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역사시대-서한(西漢)의 창시자 고조(高祖) 유방(劉邦)

지식창고지기 2010. 2. 19. 13:31

한 고조 유방(劉邦)은 자가 계(季: BC 256 ~ BC 195, 또는 BC 247 ~ BC 195)이고, 한(漢)나라를 세운 황제이다. 한왕(漢王)으로 4년 재위하였고, 황제로 8년 재위하였다. 영포(英布)의 반란을 평정하던 중 가슴에 화살을 맞은 후 상처가 재발하여 53세에 죽었다. 장지는 장릉(長陵: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동쪽)에 있다.

유방은 패현(沛縣: 지금의 강소성 패현) 출신으로 원래는 진(秦)왕조의 정장(亭長: 10리 정도의 땅을 관리하는 낮은 벼슬)이었다. 한번은 그가 인부들을 호송하여 여산(驪山)으로 가던 도중에 인부들이 많이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유방은 아예 인부들을 모두 풀어주고, 자신도 따라온 인부 10여명과 함께 망탕산(芒山)으로 도주한 후 100여명을 더 모아 패현 관아의 문서 담당자 소하(蕭何), 감옥관 조참(曺參)과 몰래 연락을 취하였다.

진승(陳勝)이 봉기를 일으킨 이후, 소하는 현관(縣官)을 죽이고 유방을 패현의 수령으로 추대하여 패공(沛公)이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은 항우(項羽)의 숙부 항량(項梁)에게 의탁하였다. 항량이 죽은 후 그와 항우가 함께 이끈 의병은 모두 반진(反秦)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기원전 206년 군대를 이끌고 함양(咸陽)으로 진격하여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함양에 진입한 이후 그는 호화로운 아방궁(阿房宮)을 부러워하며 궁중에 계속 머물고자 하였다. 그러나 장량(張良)의 적극적인 권유로 성밖으로 물러나 파상(上)에 주둔하였다.

그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폐지하고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시행하여 민심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약법삼장'이란 말 그대로 복잡한 법을 간단히 세 항목으로 줄인 것이다.

첫째, 사람을 죽인 자는 목숨으로 보상한다.

둘째, 남에게 상해를 가한 자는 법에 따라 처벌한다.

셋째,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죄로 다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항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뒤따라와 홍문(鴻門: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臨潼縣> 동쪽)에 주둔하였다. 항우는 책사 범증(范增)의 건의에 따라 그의 유일한 적수 유방을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항우의 숙부 항백(項伯)은 즉시 유방의 진영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그의 오랜 친구 장량에게 알렸다. 장량과 유방은 함께 상의를 거친 결과 10만의 병마로 항우와 40리 거리를 두고 싸우는 것은 크게 불리하니, 항우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하였다.

이틑날 유방은 장량, 번쾌(樊)와 100여명의 부하를 데리고 홍문으로 가서 항우를 알현했다. 항우는 연회를 베풀어 그들을 환대했다. 연회석상에서 유방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낮은 소리로 항우에게 사죄하면서 그와 천하를 다툴 야심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 이 말을 들은 항우는 일시적으로 유방을 죽여야 겠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범증이 다시 항우에게 여러번 눈짓을 하여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항우는 그것을 알고도 못본척 했다. 이에 다급해진 범증은 항장(項莊)을 급히 연회석상에 투입하여 주흥(酒興)을 돋구기 위해 검무(劍舞)를 추는척 하면서 기회를 틈타 유방을 찔러 죽이게 했다. 항백은 항장이 춤을 추면서 서서히 유방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고 급히 몸을 일으켜 함께 검무를 추면서 유방을 보호하였다. 장량은 살짝 밖으로 나가 번쾌를 불러 유방을 보호하게 하였다. 위협을 느낀 유방은 화장실에 간다고 핑계를 대고는 번쾌를 데리고 몰래 항우의 진영을 벗어나 오솔길을 통해 급히 자기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장량은 유방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항우에게 예물을 바치면서, "패공께서는 이미 술에 많이 취하여 먼저 돌아가셨습니다."라고 고하였다. 이 말을 듣고 범증은 탄식을 그치지 않았지만 어찌할 방법도 없었다. 이렇게 하여 항우와 유방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홍문연(鴻門宴: 홍문에서의 연회)' 고사이다.

같은 해 12월에 유방은 항우로부터 한왕(漢王)에 책봉되어 파촉(巴蜀), 한중(漢中)의 땅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그는 관중(關中)으로 출병하여 항우와 4년에 걸친 전쟁을 벌였으니, 그것을 '초한전(楚漢戰)'이라 한다. 유방 자신은 뛰어난 장수의 재능도 없었고, 어떤 고명한 책략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는 인재를 널리 구하여 그 재능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잘 썼다. 장량, 소하 등의 치밀한 계책과 한신(韓信), 팽월(彭越), 영포(英布) 등 뛰어난 장수들의 출전으로, 기원전 202년에 마침내 숙적 항우를 물리치고 초한전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 해 2월에 사수(水: 지금의 하남성 형양현<陽縣> 경내)에서 황제라 칭한 후 도읍을 장안(長安: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西安市>)에 정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였다. 역사에서는 이를 전한(前漢) 또는 서한(西漢)이라 일컫는다.

유방은 재위 시기에 한신, 팽월, 영포 등의 타성(他姓: 유씨가 아닌 다른 성씨) 왕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유씨 성의 왕들을 많이 임명하였다. 진나라의 법률을 수정하여 <<한율(漢律)>>을 제정하고, 역법과 군법, 도량형을 정비하였다. 오랜 전쟁으로 빈곤해진 사회를 구제하기 위해 그는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생활을 안정시키는 정책을 취하여, 중농억상(重農抑商: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함), 부역과 조세 경감, 노비 해방, 병사들의 제대 등의 조치를 시행함으로써, 사회는 점진적으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기원전 196년에 유방은 영포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쟁 중에 가슴에 화살을 맞았다. 그 이듬해 3월에 상처가 재발하여 병세가 위중해지자, 그는 제후들과 신하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다음 백마(白馬)를 죽여 함께 그 피를 마시며 다음과 같이 맹세하게 했다.

"지금부터 유(劉)씨가 아닌 사람은 왕에 책봉될 수 없고, 공을 세우지 않은사람은 제후가 될 수 없다. 누구든 이 맹약을 어기면 천하의 사람들이 함께 그를 토벌할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진평(陳平)에게 명령하여 즉시 연(燕)에서 형양(陽)으로 돌아가 관영(灌)을 도와 지키게 하고 제후들의 반란을 예방토록 하였다. 그런 다음에 여후(呂后)를 불러 뒷일을 부탁했다. 여후가 그에게 물었다.

"만약 재상 소하가 죽으면 누가 그 뒤를 이을 적임자이겠습니까?"

"조참이오."

"조참이 죽은 뒤에는요?"

"왕릉(王陵)은 진평이 보좌하고 있소. 진평은 지략이 뛰어나긴 하지만 혼자서 어떤 일을 감당해내지는 못합니다. 주발(周勃)은 성실하고 지식은 부족하지만 앞으로 유씨천하를 안정시키는데 그가 없으면 안되니, 그를 태위(太尉)에 임명하면 좋습니다."

 

여후가 다시 뒷일을 묻자 유방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뒷일은 당신이 알 필요가 없을 것 같소."라고 하였다. 그 해 4월 갑신일(甲辰日)에 유방은 장안 장락궁(長樂宮)에서 병사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라 하고 고황제(高皇帝)라 일컬었으며, 역사에서는 습관적으로 그를 한고조(漢高祖)라 칭한다.

 

 

 

 

 

 

 <유방의 각종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