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3. 산업혁명내의 혁명

 

① 농업의 진보 : 북서 유럽에서 농업 생산성 향상 속도는 17세기까지 매우 느렸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관개 목초지의 건설과 3포제를 대신하는 새로운 윤작체계의 보급으로 농업 생산성이 놀랍게 향상되었다.

 

- 관개 목초지 : 물살의 흐름을 바꾸어 목초지의 풀 성장을 촉진시킴.

- 새로운 윤작 : 휴경지에 사료작물(순무, 클로버)를 재배하여 가축사육을 늘릴 수 있었고, 지력도 향상시켰다.

 

⇒ 이러한 새로운 농법은 중세의 개방 경지가 붕괴되어 토지 소유권이 확보되고, 공동 경작 제도가 사라지고 개인주의적 농업경영이 확산되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토지 소유주들은 이제 인클로저가 이루어진 토지 위에서 가격조건과 토질이나 기후 등과 같은 경작조건에 비추어 자신에게 가장 많은 이윤을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되는 농산물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농업의 지역적 전문화를 동반하는 상업적 농업 경영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② 에너지의 혁신 : 목재의 가격 상승에 따라 영국의 경우 1550년대에는 17만 톤에 불과하던 석탄 생산량이 1700년경에는 300만 톤, 1800년경에는 1200만 톤으로 증가했다. 석탄의 사용은 목탄 채취에 필수적이었던 산림지를 경작지로 전환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석탄을 이용한 벽돌 생산이 급증하자 건축 자재로서의 나무의 중요성도 감소했다. 게다가 증기기관의 주동력으로 사용됨으로써 공업 생산성 향상에 기여했다.

 

③ 공업과 기술의 발전 :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영국에서는 제조업 전반에 걸쳐 새로운 생산기술이 많이 보급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제철 기술, 증기기관, 면제품 생산기술 등은 산업혁명을 견인한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④ 수송혁명 : 농업 생산의 지역적 전문화와 공업의 성장은 원료와 상품 그리고 인구의 대량이동 및 빠른 운송을 필요로 하게 되어 운하의 개설과 도로의 개량이 발빠르게 진행되었다. 특히 스티븐슨(Stephenson)의 증기기관차와 풀턴의 증기선은 대형화물의 수송을 전세계로까지 가능하게 하였다.

 

4. 산업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전통적으로 역사학자들은 산업혁명의 단절성과 그 혁명적 성격을 강조해 왔다. 기계적 원리를 생산에 적용함과 아울러 공장 노동자 계급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야말로 한 사회의 전면적인 변화를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20년간 수정론자들은 기술 혁신과 공장제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견해에 도전하였다. 이들의 비판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산업 혁명기에 영국의 기술 변화는 획기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다른 나라에 비해서 뚜렷하게 우월성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제도 교육의 직접적인 영향도 미미한 편이어서 높은 수준의 과학 지식이 곧바로 기술 혁신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또 새로운 기술 혁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전파 속도는 매우 느렸다. 숙련에 기초를 둔 수공 기술이 오히려 지배적인 패턴이었다. 19세기 중엽에도 산업은 대부분 수공의 기반 위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증기력도 소수의 산업 분야를 제외하고는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진정한 의미의 산업 혁명은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가능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기계화가 지체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수정론자들은 노동력이 풍부하였고, 결함이 많은 기계 대신에 수공 기술만을 사용하더라도 생산성 향상이 가능했으며, 분업을 통하여 개인 작업을 단순화할 수 있었던 점을 지적한다.

 

② 공장제 생산 방식 또한 수공 기술과 양립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산업 분야에서 수공 기술과 ‘공생 관계’를 이루었다. 공장이 대부분의 산업 분야에서 생산의 지배적 형태가 된 것은 19세기 말의 일이었다. 공장은 생산 공정의 분업에 의하여 작업을 단순화하고, 그에 따라 다수의 미숙련 노동력을 고용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공장은 기계를 집중할 필요보다는 자본가가 노동자들을 통제할 필요성에서 나타났다고도 할 수 있다.

 

④ 전체 인구 중에서 차지하는 공업 인구의 비중이나 산업 생산 전체에서 차지하는 자본주의적 공업 생산물의 비중 등을 본다면 오히려 영국의 산업화는 19 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시기의 특징이지 소위 산업 혁명기의 특징으로 볼 수는 없었다. 영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기 시작한 1840년대-1850년대에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영국은 여전히 농업국이었지 공업국은 아니었다.

 

※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산업 혁명이라는 용어 대신 '산업화'라고 부르기를 주장하며 산업 '혁명'이란 것이 과연 존재했는가 하는 의문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인 기술변화의 배후에서 전개되는 중대한 사회적 변화들은 이를 혁명으로 부르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중세 봉건제하의 양대 세력이었던 봉건 영주와 농노를 대신하여 자본가와 산업 노동자가 사회의 중추 세력으로 등장했다. 또 경제생활의 중심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이동하고 도시화가 서서히 이루어졌다. 한편 산업 혁명의 선두주자 영국은 막강한 공업력을 무기로하여 세계시장을 석권하여 경제 활동의 무대를 과거와는 달리 세계적인 범위로 확대시켰다.

 

그리하여 한 민족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문명이냐 아니면 야만이냐를 결정하게 되는 사상 유례가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산업 혁명이 혁명일 수 있는 까닭은 이러한 근본적 변화의 중심축에 바로 그것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5. 산업화의 부정적인 결과들

 

영국에서 최초로 일어난 산업혁명의 여파는 곧이어 유럽대륙과 아메리카로, 그리고 마침내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인간의 생활 형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생산규모의 증대는 공장제를 정착시켰고, 수백만에 달하는 농촌 인구를 도시로 내몰아 도시화를 촉진시켰다. 한편 사람들은 스스로를 나름의 이해관계를 지닌 한 계급의 성원으로 자각하고, 자신의 이해관계가 다른 계급의 그것과 대립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 노동계급의 삶

 

노동 계급 내에도 기술 숙련도, 임금, 작업 장소 등에 따라 여러 층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숙련 노동자는 여유 있게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고, 단순 육체노동자는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숙련 노동자도 새로운 기계나 새로운 생산방식이 도입될 경우 비숙련 노동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어 노동자들의 삶은 매우 불안정했다. 또한 경제불황이 반복되었지만 노동자들은 실업 보험제도 같은 생계 보장책이 전혀 없었으며 임금이 매우 낮아서 수입 가운데 65% 정도를 먹는데 쓸 수밖에 없었다.

 

① 식생활 : 산업혁명기 민중의 식생활에 관한 논의는 주로 곡물, 육류, 감자, 맥주, 설탕 및 차 소비를 주로 문제 삼는다.

 

19세기 초반에는 1인당 밀 소비가 18세기 말보다 줄었다. 당시 밀을 대체한 것은 주로 감자였는데, 노동자들은 흰 빵을 대신해 감자를 먹는 것을 생활의 저하로 느꼈다. 육류 역시 노동자들의 생활수준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실질임금이 증가하면 가장 먼저 소비되는 물품이었지만 19세기 초에 일반 노동자 1인당 육류 소비량은 오히려 하락하였다. 한편 맥주 소비량은 감소하고 차와 설탕의 소비는 늘어났는데, 이는 노동의 필수품이던 맥주의 소비를 차가 대체한 결과였다.

 

② 도시화

 

1800-1850년 사이에 아직은 농촌의 인구가 대다수이긴 하지만 도시 인구의 증가속도는 놀라운 정도였다. 그 이유는 수력을 이용한 공장들은 주로 농촌에 산재해 있어야 했지만 이제 증기기관이 이용되면서 대도시를 중심으로 공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대도시는 우선 운송이 편리해 원료 수입과 완제품 반출에 유리했고, 노동자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인구의 증가가 반드시 산업화의 영향만은 아니고 농촌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반적인 인구 증가의 영향도 컸다.

 

도시 인구 증가의 결과는 인구 과밀화였다. 19세기 중반 20년간 빈의 인구 증가율은 40%였지만 주택 증가율은 11.5%에 불과했다. 도시의 인구 과밀화 현상은 도시민의 건강에 위협적인 정도였는데, 충분한 하수도 시설이 없고 깨끗한 물이 없으며 공장과 철도 집에서 나오는 매연은 콜레라, 티푸스, 결핵 등이 창궐한 위험이 있었다. 많은 중산층은 이미 병마의 위험이 있고 공해와 매연이 가득한 도심을 떠나 변두리로 이사했다.

 

③ 여성들의 삶

 

노동 계급의 여성들은 피임 기구의 부족과 이런 기구가 부도덕한 것이라는 통념으로 인해 가임 연령의 대부분을 임신 상태로 보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건강상태가 매우 위험했다. 이들은 대개 주급을 받는 남편으로부터 생활비를 받아서 가계를 꾸려가야 하는데, 생활이 너무나 어려워 직접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대개 일의 양에 따라 받는 성과급제였으며, 많은 여성들이 고한작업장(sweatshop)이나 중산계층의 하녀로 일해야 했다.

 

* 사생아의 급격한 증가?

 

1750-1850 사이 사생아가 급증했는데, 프랑크푸르트에서는 1700에 2%이던 사생아가 1850에는 25%로 증가했으며, 프랑스의 보르도에서는 1840년대 출산의 1/3이 사생아였다. 그 원인은 분명치 않으나 독일의 경우는 결혼 금지로 인한 결과인 듯 하며, 가족을 떠나 도시에서 생활해야 하는 유동성의 증대로 인해 가족 유대의 약화, 부모들의 감시 소홀, 무절제한 생활 기회의 확대 등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렇다면 도시 여성 노동자는 성적으로 문란했다는 말인가? 아니다. 농촌에서도 혼전 성관계는 있었으나, 그것이 결혼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경제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결혼 약속이 이행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2) 공장제 노동

 

- 작업 시간이 대개 12-14시간이었다. 많게는 16시간도 일해야 했을 정도이다.

- 작업 환경이 불결하고 위험했다.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먼지가루로 날리는 속에서 일해야 했으며, 어린이들은 기계 청소를 주로 맡았는데 안전장치 미비로 위험했다. 광산에서는 어린아이들이 12시간 내내 통풍 조절용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일을 주로 맡게 되는데, 자주 졸음에 곯아 떨어져 갱도 내에 있는 광부들을 위험하게 만들기도 했다.

 

- 시계의 통제에 따라야 하는 판에 박힌 일상사 : 특히 1세대 노동자들은 자신이 공정을 계획하고 휴식을 스스로 통제하던 방식에서 감독자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추어 동시에 시작하고 동시에 끝내야 하는 공장제 노동 방식으로 전환하는데 대해 많은 어려움을 느껴야했다.

 

- 어린이 고용 : 대개 엄마를 따라 공장에 와서 노동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말도 잘 듣고 임금도 싸서 환영받았다. 물론 예로부터 아동 노동은 존재했지만 예전에는 부모의 통제 하에서 이루어지던 것이 이제는 아이를 하나의 수단으로 취급하는 자본가의 감독에 따라 노동을 해야 했다. 어느 서인도 제도의 노예 고용주는 도시에서 어린이를 고용해 하루 12시간 노동시키는 현실을 보고 공장주들이 너무나 잔인하다고 한탄했을 정도이다.

 

6. 고전 경제학

 

(1) 아담 스미스(Adam Smith)

 

사회의 복리는 개인의 복리에 따라 지배되므로 자유로운 경쟁 상태에 있을 때 사회의 복리는 최대한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연스럽게 조정되므로, 정부는 규제와 금지를 풀고 단지 평화를 유지하고, 재산을 보호하는데 힘쓰면 된다.

 

(2) 맬서스(Thomas R. Malthus) : “인구의 증가는 식량의 증가를 앞지르는 경향이 있다.”

 

맬서스주의적인 인구이론이 사회정책에 직접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노동계급이 가난한 이유는 자본가의 이윤이 너무 높기 때문이 아니라 인구가 식량보다 빨리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즉 노동계급의 가난이 인위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3) 리카도(David Ricardo)

 

리카도의 ‘임금 법칙설’은 노동자의 수요와 공급의 변화가 노동가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노동자가 부양능력 이상의 임금을 받으면 자식을 많이 낳게 되어 노동자 수가 증가하며 이는 결국 노동 임금의 하락으로 귀결되므로, 장기적으로 볼 때 노동자에게 부양능력 이상의 임금을 주는 것은 노동자에게 해가된다는 이론이다.

 

※ 즉, 사회의 복리는 개인의 복리가 좌우하며, 정부가 노동시간과 임금을 규제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정부는 평화를 유지하고 재산을 보호해주는 최소한의 기능만 담당하면 된다. 경쟁은 능률적인 것의 성공을 이끌어내는 원리이므로 시장은 경쟁의 원리에 의해 작동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이들 주장의 요체이다.

 

사회주의

 

1. 노동자들의 저항

 

19세기는 산업자본주의가 몰고 온 급격한 사회변동에 대해 일반 하층민들의 저항이 본격화되는 세기이기도 하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생산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이 생산수단으로부터 유리되어 무산 계급화하는 역사적 현상이 가속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자들의 일상생활에도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ex) 자연의 변화 리듬에서 시계에 의한 일률적 통제, 작업 중 금주, 노동과 여흥의 분리, 공유지의 인클로저로 방목, 낚시, 벌목 금지 등.

이러한 갈등 속에서 노동자들은 여러 형태의 집단적 행동을 통해 산업화에 저항했다.

 

(1) 러다이트(Luddite) 운동

지금까지 가내수공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온 노동자들은 공장이 세워지고 기계가 도입되어 값싼 제품이 생산되자 생계의 곤란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노동자들은 기계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버렸다고 생각하고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운동이 1811년 말경 노팅엄 근처에서 시작되었다. 내각은 러다이트들을 혹독하게 진압했으며, 1812년 법은 기계파괴 행위를 사형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법을 통과시켰고, 1813년 요크에서 열린 집단재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교수형을 받거나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나폴레옹 전쟁에 따른 불황 때문에 1816년 이와 비슷한 폭동이 일어났으나 강경 진압과 경기회복으로 곧 끝났다.

 

(2)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대표자를 직접 뽑아 의회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적 권력을 가져야만 경제적 권익도 옹호될 수 있다고 생각한 노동자들은 보통 선거권을 쟁취하기 위해 차티스트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요구는 1838년에 작성된 ‘인민헌장(People's Charter)에 담겨 있다.(① 성인남자 보통 선거권 ② 인구비례에 의한 평등한 선거구 설정 ③ 하원 의원의 재산 자격 폐지 ④ 비밀투표 ⑤ 의원에 대한 봉급지급 ⑥ 매년 선거)

 

→ 대규모의 시위와 청원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1848년을 기점으로 운동은 소멸하게 되었으나, 요구조건의 대부분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실현되었다.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음에도 불구하고 차티스트운동은 노동계급에 의한 최초의 대규모 정치적 민주주의운동이라는 의의가 있다.

 

(3) 노동조합운동

노동조건 개선,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등을 위해 결성된 노동조합은 산업화가 가속되면서 도시에 노동자가 집중하게 되고, 수송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형성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노동조합이 법으로부터 심하게 탄압 받았으나, 1871년에 노동조합법으로 합법화되었으며, 근무조건도 공장법의 개정을 통해 계속 개선되었다.

 

2. 사회주의의 인간관 ․ 사회관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반발로 나타났으므로, 자본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인간-사회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은 독립적인 원자이기는커녕 물질 면에서나 정신적인 면에서도 불가피하게 상호의존적이다. 그는 사회적인 존재로서 타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운명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자유주의자들도 인간을 합리적인 존재로 바라보지만 사회주의가 보기엔 자유주의의 합리성은 두 가지 점에서 제한적이다. 우선 인간 일반을 합리적인 존재로 규정하면서도 자유주의는 소유권을 개인의 능력을 재는 기준으로 간주함으로써 유산자층만을 사회의 주인공으로 인정하고 있다.(사회적 능력의 기준이 경제력이나 교양이어도 마찬가지이다.)

 

두 번째로 자유주의가 계획하고 통제하려는 삶이란 ‘개인적 삶’인데 개인적 삶을 합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집단적 삶 역시 합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이것이 보다 인간적이다.

그들이 볼 때 독립적인 개인들이 경쟁하는 사회란 인간의 탈을 쓴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밀림과도 같은 것이었다.

3. 과학적 사회주의의 등장

Karl Marx(1818-1883)는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의 착취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보았다.

 

(1) 잉여가치설(surplus value theory)

마르크스는 “모든 재화의 가치는 노동으로 공정하게 측정된다”는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을 받아들이지만 이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공격의 도구로 활용한다.

 

노동가치설에 의하면 교환을 위해 생산되는 모든 상품의 공통점은 노동이 투입되었다는 것이며, 따라서 상품에 구현된 노동의 양이 그 상품의 가치를 결정한다. 그리고 생산에 투입된 노동량은 사회적 노동시간(평균적 생산성)으로 결정된다.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자본가에게 착취당하고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한다. 그런데 노동력은 다른 상품과는 달리 그 자체의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한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는 생활에 필요한 임금을 받기 위해 노동하는 필요노동시간에 더해서 사용자의 이윤을 위해서 잉여노동시간을 투여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잉여가치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노동 착취의 척도인 것이다. 이렇듯 자본가는 노동자로부터 보다 많은 시간을 빼앗아야 이윤이 증가하므로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2) 자본주의 사회는 어떠한 모순이 있는가?

마르크스는 부는 갈수록 소수의 사람에게 집중된다고 말했다. 즉 소수의 대생산자가 다수의 소생산자를 억압․착취하며, 기계사용은 계속 확대되므로 더 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산업예비군”이 되어 대중의 빈곤이 심화된다고 보았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은 공장제의 집단노동으로 전화되어가면서 사회화한데 반해 소유는 사적이다.(사회화한 생산 : 자본주의적 전유)

 

(3) 자본주의 사회는 왜 붕괴하는가? - 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마르크스는 역사는 변증법적(dialectic)으로 발전해간다고 보았다. 역사를 운동, 변화, 변형, 발전시켜 나가는 힘은 경제, 정치, 법, 종교, 교육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경제적 힘이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요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역시 역사상의 한 체제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소멸하게 되어 있다.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4)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킬 역사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 proletariat

노동자 계급의 궁극의 목표는 “노동자 계급의 완전한 해방”이다. 이것은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통해 사유재산을 폐지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사유재산은 어떻게 폐지되는가? 그것은 혁명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진다.

 

4. 현실 사회주의 : 소련의 사회주의 실험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체제의 대안인 사회주의사회가 어떤 모습을 가질 것이며 어떻게 건설되어야 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받을 것이며, 보다 고차적인 공산주의 단계에서는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을 것이라는 식의 매우 추상적인 서술에 머물렀던 것이다.

 

사회주의체제의 운영원리와 방법 등에 관한 논의가 구체화된 것은 1917년 러시아에서 인류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첫 실험이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리라는 마르크스의 예측과는 달리, 혁명 당시 러시아의 생산력 수준은 당시의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에 비해 크게 낙후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또한 새로운 체제의 출범을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위협으로 받아들인 서방 국가들은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게다가 연이은 세계대전과 내전으로 인한 경험으로 레닌(V. I. Lenin)이나 스탈린(J. Stalin) 등의 소련 지도자들은 보다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위하여 그리고 서방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산력의 발전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게 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 소련의 생산력 수준을 사회주의 체제에 걸맞는 것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전시공산주의(War Communism)나 신경제정책(NEP : New Economic Policy)과 같은 다양한 실험을 하였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모순인 생산과 소유의 분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협동조합이나 국영농장 또는 국영기업 등에 의한 전(全)인민적 소유가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원리로 채택되었다. 전인민적 소유가 말 그대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적 조직원리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함은 물론이다.

 

한편, 재화나 서비스가 시장메커니즘에 의해 분배되는 자본주의의 원리는 중앙계획기구에 의한 생산과 분배의 통제라는 계획경제체제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1930-40년대에 연간 10% 이상의 고속성장을 했으며, 세계수준의 과학기술을 달성하고, 인민의 생활수준을 상당하게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지닌 것이었다. 소비에트 체제는 구 볼셰비키에 대한 잔인한 숙청, 러시아 민족주의의 격화, 스탈린 1인 독재 등과 같은 파행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급격한 공업화를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사회주의의 건설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다.

 

또한 계획경제시스템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문제로서 비효율성을 지적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전인민적 소유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국가기구 또는 당조직을 장악하고 있는 관료들에 의해 생산수단의 소유 및 잉여생산물의 처분 등이 장악됨으로써 발생하는 비민주성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결국 1980년 말에 현실 사회주의 체제는 몰락하였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는 역사에서 사라진 듯하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저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즉 자본주의 경제를 토대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만이 역사의 유일한 대안임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장밋빛 미래는 너무나 소박한 견해인 것처럼 보인다. 1980년대 레이건과 대처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된 신자유주의는 1995년에 수립된 세계무역기구 등을 통해 개방과 자유무역의 원칙을 전 세계적으로 강요하면서 경쟁에 입각한 시장 질서를 국제적으로 창출해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은 결국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강대국에 부가 편중되어 있으며, 자본을 소유한 자들만이 그 열매를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인간의 보편적 성향을 무시한 채 비인간적인 체제를 고수해서 몰락한 것이라면 현실 자본주의 역시 똑같은 비난의 화살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