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리카도와 리카도의 해악 - 리어왕

지식창고지기 2010. 1. 25. 12:34

리카도와 리카도의 해악

 

 리카도, 데이비드 Ricardo, David(1772∼1823)

영국의 경제학자로 고전학파 정치경제학의 완성자이다. 증권중매인인 에이브러햄 리카도(Abraham Ricardo)의 3남으로서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이브러햄 리카도는 그 당시 런던주식시장에서 주식중개업 허가를 받은 12명의 유태인 중 한 사람이었다.

 

데이비드 리카도는 철저한 개인지도와 옥스퍼드대학에서 엘리트교육을 받은 그의 논적, 토머스 맬서스와 달리 대학 문턱에도 가지 못한 경제학자였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무시된 그의 교육문제에 대해 자주 불만을 토로하곤 했었다.

 

그가 제대로 받은 공식교육이란 소년시절(11살 때부터 13살 때까지) 스피노자(B. Spinoza)도 재학한 적이 있는 명문중학교인 암스테르담의 올란다중학교를 다닌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스티글러(G. Stigler)가 말한 것처럼 ‘교육에 의해 지도되지 않은 천재성’을 갖게 되었다. 14살 때에 그는 런던, 암스테르담 등에서 증권업에 관한 실무를 습득하고, 뛰어난 이재술로 20대 중반에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리카도가 뛰어난 치부술을 가진 것은, 맬서스가 유일하게 투자에 의해 번 돈이 리카도에 의해서라는 일화와 그가 죽을 당시 남긴 자산이 67만 5천 파운드에서 77만 7천 파운드였으며, 연간소득만도 2만 8천 파운드에 이른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리카도 삶의 전환점은 그가 21살 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퀘이커교도인 프리실라 앤 윌킨슨(Priscilla Ann Wilkinson)과 결혼하면서부터였다. 이것을 기회로 집안으로부터 독립하여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유태인 문화전통에서 벗어나 전형적인 영국신사로 사회적 신분전환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5살이 되어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신분이 되자, 그는 자신이 일찌감치 사업을 위한 교육을 받은 것을 감사하며, 학문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성공한 증권브로커로부터 지적인 엘리트로의 변신을 꾀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그는 수학, 화학, 광산학, 지리학(이 당시 그는 런던지리학협회 초창기 회원이었다) 등에 관심을 갖고, 1799년 27살 때에 온천휴양지인 바드에서 처음으로 「국부론」을 읽고 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천성적으로 분석적 두뇌를 가진 리카도는 이 저서를 읽고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곧 정치경제학이라는 학문주제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리카도가 경제학자로서 데뷔한 것은, 그것도 시사경제문제평론가로서 런던지식사회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10년이 지난 1809년이었다. 그는 최초의 경제논문인 「금의 가격」(The Price of Gold)을 「모닝 크로니클」(Morning Chronicle)지에 실었는데, 여기서 그가 다룬 문제는 나폴레옹전쟁에 따른 물가상승문제를 화폐수량설의 입장에서 잉글랜드 은행권의 통화남발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이후 리카도는 통화공급제도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데, 줄곧 그가 주장한 것은 발권업무와 은행업무를 분리하고 금과의 태환을 유지하며 통화량은 금의 유출입에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통화학파(Currency School)의 공식입장이 되어 이러한 견해에 반발하고, 물가상승의 원인을 대륙봉쇄령에 의한 곡물가격의 상승으로 보는 은행학파(Banking School)와 지금논쟁(地金論爭, Bullion Controversy)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리카도는 날카로운 현실감각과 생생한 실전적 지식을 바탕으로 경제논리를 전개하는 위대한 경제학자로서의 여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통화문제에 있어서 리카도의 생각은 통화공급이란 준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통화주의적 시각이었다. 그는 이 생각을 「금의 고가격, 은행권감가의 증거」(The High Price of Bullion, a Proof of the Depreciation of Bank-Note)라는 소책자에서 전개하였다. 단순명료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리카도의 논조는 곧 많은 확산을 가져왔으며, 리카도의 명성을 크게 하였고 리카도의 연구는 본격화되었다.

 

나폴레옹전쟁이 끝나면서 영국경제가 고민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경제문제는 곡물가격의 상승과 자본수익성감소에 따른 경기침체였다. 전쟁으로 이익을 본 계층은 지주뿐이었고, 대다수 국민인 기업가와 임금노동자들은 생활비의 압박 및 임금상승압박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영국은 산업화가 급속화되면서 식량수입국으로 전환하고 있었고, 그 당시 곡물은 임금재의 주요 구성요소였다.

 

그러므로 식량의 수입은 계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주들은 지대수익의 상승을 유지하고자 곡물수입금지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리카도가 보기에 이것은 영국경제의 성장을 저지하는 시도로, 대다수 국민들을 빈곤에 빠뜨리는 행위였다. 영국이 계속 성장하려면 무역장벽을 없애고, 자유무역주의를 시행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 생각을 1815년에 발표한 ‘높은 곡물가격이 이윤에 미치는 영향’에서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의회의 ‘곡물위원회’에 나가 맬서스와 함께 논쟁을 벌였다. 맬서스의 입장은 곡물수입의 금지로 인해 지대소득이 올라가는 것은 곧 경제의 유효수요를 확장시켜 지속적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의회에서는 리카도가 반대한 ‘곡물법’이 통과되고, 리카도의 견해는 1846년 곡물법이 철폐될 때까지 유보되어야만 했다.

 

이 논쟁과정에서 리카도는 현실감각에 입각한 자신의 경제논리를 좀더 학술적인 차원으로 엄밀하게 모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사실 제임스 밀의 격려도 한몫하여, 경제학을 과학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획기적인 저서 「정치경제학 및 조세의 원리」 제1판을 1817년에 출간하고, 1819년에 제2판, 1821년에 제3판까지 개정하였다.

 

여기서 그는 ① 상대가격은 투하노동량, 즉 생산비에 의해 결정된다. ② 자본투자가 계속되는 경제성장과정에서 임금소득과 이윤소득은 역관계에 있으며, 또한 이윤소득과 지대소득도 역관계에 있다. ③ 축적의 확장은 토지의 생산성을 하락시켜, 곡물가격, 지대, 임금을 상승시키고 이로 인해 이윤은 감소함으로써 경기침체상태를 가져올 수 있다. ④ 상대가격변동과 분배율변동은 서로 무관하다고 하는 유명한 성장/분배모형을 제시하였다. 이는 최초로 경제분석방법으로서 연역법에 의해 경제이론을 모형화한 시도였다.

 

그러나 리카도는 위 ④번의 문제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생산과정에서의 시간요소의 개입으로 인해 상대가격변동과 분배율변동이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게 되는 곤란성에 빠진 것이다.

 

그는 이를 불변의 가치척도라는 분석도구로 해결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1819년에 완전히 증권거래업에서 손을 떼고 모아 놓은 재산으로 오직 학문연구에만 몰두할 것을 선언하고, 이 문제의 규명에 진력했다.

 

그러나 1823년 아직은 이른 나이에 죽을 때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리카도는 자기 삶의 성공을 이룩한 몇 안 되는 경제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사업을 통해 실물경제를 다루는 일에서도 성공하고, 그 당시 영국의 유명 엘리트학자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교류할 정도로 학자로서의 명성도 얻고, 고전학파 정치경제학의 완성자라는 명성을 경제학의 역사에서 얻을 정도로 경제학자로서도 성공하였다.

 

 맬서스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지만 죽을 당시 맬서스를 유산상속자 중의 한 사람으로 지명할 정도로 지적인 자극을 제공해 주는 뛰어난 학문적 동반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교수가 되어 보지는 못했지만, 상아탑에 갇혀 있는 모든 교수, 경제학자들의 경의를 받는 위대한 경제학자였다. 리카도경제학은 그의 사후 리카디언 경제학자, 제임스 밀(J. Mill), 매컬럭(J.R. MacCulloch) 등에 의해 변질되는 운명을 맛보지만, 스라파(P. Sraffa)를 거쳐 오늘날 신리카디언 경제학(Neo-Ricardian Economics)으로 부활되고 있다.

 

 

리카도의 해악(害惡)

 

[영] Ricardo’s vice

슘페터가 리카도만이 아니라 리카도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이들의 한계를 리카도주의자의 해악(Ricardian Vice)이라 불렀는데, 바로 여기서 비롯된 용어이다. 슘페터에 따르면, 리카도는 일반론에 관심이 없고 오직 실제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지만 리카도는 수많은 현실변수들을 모두 고려하기보다 그것들을 임의로 분리시킨 채 소수의 총량변수들이 맺고 있는 관계(여기서 다른 변수들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된다)를 통해서 이론적 결론을 도출하고 그 결론을 곧바로 현실에 적용시켰다. 슘페터는 이렇게 단순한 추상적인 이론 결과를 현실문제에 곧바로 적용시키는 것을 리카도주의자의 해악이라 불렀다.

 

이를테면 리카도는 곡물법 논쟁에서 이윤이 밀 가격에만 의존한다는 이론명제를 도출하고 이 명제를 곧바로 현실정책에 적용시켰지만 이윤이 밀 가격에만 의존한다는 명제는 다른 것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가정에서만 타당한 것이다. 또한 슘페터케인즈(J.M. Keynes)도 이와 유사한 오류를 지녔다고 평가한다.

 

그러므로 케인즈경제정책도 다른 것이 불변이라는 가정에서만 성립되는 이론 내용을 곧바로 현실문제에 적용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홀랜더(S. Hollander)처럼 리카도가 자신의 이론 모델을 추상적인 것으로 인정했다고 주장하면서 슘페터의 비판에 대해 리카도를 방어하는 사람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