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미국 관세 역사의 경험 - 리어왕

지식창고지기 2010. 1. 25. 12:55

경제학자들은 빈번하게 역사적으로 자유무역이 미국의 경제적 성공의 필수적인 요소였다고 주장한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 주장이 너무 당연한 것이라서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무역은 결국 자유경쟁의 자연스런 확장이 아닌가.

 

자유경쟁은 미국경제의 기초가 아닌가. 미국의 전 역사에 걸쳐 관세를 낮게 유지했음에 틀림없다는-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자동적인 가정이 있다. 자유무역의 혜택에 대하여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을 것이다; 미국역사의 대부분에 걸쳐 자유방임이 경제정책의 기초였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보다 더 비진실인 것은 없다. 국제교역은 자유롭든 규제되든 간에 미국을 건설하고 부유하게 변모시키는 데 거의 기여한 바가 없다. 막대한 경제적 잠재력을 이끌어낸 젊은 이민 사회의 역동성을 통하여 미국은 거의 전적으로 국내적으로 자신의 성공을 만들었다.

 

지난 2세기에 걸친 미국 무역정책의 진화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냉철하게 역사를 비추어 보면, 자유무역론자들에 의해서 묘사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미국의 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무역전문가들이 거의 역사를 연구하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 자유무역의 열렬한 옹호자는 안 될 것이다. 주류 경제학자들에게는, 미국역사는 특별한 문제다. 1세기 이상에 걸친 과도한 관세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미국이 경제적 거인이 되었는가를 설명해야 될 테니까.


농경 공화국:1783-1808


1783 파리 조약에 의해서 혁명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처음으로 주권국가로 등장했다. 영국의 식민지로서 ,미국은 영국 산업에 원료를 제공하고 영국의 수출시장의 역할을 했다. 참으로 영국은 미국에 새로운 산업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영국의 이익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결과 신생공화국은 노동인구의 90%이상이 농경, 사냥, 조림산업에 종사하는 등 농업적 성격이 강했다. 작은 활기찬 제조업이 북부 식민지에서 뻗어 나온 것은 사실이고, 린넨, 신발, 가구 등의 기본적인 재화가 지방의 기술자들에 의해서 공급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산업적 필요에 대해서 미국은 유럽 -대부분 영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했다 그리고 농업생산물을 수출함으로써 그 대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독립 후 바로 미국은 국제교역과 외교의 와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793년에 영국이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오래지 않아 두 상업 강대국 스페인과 홀란드가 그 분쟁에 끼어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나라들의 모든 교역선들이 바다에서 물러갔다. 이렇게 해서 커다란 공백이 세계무역 네트워크에 생기게 되고, 미국선박들이 진공을 점하고 무역을 떠맡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왔다.

 

외국교역의 새로운 기회는 미국 선박들에게 많은 이문을 갖다 주었지만,미국경제의 농업적 성격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 전쟁국가들은 밀, 솜 등의 농업생산물 공급을 미국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게 되고 따라서 미국은 이윤이 많이 남게 되었다. 동시에 영국은 전에는 주로 유럽이  타겟이었던 그자신의 제조업 생산물의 판매를 점점 더 미국시장으로 돌리게 되었다 이 모든 추세들은 미국경제의 농업적 성향을 더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이때쯤 연방정부는 유리나 철 등의 생산물에 대한 수입관세를 물림으로써 국내 생산자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나, 국내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확한 국민감정은 없었다. 관세는 주로 연방 세원조달의 도구였고 국내 제조업-섬유, 기계 제작, 가구,  유리, 철, 신발-은 경제에서 미미한 존재로 남아 있었다. 사실상 1799년에 국가수입의 5%이하가 이 부문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산업의 기초:1808-1815


독립 후 초기의 외국교역은 미국경제의 원시적 골격을 강화할 뿐이었다. 사실상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행위로 외국교역이 갑작스레 중단 된 후에야 이 틀을 벗어 날 수 있었다. 그것은 사실상 미국이 산업화하고 부유한 나라가 되도록 한 우연적 발전이었다. 독립 후 발생한 미국의 증대하는 무역에서의 역할을 영국과 프랑스는 달가와 하지 않았다. 그 들은 여러 법령을 통과시켜서 미국선박들을 나포해 갔다.

 

미국선박을  나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하원은 1807년에 금수법을 통과시켰는데, 그 것은 수출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무역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1809년에 완화되기는 해도 1812년에 영국과의 새로운 전쟁으로 미국은 다시 경제적 고립상태가 되었다.1815년 적대관계가 끝날 때까지, 미국은 다른 경제들과는 격리된 고독한 섬으로 남게 되었다.

 

상업적 고립은 미국의 경제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물품에 대한 접근이 금지된 미국의 소비자들은 그들의 수요를 국내 제품으로 옮겼다. 공급이 수요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서 이윤이 막대했다 .예를 들어 섬유 산업에서만 1807-1809년 사이에 이윤이 40%나 치 솟았다.

 

고율의 이윤으로 엄청난 양의 자본이 제조업으로 몰렸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시기에 대한 모든 수치들은 산업의 경이적인 발전을 드러내 준다. 면섬유산업에서만도 직물기가 1809년에 31,000에서 1815년에.500,000으로 증가했다. 양모 산업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데, 생산량이 4백만에서 1815년에는 거의 2천만으로 뛰었다.

 

사실상 모든 새로운 산업들은 뉴욕, 뉴저지, 메사츄세츠,  코내티커트의 4개의 뉴잉글랜드 주들,버몬트, 햄프셔에서 나타났다.1807년에는 이 주들에는 단지 4개의 공장만 있었으나,1815년에는 128개로 증가했다. 남부 주들은 이런 대열에 참여하지 못 했는데 그 이유는 지주들이 , 주로 흑인들로 이루어진 그들의 노동력이 공장 설비를 돌리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국산업의 발달:1815-1900


제조업의 융기는 1812년의 전쟁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로비를 창조했다. 처음으로, 무역에 의해서 다칠 수 있는 경제적 이익단체-북부의 제조업자들과 그들의 노동자들-가 생겼다. 그들에 대항해서 국제교역의 전통적인 수혜자들이 있었다. 지금은 주로 남부에 집중되어 있는 농부들은 그들의 농산물에 대한 세계시장이 필요했고, 다른 나라들의 제조품을 싼 가격으로 살려고 했다. 관세는 외국산 제품을 비싸게 만들 뿐이었다.

 

더욱이, 뉴잉글랜드의 선주들을 포함한 선박단체는 무역의 제한에서 발생될 수익의 감소를 두려워했다. 무역정책의 통제를 둘러싼 이들 분파들 간의 전투는 1815년 초기에 시작되었고, 세기말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갈등은 두 개의 국면을 통과했다.

 

첫째의 국면은 1615년에서 남북전쟁 발발 년인 1861까지 지속되었는데, 정치적인 유불리가 번갈아 나타났는데, 관세가 올랐다가 내렸다가 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두 번째 국면은 1861년에서 1900년까지 지속되었는데, 관세론자들의 결정적 승리로 끝났다.

 

이시기의 미국의 경제적 경험은 주류 경제학자들에 의해 자주 거론되는 자유무역과 번영과의 연관이 거짓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첫 번째 국면은, 이 기간동안의 경제적 팽창이 관세정책의 변화와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 줌으로써 ,이 신조에 강펀치를 날린다. 두 번째 국면은 미국이 가장 관세율이 높고, 외국과의 교역이 가장 적었던 시기가 또한 미국이 가장 큰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던 시기임을 보임으로써 K.O. 펀치를 날린다.


첫째 국면:1815-1861

 

미래의 대 관세 토론의 대강이 영국과의 평화가 선언되고 외국과의 교역이 재개된 직후에 명백해졌다. 미국의 농부들은 유럽시장에 다시 접근 할 수 있게 되어서 재빠르게 이윤을 남길 수 있었지만,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미국제조업에게는 다른 이야기였다 .영국 생산자들은 그들의 시장을 되찾으려는 욕심으로 미국인들에게 덤핑이라는 방법으로 일찍이 가혹한 교훈을 남겼다.

 

1815년에만도, 외국섬유업자들이 7천백만 야드의 직물을 미국에 덤핑했는데. 이는 미국 산업의 총생산량의 75%를 넘는 것이었다. 가격은 폭락하고, 오래지 않아 금수조치의 우산아래서 번성하던 많은 약한 방앗간들이 축출되었다.

 

 외국과의  경쟁이 가열되자 국내생산업자들이 보호를 요청했고, 처음에는 그들은 거의 공중으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공중은   미국이 다시 농산물을 영국의 공산품과 바꾸는 전전의 경제적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기뻐했다. 미국산업이  상당수의 후원자를 끌어 모으는 데 4년이 걸렸다.

 

1819년에 유럽시장이 갑작스레 붕괴했다. 이는 미국 농업에게서 이윤을 낼 수 있는 배출구를 앗아간 것이 되었다. 북부의 농부들은 재빨리 국내시장보호 요구에 동참하고, 상처받은 국내제조업자들과 함께 고율의 관세에 대한 단단한 전선을 형성했다.

 

다른 한편, 남부의 농부들은 ,비록 북부농부들만큼 타격을 받았으나, 그들의 장기적 이익이 여전히 국제시장을 여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뉴잉글랜드의 선박업자들과 함께 반대동맹을 형성했다.

 

처음에는 관세반대파가 득세했지만,1828년에는 보호  무역론자들이 유리, 철,  섬유 ,기계류 등의 제조품만이 아니고, 양모, 담배. 마 등의 원료 등의 관세를 올리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평균관세율이 전무후무한 62%까지 치솟았다.

 

곧 1828년의 관세법이 도가 지나쳤다는 것이 명백해졌다.“혐오의 관세”라고 불리면서, 그 법은 북부에서도 인기가 없다는 것이 판명 나고, 1833년에 하원은 타협관세법을 통과시켰다. 그 법에 의하면 관세는 1842년까지 높게 유지되다가, 동일한 20%로 대체될 것이었다. 그러나 1846년에 워커 관세법이 평균관세율을 30%까지 올렸다.

 

자유무역론자들에게는, 남북전쟁 전후의 미국의 경제적 경험은 커다란 실망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분석으로는, 외국과의 경쟁을 질식시킴으로써, 높은 관세는 기술혁신을 막고, 인플레를 조장하고, 성장과 생산성을 저해한다. 미국의 역사는, 그렇지만, 이 견해를 웃음꺼리로 만든다. 장기간의 높은 보호관세에도 불구하고 산업생산량은 1810년과 1860년 사이에 무려 10배가량 늘었다. 소비자 가격은 1816년과 1860년 사이에 체계적으로 내려갔고, 이 시기는 기술혁신이 유럽의 그것과 맞먹든지 그 이상이었다.

 

이시기의 산업 발달은 면섬유에 대한 기록으로 능히 알 수 있다. 직물기는 1820년에 191,000에서 1840년에 2,112,000개로 ,1860년에는 5,236.000개로 증가했고, 생산성은 치솟았다.

 

직물기당 생산량은 1820년에 140에서 1834년에 185,1849년에 217,1859년에 219로 올랐다.

참으로 1860년에는 직물기 생산성이 많이 올라서 실질 임금이 유럽의 실질 임금의 두 배가 되었다.

 

인상적인 산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남북전쟁 직전에도 여전히 농업이 미국의 주요한 직업이었다. 농경이 국가 수입의 가장 큰 몫을 차지했고(31%),노동 활동 인구의 53%를 차지했다.  1820년 이후에 꾸준히 감소했음에도 이와 같다.산업의 성장은 농업을 해치기보다 도왔다고 할 수 있다.

 

농경 면적의 엄청난 확장은 농기구의 개선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837년에 John Deree에 의한 스틸 젱기의 발명,1834년의 Cyrus McCormick의 면화 자동 수확기의 발명 등.

이러한 혁신들로 농업 생산성의 비약적 증가가 가능했다.


두 번째 국면:1861-1900


19세기의 경제성장의 두 번째 국면은 첫 번째가 끝난 자리에서 시작됐다. 같은 추세가, 장관 같은 속도로 계속되었다. 그래서 평균관세가 첫 번째 국면에서 높았지만, 두 번째 국면에서는 더 높았다.혁신, 제조업, 농업이 전에는 튼튼한 진보를 내 딛었지만,지금은 훨씬 더 나았다.

 

얼마나 나아졌나를 보면,19세기 말에는 미국이 세계의 단연 돋보이는 경제 강국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번째 국면은 1865년에 시작되었다고 해야 된다.

 

1862년도 초기에 연방정부는 남북전쟁의 진정한 차원과 승리하기 위해서 치루어야 할 막대한 희생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목적을 위해, 연방입법부는  포괄적인 내부세입법(internal revenue act)을 통과시켰는데, 광범위한 상품들에 대해서 소비세(excise duty)를 매기고 처음으로 종합소득세(general income tax)를 도입했다.

 

입법의원들은 새로운 세금들이 미국시장에 있어서 외국 생산자들에게 부당한 이점을 준다고 느꼈다. 이런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1862년에 관세법을 통과시켰는데, 수입품의 가격 우위를 제거하려고 관세를 15% 올렸다.

 

또 다른 세금과 관세 높이기가 1864년에 있었다. 그리고 내부 세금들이 1865년 이후 점차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제조업자들의 강력한 로비로 정부는 고율의 관세는 그대로 유지했다.

 

새로운 보호무역 조치는 국제무역의 규모에 대해 예상대로의 결과를 가져왔다.1869년과 1899년 사이에, 수입 증가율은 경제 성장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외국과의 경쟁은 대부분의 미국 제조업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에 내부 지향적인 경제 체제의 고전적 프로필이 있었다.

 

 -자유 무역 옹호론자들이 그들의 예측을 유보하는 그런 체제. 여기에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귀중한 자원을 다 낭비해 버리고, 외국과의 경쟁의 부재로 고가의 엉터리 제품이 만연하고, 생산자들이 혁신과 개선의 자극제가 없는 한마디로 점차로 별 볼 일 없게 되어 가는  사회가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 실제로 일어난 일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미국의 국가 총생산은 1929년의 고정 달러로 환산해서 물경 4배로 증가했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실질 소득은 50% 증가, 소매가는 37% 하락, 1인당 연간 소득은 1869년의 223$에서 1900년에는 거의 500$로 올랐다.

 

진보가 자유무역론자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바로 보호된 제조업 부문에서. 산업 생산은 1870년에서 1900년까지 4배나 증가했는데. 제조업은 19세기 말에는 총 생산의 53% 노동력의 23%를 차지하는 등 경제의 중추가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 중에 가장 놀라운 사실은 , 미국이 제조업의 주도로 단연코 세계제일의 경제 강국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유무역이 그런 것을 할 수 있었을까? <<자유무역론자들에게 맡겨졌다면, 미국은 여전히 현격한 농업국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났나? 그러한 성공을 위해서 요구되는 역동성의 요건들을 미국은 어디에서 찾았나? 차분하게 찾아보면 그 답은 찾기가 어렵지 않다.

 

외국과의 무역은 경제발전에 필수적인 두 가지 요소를 제공함으로써, 국가에 도움이 된다고 가정되고 있다.

 

첫째는 생산자들이 세계 소비자 풀에 접근 가능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경쟁압력이 국내산업으로 하여금 효율적이 되게끔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 두 가지 성장의 요건을 -커다란 소비시장과 활기찬 경쟁- 외국 무역의 부재 속에서도 만들어 낼 수 있었기에 성공했다. 무역의 제한이 경쟁을 해칠 경우는 국내 제조업자들의 수가 적을 때뿐이다. 미국 시장은 이 시나리오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1840년대와 1850년대의 공장 제도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사업들은(enterprises) 여전히 대부분이 1인소유나 파트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한 벤처들은 단지 몇몇의 소유자들의 투자 가능한 기금만 사용가능 했기 때문에 규모가 제한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산업은 아무도 상당한 시장장악력이 없고 모두가 그들을 그들의 경쟁자들과 구별되게 할 수 있는 가격이나 제품 품질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영세 생산자들로 특징지어 졌다.

 

회사들 간에 치열한 경쟁이 있었고, 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기술 개선과 혁신적인 제품 판매전략. 새로운 기술들-특히 개용광로 방법-이 제철 산업에 혁명을 가져왔다. 전기, 전신, 통신 혁명이 뒤따랐다. 새로운 기술들은 부분적으로는 영국에서 수입되었고, 부분적으로는 미국에서 발명되었다.

 

그러나 산업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보조는 주변적이었다.“직접적인 지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관세를 통한 정부의 미국제조업의 보호였다”라고 경제학자들인 Martin Primack와James Willis는 말한다. 이들과 다른 경제 역사학자들의 메시지는 대부분이 이론가들이고 ,그들 주위의 현실을 모르는 자유무역론자들의 메시지와는 배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