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사/삶의 향기

마지막 펠라치오의 추억.

지식창고지기 2009. 5. 29. 13:58

<Brown Bunny> / 미국, 일본 / 2003

'버드'라는 남자가 있다. 오토바이를 타는 남잔데, 길쭉하고 외계인같은 푸른 눈을 가졌다. 그는 가는 곳마다 금발의 여자를 만나서 키스를 하지만, 보통 남자와는 다르게 손이 가슴께로 가지 않는다. 이 새끼 뭐하자는 걸까. 그는 계속 말없이 운전을 하며 미대륙을 횡단하듯 도로를 지나가고, 소금만 남은 대지에서 오토바이를 꺼내 타기도 한다. 길거리에 서 있는 창녀에게 '같이 밥이나 먹자.'며 수작을 거는 대목에서 드디어 짜증 폭발. 그 장면부터 이 영화가 왜 빈센트 갈로로 하여금,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영화 안 찍겠습니다."라는 소리를 하게 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 아무튼 여정의 중간중간 힌트로 등장했던 엑스-걸프렌드(인 것처럼 보이는) 데이지의 집에 당도한다. 마침 그녀가 없어서 현관문에 쪽지를 써놓은 후, 집 근처 모텔에 방을 잡고 적적하게 기다리면,

데이지가 등장한다.

빈센트 갈로가 능력있는 남자라는 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여자와 키스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남자는 노래도 만든다. 모델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바스키야랑도 친했다고 한다.(나 누구 알아...) 게다가 영화도 만든다. 첫 영화는 꽤 근사했다. <버팔로 66>은 외로움을 다룬 영화 중에서도 가장 따뜻하며 또한 가장 솔직한 영화로 기억하고 있다. 아무튼,

그런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사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물론 장비가 점점 좋아지면서 영상이라는 게 "그림을 그릴까, 사진을 찍을까" 하며 선택할 수 있는 개인의 표현수단으로 변하고 있지만, 이런 풀렝쓰 영화의 프로덕션에 전문적인 스태프가 동행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보라. 그는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하고, 연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개인의 예술적 열정이라는 것을 통해 기존의 프로덕션체계를 무너뜨린 셈. 독립영화라는 모호한 개념 위에 세워놓고 봐도 그렇게 보이고, 실제로 이 괴팍한 이태리계 뉴요커는 자신의 영화 동료들을 종종 비난한다.

그래서 그런건가. 이 영화는 굉장히 사변적인 느낌이다. 일기장을 훔쳐보는 느낌인데, 정확히 말하면 조회를 목적으로 하는 미니홈피의 일기장처럼? 물론 대사도 별로 없고, 그나마 있는 대사는 작게 웅얼거린다. 잘 들리지 않는다. 소통을 포기한 연기랄까? 영화는 전반적으로 탈색된 톤을 유지한다. 그렇지만 그것도 그럴 듯한 후반작업을 거쳐서 만든 효과가 아니라, 일부러 광원을 직접 렌즈에 담아서 생기는 할레이션과 플레어를 이용하거나, 심도깊은 망원렌즈로 불안한 포거스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만든다. 빛은 산란에 산란을 거듭하여 마치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처럼 오브젝트의 형상을 흐린다. (난 이 영화에서 사막의 신기루가 뭔지 처음 알게되었다.) 마치 아메리칸 어패럴 로드샵 안의 주근깨 소년소녀의 느낌을 나게 하는 그러한 화면의 톤 안에서 수수하나 은밀하고, 아마츄어스러우나 사랑스러운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또한 인물은 거의 - 물론 잡아낼 인물도 몇 없지만 - 극단적인 클로즈-업 안에 갖힌다. 그리고 좁은 그 속에서 행동한다. 그러니까 울거나 껴안거나 운전을 하거나 키스를 하거나,

펠라치오를 한다.



...연애라는게 원래 일종의 환각같아서 사실은 상처 말고는 남기는 것이 없으며, 심지어는 그 상처 조차 혓바늘 건드리듯 자학하는 재미의 중독성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지금 당장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야 하는 법. 그걸 알려주려고 해서는 안된다. 비록 당사자가 원하는 사랑의 대상이 이미 안드로메다로 사라진, 그런 환상 속의 연애를 하고 있다 해도 말이다. 적어도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가 지켰어야 하는 예의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닐까? 강간과 죽음이라는 강렬한 반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난 뒤에 주인공을 이해하거나 동정할 수 없는 걸 보면... 내가 참 잔인해진건지...






ps
그럼에도 이 영화를 미워할 수 없는 건 물론 훌륭한 사운드트랙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