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세계를 바꾼 기업(The Corporation That Changed the World) - 리어왕

지식창고지기 2010. 1. 25. 12:59

The Corporation That Changed the World by Nick Robins
세계를 바꾼 기업 ,
Nick Robins
Reviewed by Sreeram Chaulia


동인도 회사는 간악한 근대세계의 창조에 한 몫 한 괴물이다. 역사가 Nick Robins의 이 거대회사에 대한 매서운 새 역사는 계몽시대 동안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기업을 오늘날의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의 관점에서 조사한다. 그것은 그 회사의 파괴적인 유산을 노정시킴으로써 서수 기업들과 아시아 국가들의 미래 상호 작용이 공정성의 원리에 입각하게 되기를 바라는 하나의 시도이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동인도회사는 배임 행위, 주식-시장 왜곡과 인권 억압으로 그 시대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모든 정치적 스펙트럼에 걸쳐 그 동시대인들은 그 “회사”를 거만하고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제도로 보았다.

칼 마르크스는 그것을 영국의 “금권정치”"moneyocracy"의 표준적인 사례로 보았고, 강력한 기업들을 아주 불신하던 아담 스미스는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서 “억압하고 지배하는 ” 방식에 경악했다. 현대 보수주의의 아버지인 에드먼드 버크는 인도가 “동인도회사의 지속되는 국부 유출로 근본적이고 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1600년에 왕립 특허장에 설립된 동인도 회사의 활동 범위는 대서양에서 인도, 동남아, 중국 그리고 일본까지 뻗쳤다. 인도의 식민 지배는 동인도 회사의 약탈의 최종 결과였지만, 그 궁극적 목적은 주주들과 런던의 매년의 주식 배당금을 염두에 둔 이윤 추구였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윤이 이 회사의 기본 동기였는데, 그것은 “서양에서 동양으로의 수세기에 걸친 부의 흐름을 역전시키고 세계 발전의 방향을 틀게 하였다.” 로빈스는 지금 영국에서 진행 중인 동인도 회사에 대한 낭만적인 재해석에 도전한다.

 

 그는 그런 해석이 인도에서 그 회사의 존재를 특징짓던 남용, 비참함, 황폐화와 약탈을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그의 요점은 동인도회사는 그의 강탈, 부패 그리고 무법에 기초하여 평가되어야지 동양 문화를 “발견”한 주변적인 공헌에 의해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생애에 걸쳐 , 동인도회사는  그 것이 번 관세 세입과 그것이 제공할 수 있는 선물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해야 하였다. 공작들과 국회의원들에 대한 선물과 뇌물은 “사업의 기본비용의 일부”였다. 왕과 아시아 엘리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그 회사의 독점을 지속시킨 장벽들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었다.


처음부터, 무력은 동인도회사가 아시아 시장에 접근하는데 핵심적이었다. 동인도회사 이사들은 “손에 칼을 들고 무역을 하는 것을” 자랑하였다. 초강력 “비밀 위원회”가 동인도회사의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전략을 정의하였다.


무력과 사기가 손을 맞잡고 시장 지배를 차지하는데 앞장섰다. 동인도회사는 상업적 이익을 위하여 정복할 자세가 항상 되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라이벌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모토를 흉내 내었다.“ 우리는 전쟁 없이는 무역을 하지 않고 무역 없이는 전쟁도 하지 않는다.”


동인도 무역업자들의 최초의 물결은 지금은 인도네시아라고 불리는 곳으로부터 오는 향신료에 집중했다. 그들은 “필요할 때는 무역하고 가능하면 약탈했다.” Josiah Child 경은 1680년대의 동인도회사의 총독이었는데, 동인도회사를 인도에서 그것을 주권 권력과 “강력한 군국주의적 정부”로 변모시키려는 급진적 계획을 생각했다.


이 최초의 진입시도는 무굴 군대에 의해 패퇴되었다. 1707년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Aurangzeb)가 죽은 뒤에 동인도회사는 벵골, 하이데라바드, 그리고 구자라트에서 엄청난 뇌물을 써서 무관세 무역 권을 확보했다. 1720년 이래 , 그것은 나바크리슈나 데브와 같은  인도 지방 권세가들의 협력을 통하여 직물로부터 막대한 이윤을 뽑아냄으로써 런던주식시장에서 단연 최고의 블루칩 상업 주식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수많은 토착민들의 생계를 박탈함으로써   1750년대에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던 벵골의 세입원과 지역경제의 토대를 무너뜨렸다. 규제 압력과 다른 유럽 무역 회사들로부터의 경쟁이 동인도회사의 상업적 위치를 위협하였다.


벵골에서 추방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동인도회사의 전사 귀족인 로버트 클라이브는 술수와 음모로 점철된 양면 공격을 감행하여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그 승리로 동인도회사는 벵골의 공공 세입과 내부 시장을 장악하게 되었다


1764년에 부카르( Buxar) 전투에서 또 승전한 후에, 비하르와 오리사는 “순경 회사”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일방적 무역에 의해 점차 빈궁하게 되었다. 인도 직공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팔 수 없고 오직 동인도회사에게만 그들이 제시하는 가격으로 팔아야했음으로  강제로 경제적 독립에서 노예상태로 끌려갔다. 군대는 생산자로부터 원료를 짜내는 데에 사용되었다. 동인도회사의 억압 방법으로는 벌금, 투옥, 태형과 강제 노역들이 있었다.


회사 경영진들에 의한 부당이득 취하기와 내부자 거래는 , 부패에 대한 금지가 보란 듯이 무시됨에 따라, 정점에 달했다. 빈랑나무 열매, 소금 그리고 담배를 독점하려는 불법적인 신디케이트들과 획득물의 금융적 가치에 대한  줄기찬 과대평가는 동인도회사의 일상적인 야바위 짓이었다. 클라이브는 전 인도인들의 부를 가차 없이 약탈하는데 앞장서고 부의 흐름을 서양으로 다시 돌렸다.


동인도회사는 동인도를 자연 재해에 취약하게 만들어서 12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1770년의 기근을 촉발시켰다. 그 재앙 시기에 입증된 방법인 세금 경감을 실시하기는커녕 , 동인도회사는 세금을 올리고 강제로 곡식을 사들여 창고에 쌓아놓았다. 그 기근 동안의 동인도회사의 노골적인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는 “역사상 최악의 기업 경영 중의 하나”였다. 인도인들의 생명에 대한 냉혹함은 그 회사의 폭정의 자연스런 결과였다.


1770년대 중반에 동인도회사 주식이 런던에서 폭락했을 때에 또 다른 수백만 명의 인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거품이 꺼지자, 영국 정부는 동인도회사의 자유를 삭감하기 위해 인도 총독이라는 새 자리를 만들었다. 벵골에서의 클라이브의 후계자인 Harry Verelst의 인권 남용 죄가 1777년에 적발되었을 때,  국외 기업 배임 원칙이 마련되었다. 1774년부터, 영 의회에 의해 지명된 3명의 감찰관은 벵골의 동인도회사 총독이었던  Warren Hastings를 부패혐의로 잡아넣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부 규제의 반격은 단명했다. Hastings는 전쟁을 일으켜서 용병을 써서 농민 반란을 박살내었다. 과도한 세금을 납부할 수 없는 토착민들은 살육 당했거나 “우리에 갇혔다”

인도 생산자들의 전통적 권리는 너무나 침해당하여 벵골의 생산력은 떨어졌다. 미친 듯한 군사원정과 전쟁들은 출혈하는 인도 경제에서 마지막 남은 힘마저도 다 앗아가 버렸다.


동인도회사에 의한 인도의 강탈과 약탈은 영국에서는 인기가 높았다. 버크에 의한 Hastings 탄핵은 7년 동안 계속되었지만, 불공정한 영국 사법 시스템은 버크가 승소할 수 없게 하였다. 인도는 정의의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하는 원시적이고 열등한 나라라는 Hastings의 변론은 영국의 평화의 지지자들에 의해 옹호되었다. 제국주의적 자부심과 애국심이 동인도회사에 정의의 칼날을 되려는 노력을 방해하였다.


Hastings의 후계자인 Cornwallis 경은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지지해줄 정치적 신사 계급(zamindars)를 인도에 키우려고 영국식 지주제를 도입하였다. 2천만 명의 소 차지인들이 “재산의 지배”가 추진됨에 따라 그들의 권리를 빼앗겼다. 인도는 유럽도 기독교도 아니었음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의 재산으로 취급받았다.


19세기에 동인도회사의 군사작전은 확대일로였고, 그 군대는 10배로 커졌다. 1805년까지 총독이었던 Wellesley 경은 토지와 요새에 대한 끝없는 식욕을 가졌는데, 희귀한 인도 보물들을 약탈하여 영국의 박물관으로 배에 실어 날랐다. 말라바르에서는 세율이 인상되고 플랜테이션 부지는 동인도회사 직원들에 의해서 강탈당했다.


아이들을 포함하는 노동자들이 납치되어 “입에 옷을 집어넣어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여” 노예로 일하게 하였다. 반란은 동인도회사의 철권 전술 아래서 짓밟혔는데 , 그 회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더 많은 마을들을 불태우고 더 많은 가축과 재산을 강탈할수록, 더 좋다.”


1830년대에 무역을 개방하고 영국 사업가들이 밀려오자, 동인도회사는 독점을 상실했다. 그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 중국으로의 차 수출은 배가되고 밀수되는 아편에 의해 지불되었다.

 

중국을 중독 시키기 위해  안도에서의 아편생산에 대한  독점을 유지할 필요성은 동인도회사로 하여금 마라타스와 신드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게 하였다. 동인도회사는 아시아 식민주의에 새 장을 연 1842년의 중국에 대한 아편전쟁에 영국군에게 군대를 파병했다. 영국에서는 아편무역의 제국에게 가져다주는 편익 때문에 아편전쟁이 정당화되었다.


인도에서의 황혼기에, 동인도회사는 가상적인 서구 문명의 우월성에 기초하는 권력의 오만함에 의해 지도되었다. 동인도회사 직원들에 의한 인종주의적 경멸과 욕설은 “깜둥이”("nigger“)라는 말은 1840년대와 1850년대에 인도인들에 대한 통상적인 호칭이 될 정도가 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30년간 동인도회사의 충실한 경영자였는데 , 인도에 대한 독재를 ”야만인들을 다루는 데 있어 교육적 힘과 정부의 정당한 방식“으로 묘사했다.


동인도회사의 인도 지배를 종식시킨 1857년의 반란의 뿌리에는 그러한 인종적이고 행정적인 오만방자함이 있었다. 영국군대는 무자비하게 그 반란을 진압했다. 1858년부터 영국왕실의 직접 통치가 인도에서 시행됐지만, 인도인들은 2차 세계대전까지 이자나 이전된 빚의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는 회사에 대한 주식배당금을 물어야 했다.


동인도회사는 그 전성기에 전혀 구속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지금은 “부호 영국인들”과 인도 문화에 대한 그들의 기호를 기념하는 박람회와 이벤트들을 통해서 동정적 분위기를 얻고 있다. 토니 블레어의 영국은 미니-미국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과 더불어

지나간 제국 지배에 대한 향수가 동인도회사의 악행에 대한 정직한 평가를 가리고 있다.


1700년대에는 인도와 중국은 세계 GDP의 47%를 차지했고 유럽의 비율은 26%에 불과했다. 1870년대가 되자 , 인도와 중국의 비율은 세계  GDP의 29%로 낙하하고 서유럽은 42%로 점프했다. 동인도회사는 이 역전에서 주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