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역사시대-동한의 창시자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지식창고지기 2010. 2. 19. 13:33

동한 광무제는 이름이 유수(劉秀: BC 6 ~ AD 57), 자가 문숙(文叔)이며, 한(漢) 고조 유방의 9세손이다. 왕망(王莽)과 유현(劉玄)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황제라 칭하였다. 33년간 재위하다가 63세에 병사하였다. 장지는 원릉(原陵: 지금의 하남성 맹진현<孟津縣> 서쪽)에 있다.

유수는 남양(南陽) 채양(蔡陽) 출신이다. 왕망의 신(新)나라 말기에 농민대봉기가 폭발하자 그는 이 기회를 틈타 형 유인(劉縯)과 함께 거병하여 녹림군(綠林軍)에 가담하였다. 서기 23년 녹림군이 곤양(昆陽)을 점령한 후, 왕망은 43만 대군(100만 대군이라 불렀음)을 파견하여 8~9천의 녹림군이 점령하고 있던 곤양을 포위 공격하였다.

깜짝 놀란 유수는 경황 중에 원병이 올 때까지 사수할 것을 건의하고, 자진해서 12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밤을 틈타 남쪽 성문으로 돌진하여, 포위망을 뚫고 나가 원군을 소집하였다. 그는 또 직접 3천명의 정예 병사를 거느리고 돌아와 적진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진의 허리로 돌진하여 진영을 무너뜨리고 적장 왕심(王尋)을 죽였다. 이 때를 틈타 성안에 있던 녹림군이 성문을 열고 뛰쳐 나와 안팎에서 협공을 가하여 왕망의 주력 부대를 일거에 소탕하였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군을 물리친 이 전투가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곤양대첩(昆陽大捷)'으로, 그것은 왕망 정권을 분쇄하는 결정적인 일전이 되었다. 이로 인해 유수는 자신의 명성을 천하에 크게 떨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은 유인과 유수가 황제의 자리를 놓고 그와 쟁탈할 것이 염려되어 부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인을 죽일 구실을 찾았다. 이 소식을 들은 유수는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여 유현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즉시 완성(宛城: 하남성 남양현<南陽縣>)으로 달려가 유현에게 죄를 청하고, 형 유인이 죽어 마땅할 죄를 지었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형이 죽었어도 그는 형 유인을 위해 상복을 입지도 않고 평소와 같이 늘 밥 먹고 술 마시며 유유자적하게 담소를 즐기면서 전혀 상심해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곤양대전의 상황을 물으면, 그는 그것이 모두 장수와 병사들이 힘써 싸운 결과이지 자신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는 이불 속에 누워서 형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무자비한 유현을 원망하였다. 이러한 유수를 제거할 구실을 찾지 못한 유현은 하는 수 없이 그를 중용하지는 않고 파로대장군(破虜大將軍)에 임명하였다.

왕망 정권이 붕괴된 후에 유현은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다고 판단하고, 유수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에게 소수의 병마를 내주어 하북 지역의 군현(郡縣)을 수습하게 했다. 유수는 하북 지역에 도달한 후에 왕망의 가혹한 정치를 없애고 죄인을 석방하면서 한나라의 제도를 부활하겠다고 호소함으로써 현지의 관료와 지주들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그는 유현과 결별하고 100만여 농민 봉기군을 편성하여 그 역량이 신속히 커져갔다. 서기 25년 6월 기미일(己未日)에 유수는 호(高+우부방: 지금의 하북성 백향현<柏鄕縣> 북쪽)에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였다. 그리고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고 연호를 '건무(建武)'라 하였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동한(東漢) 또는 후한(後漢)이라 한다.

유수는 황제라 칭한 후에 적미군(赤眉軍)을 진압하고 각지에 할거하던 세력을 평정하여 서기 36년에 전국을 통일하였다. 재위 시기에 그는 아홉 차례나 명령을 공포하여 노비를 해방하고 노비를 잔혹하게 해치는 것을 금지시켰다. 죄인들을 석방하여 양민이 되게 하고, 조세와 부역을 경감하고, 구휼 정책을 펴고, 수리사업을 일으켰다. 400여개의 현(縣)을 통합하여 관리의 수를 줄였으며, 중앙에는 상서(尙書)의 권한을 강화하고, 지방에는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도위(都尉)를 폐지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서기 57년 2월 무술일(戊戌日)에 유수는 낙양의 남궁(南宮)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유서에서, "짐은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으니, 상례는 모두 문제(文帝: 서한의 유항<劉恒>)와 같이 간소하게 치르고 낭비하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유수는 죽은 후에 묘호를 세조(世祖)라 하고, 시호를 광무제(光武帝)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