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사/잡다한 것

처용가(處容歌)-반윤히간지야 님의 답변

지식창고지기 2010. 2. 11. 11:38

처용가(處容歌)

 

* 작가:  처용  * 갈래: 8구체 향가. 구비 문학의 갈래-민요

* 성격: 주술적(원, 도솔, 혜성) 무가. 풍자-체념적인 弄詞. 제유

* 주제: 관용과 극기의 위품(威品), 역신을 쫓아냄(逐鬼, 逐邪=벽邪進慶)

* 의의: 벽사 진경의 민요적 무가, 의식무(儀式舞), 또는 연희(演戱)의 성격을 가지고 고려.조선 이대 계승,
        현전하는 신라 최후의 작품, 구려 속요에도 '처용가'가 있어 향가 해독의 계기(熱病神=疫神)

* 처용가: 민속학 관점에서 처용을 무속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

          정치사의 관점에서 처용을 지방 호족의 아들로 보는 견해

         신라 시대에도 서역지방과의 교역이 있었다고 보아 처용을 이스람 상인으로 보는 견해

*역신이 물러간 이유: 처용의 관용적인 태도 때문

* 제웅과 관계 깊음- '제웅'은 음력 정월에 동구 밖에 내 던져 악을 면한다는 볏집 인형. 발음이 '처용'과
                     비슷하고 역신을 쫓는 기능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처용과 관계가 있는 민속으로 봄

* 전승 : 향가 처용가 → 속요 처용가 → 고려, 조선의 처용희(연극), 처용무

 

<배경설화>

부른 이는 처용. 신라 헌강왕 5년(879)

제 49대 헌강대왕 대에는 서울에서 동해변까지 집들이 맞닿았으며 담장이 서로 이어졌고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
길가에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풍우가 사철 순조로왔다. 이에 대왕이 개운포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가에서
쉬었는데 홀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이상히 여겨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점성관이
"이것은 동해의 용이 변괴를 일으키는 것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 하였다.
유사에게 칙령을 내려 "용을 위하여 이 근처에 절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마자 안개가 흩어져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 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 명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대왕의 덕을 칭송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와 춤을 추었다. 아들 하나를 딸려서 서울로 보내어
왕의 정사를 돕도록 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처용이었다. 왕은 미모의 여자로 아내를 삼아 주고 그의 뜻을 사로잡기
위하여 급간의 벼슬을 주었다. 그의 아내는 너무나 아름다워 역신이 탐을 내고 사람으로 변신하여 밤에 몰래
그 집으로 들어가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원문                         해독                         현대역
 
東京明期月良               새발 발긔 다래                 서울 밝은 달 아래

夜入伊遊行如可            밤드리 노니다가              밤 늦도록 노닐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드러사 자리 보곤             들어 와 자리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가라리 네히어라              가랑이가 넷이어라                                  

二힐隱吾下於叱古         둘흔 내해엇고                 둘은 내 것인데                                

二힐隱誰支下焉古         둘흔 뉘해언고                 둘은 뉘 것인고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대 내해다마란              본디 내 것이었다마는                                         

奪叱乙何如爲理古         아사날 엇디하릿고           빼앗아 간 것을 어찌하리오                                             
 


이 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처용 앞에 꿇어 엎드려 말하기를 "내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노하지 않으니 그 미덕에 감복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공의 얼굴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맹세하겠습니다." 하였다. 이 말에 따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경사스런 일을 맞는다 하였다. 왕이 궁중에 돌아와 영취산 동쪽에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짓고 망해사 혹은 신방사라 했다.
이는 용을 위해서 지은 것이다. 또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으나 옆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왕만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므로 왕이 직접 신이 추는 춤을 추어서 그 원형을 보여 주었다.
신의 이름을 혹은 상심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그 춤을 전해 오면서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 한다.
혹은 이미 산신이 나와 춤을 추므로 그 모습을 본따서 공장이를 시켜 조각하게 하여 후세에 전했기 때문에 이름을
상심무 또는 상염무라 한다 하는데 이것은 그 모양을 이른 말이다. 또 금강령에 행차했을 때 북악의 신이 춤을
바쳤으니 옥도근이라 한다. 또 동례전에서 잔치할 때에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으니 이름은 지백급간이었다.
어법집에 이르되 그때 산신이 나와 춤을 올리며 노래를 부르되 '지리다도파도파'라 한 것은 대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릴 자들이 미리 알고 많이 도망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하리라는 말이었다. 이에 지신과 산신이 나라가 망할
춤을 추어 깨우쳐 준 것인데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상서로움이 나타났다고 더욱 탐락에 빠져 나라가 끝내
망한 것이라 한다. 

 

처용가(處容歌)

 

* 작가:  처용  * 갈래: 8구체 향가. 구비 문학의 갈래-민요

* 성격: 주술적(원, 도솔, 혜성) 무가. 풍자-체념적인 弄詞. 제유

* 주제: 관용과 극기의 위품(威品), 역신을 쫓아냄(逐鬼, 逐邪=벽邪進慶)

* 의의: 벽사 진경의 민요적 무가, 의식무(儀式舞), 또는 연희(演戱)의 성격을 가지고 고려.조선 이대 계승,
        현전하는 신라 최후의 작품, 구려 속요에도 '처용가'가 있어 향가 해독의 계기(熱病神=疫神)

* 처용가: 민속학 관점에서 처용을 무속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

          정치사의 관점에서 처용을 지방 호족의 아들로 보는 견해

         신라 시대에도 서역지방과의 교역이 있었다고 보아 처용을 이스람 상인으로 보는 견해

*역신이 물러간 이유: 처용의 관용적인 태도 때문

* 제웅과 관계 깊음- '제웅'은 음력 정월에 동구 밖에 내 던져 악을 면한다는 볏집 인형. 발음이 '처용'과
                     비슷하고 역신을 쫓는 기능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처용과 관계가 있는 민속으로 봄

* 전승 : 향가 처용가 → 속요 처용가 → 고려, 조선의 처용희(연극), 처용무

 

<배경설화>

부른 이는 처용. 신라 헌강왕 5년(879)

제 49대 헌강대왕 대에는 서울에서 동해변까지 집들이 맞닿았으며 담장이 서로 이어졌고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
길가에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풍우가 사철 순조로왔다. 이에 대왕이 개운포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가에서
쉬었는데 홀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이상히 여겨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점성관이
"이것은 동해의 용이 변괴를 일으키는 것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 하였다.
유사에게 칙령을 내려 "용을 위하여 이 근처에 절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마자 안개가 흩어져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 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 명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대왕의 덕을 칭송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와 춤을 추었다. 아들 하나를 딸려서 서울로 보내어
왕의 정사를 돕도록 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처용이었다. 왕은 미모의 여자로 아내를 삼아 주고 그의 뜻을 사로잡기
위하여 급간의 벼슬을 주었다. 그의 아내는 너무나 아름다워 역신이 탐을 내고 사람으로 변신하여 밤에 몰래
그 집으로 들어가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원문                         해독                         현대역
 
東京明期月良               새발 발긔 다래                 서울 밝은 달 아래

夜入伊遊行如可            밤드리 노니다가              밤 늦도록 노닐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드러사 자리 보곤             들어 와 자리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가라리 네히어라              가랑이가 넷이어라                                  

二힐隱吾下於叱古         둘흔 내해엇고                 둘은 내 것인데                                

二힐隱誰支下焉古         둘흔 뉘해언고                 둘은 뉘 것인고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대 내해다마란              본디 내 것이었다마는                                         

奪叱乙何如爲理古         아사날 엇디하릿고           빼앗아 간 것을 어찌하리오                                             
 


이 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처용 앞에 꿇어 엎드려 말하기를 "내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노하지 않으니 그 미덕에 감복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공의 얼굴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맹세하겠습니다." 하였다. 이 말에 따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경사스런 일을 맞는다 하였다. 왕이 궁중에 돌아와 영취산 동쪽에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짓고 망해사 혹은 신방사라 했다.
이는 용을 위해서 지은 것이다. 또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으나 옆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왕만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므로 왕이 직접 신이 추는 춤을 추어서 그 원형을 보여 주었다.
신의 이름을 혹은 상심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그 춤을 전해 오면서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 한다.
혹은 이미 산신이 나와 춤을 추므로 그 모습을 본따서 공장이를 시켜 조각하게 하여 후세에 전했기 때문에 이름을
상심무 또는 상염무라 한다 하는데 이것은 그 모양을 이른 말이다. 또 금강령에 행차했을 때 북악의 신이 춤을
바쳤으니 옥도근이라 한다. 또 동례전에서 잔치할 때에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으니 이름은 지백급간이었다.
어법집에 이르되 그때 산신이 나와 춤을 올리며 노래를 부르되 '지리다도파도파'라 한 것은 대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릴 자들이 미리 알고 많이 도망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하리라는 말이었다. 이에 지신과 산신이 나라가 망할
춤을 추어 깨우쳐 준 것인데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상서로움이 나타났다고 더욱 탐락에 빠져 나라가 끝내
망한 것이라 한다. 

 

 

처용가(處容歌)

 

* 작가:  처용  * 갈래: 8구체 향가. 구비 문학의 갈래-민요

* 성격: 주술적(원, 도솔, 혜성) 무가. 풍자-체념적인 弄詞. 제유

* 주제: 관용과 극기의 위품(威品), 역신을 쫓아냄(逐鬼, 逐邪=벽邪進慶)

* 의의: 벽사 진경의 민요적 무가, 의식무(儀式舞), 또는 연희(演戱)의 성격을 가지고 고려.조선 이대 계승,
        현전하는 신라 최후의 작품, 구려 속요에도 '처용가'가 있어 향가 해독의 계기(熱病神=疫神)

* 처용가: 민속학 관점에서 처용을 무속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

          정치사의 관점에서 처용을 지방 호족의 아들로 보는 견해

         신라 시대에도 서역지방과의 교역이 있었다고 보아 처용을 이스람 상인으로 보는 견해

*역신이 물러간 이유: 처용의 관용적인 태도 때문

* 제웅과 관계 깊음- '제웅'은 음력 정월에 동구 밖에 내 던져 악을 면한다는 볏집 인형. 발음이 '처용'과
                     비슷하고 역신을 쫓는 기능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처용과 관계가 있는 민속으로 봄

* 전승 : 향가 처용가 → 속요 처용가 → 고려, 조선의 처용희(연극), 처용무

 

<배경설화>

부른 이는 처용. 신라 헌강왕 5년(879)

제 49대 헌강대왕 대에는 서울에서 동해변까지 집들이 맞닿았으며 담장이 서로 이어졌고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
길가에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풍우가 사철 순조로왔다. 이에 대왕이 개운포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가에서
쉬었는데 홀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이상히 여겨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점성관이
"이것은 동해의 용이 변괴를 일으키는 것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 하였다.
유사에게 칙령을 내려 "용을 위하여 이 근처에 절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마자 안개가 흩어져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 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 명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대왕의 덕을 칭송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와 춤을 추었다. 아들 하나를 딸려서 서울로 보내어
왕의 정사를 돕도록 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처용이었다. 왕은 미모의 여자로 아내를 삼아 주고 그의 뜻을 사로잡기
위하여 급간의 벼슬을 주었다. 그의 아내는 너무나 아름다워 역신이 탐을 내고 사람으로 변신하여 밤에 몰래
그 집으로 들어가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원문                         해독                         현대역
 
東京明期月良               새발 발긔 다래                 서울 밝은 달 아래

夜入伊遊行如可            밤드리 노니다가              밤 늦도록 노닐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드러사 자리 보곤             들어 와 자리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가라리 네히어라              가랑이가 넷이어라                                  

二힐隱吾下於叱古         둘흔 내해엇고                 둘은 내 것인데                                

二힐隱誰支下焉古         둘흔 뉘해언고                 둘은 뉘 것인고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대 내해다마란              본디 내 것이었다마는                                         

奪叱乙何如爲理古         아사날 엇디하릿고           빼앗아 간 것을 어찌하리오                                             
 


이 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처용 앞에 꿇어 엎드려 말하기를 "내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노하지 않으니 그 미덕에 감복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공의 얼굴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맹세하겠습니다." 하였다. 이 말에 따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경사스런 일을 맞는다 하였다. 왕이 궁중에 돌아와 영취산 동쪽에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짓고 망해사 혹은 신방사라 했다.
이는 용을 위해서 지은 것이다. 또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으나 옆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왕만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므로 왕이 직접 신이 추는 춤을 추어서 그 원형을 보여 주었다.
신의 이름을 혹은 상심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그 춤을 전해 오면서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 한다.
혹은 이미 산신이 나와 춤을 추므로 그 모습을 본따서 공장이를 시켜 조각하게 하여 후세에 전했기 때문에 이름을
상심무 또는 상염무라 한다 하는데 이것은 그 모양을 이른 말이다. 또 금강령에 행차했을 때 북악의 신이 춤을
바쳤으니 옥도근이라 한다. 또 동례전에서 잔치할 때에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으니 이름은 지백급간이었다.
어법집에 이르되 그때 산신이 나와 춤을 올리며 노래를 부르되 '지리다도파도파'라 한 것은 대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릴 자들이 미리 알고 많이 도망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하리라는 말이었다. 이에 지신과 산신이 나라가 망할
춤을 추어 깨우쳐 준 것인데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상서로움이 나타났다고 더욱 탐락에 빠져 나라가 끝내
망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