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隋) 양제(楊帝)는 이름이 양광(楊廣: 569 ~ 618) 또는 영(英)이며, 수(隋) 문제(文帝)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수 문제와 형 양용(楊勇)을 죽이고 왕위를 승계하였다. 14년간 재위하다가 농민대봉기로 강도(江都: 지금의 강소성 양주시<楊州市>)에서 곤란을 겪다가 부하 우문화급(宇文化及) 등의 내부 반란으로 피살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다. 장지는 지금의 강소성 양주시 서북쪽 에 있다. 양광은 서기 581년에 진왕(晋王)에 책봉되었다. 남하하여 진(陳)을 멸망시키고 북방의 돌궐(突厥)을 방어하면서 큰 공을 세운 양광은 많은 인재들을 구슬려서 오로지 형 양용으로부터 태자 자리를 뺏으려는 일념 뿐이었다. 양용은 사치스런 생활로 수 문제의 환심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던 반면, 양광은 문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근검절약을 강조하면서 검소하게 생활하고 가무와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 척 했다. 문제가 올 때마다 그는 짙고 야한 화장을 한 애첩은 뒷방에 숨겨두고 늙고 못생긴 여인들만 골라 누추한 옷을 입혀 옆에서 시중들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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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일부러 악기의 줄을 끊어 버리고 악기 위에 먼지가 가득 쌓이게 하여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었다. 이런 양광에게 속은 문제는 양광이 자기를 닮았다고 생각하여 대단히 흡족해 했다. 하루는 양광이 사냥을 나갔는데 마침 큰 비를 만났다. 시위가 그에게 비옷을 주자 그는 거절하면서, "병사들이 모두 비를 맞고 있는데 나 혼자만 어찌 비옷을 입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문제는 양광이 자애로운 마음을 가졌으니 앞으로 큰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더욱 기뻐하였다. 이와 동시에 양광은 또 양용과 사이가 좋지 않은 월국공(越國公) 양소(楊素)와 결탁하여 문제와 황후 앞에서 양용을 헐뜯고, 문제의 병이 위중해졌을 때는 양용을 모함하면서 부황이 빨리 죽기를 기대했다. 이에 문제는 서기 600년에 태자 양용을 체포하여 폐서인 시키고 양광을 새로운 태자로 책봉했다. 정권 찬탈을 향한 양광의 첫단계 성공이었다. 604년 7월 문제의 병이 위중하여 병상에 눕게 되자 양광은 황제에 등극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지체없이 양소에게 편지를 보내 뒷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편지를 가져간 사람이 실수로 양소의 답장을 문제에게 바치고 말았다. 양소의 편지를 읽고 크게 노한 문제는 양광을 직접 문책하기 위해 그를 즉시 입궁하라 명하였다. 이 때 진비(陳妃)가 속옷 차림으로 달려 들어와서는 그녀가 옷을 갈아입을 때 양광이 파렴치하게 그녀를 희롱했다고 울면서 하소연했다. 문제는 지금까지 양광의 위선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침상을 치며 큰 소리로 호통쳤다. "이런 짐승만도 못한 무례한 놈에게 어찌 나라를 다스리는 대임을 맡길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급히 옆에 있던 대신 유술(柳述), 원암(元巖)에게 조서를 작성토록 명하여 양광을 폐위시키고 다시 양용을 태자에 책봉했다. 문제 주변에 심어둔 부하로부터 이 보고를 들은 양광은 급히 양소와 상의를 거친 후, 병력을 동원하여 황궁을 포위, 유술과 원암을 체포하고 문제를 시해했다. 양광은 다시 형 양용에게 문제의 가짜 유언장을 보내어 그를 자진토록 협박했다. 양용이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유언장을 가지고 간 사람이 그를 끌어내어 죽여 버렸다. 이와 같이 양광은 아버지와 형을 죽이는 수단으로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였던 것이다. 그 이듬해에 양광은 연호를 '대업(大業)'으로 고쳤다. 양광은 제위(帝位)를 찬탈하자마자 바로 그 본성을 드러내어 황음무도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백성들을 잔혹하게 학대하여, 중국 역사상 유명한 난봉꾼이자 폭군이 되었다. 양광의 포악한 행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백성들의 노동력을 마음대로 착취하였다. 양광은 즉위한 그 해에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매월 2백만명을 낙양성 공사에 동원하고, 각지에서 희귀한 나무와 돌을 수집하여 낙양으로 운송하게 하였다. 강서 지방에서 큰 목재 하나를 운송하려면 2천명에 총 몇 십만명의 인력이 소요되었다. 그것을 운반하느라 피로에 지친 농민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은 가운데 무수한 사람들이 무참히 죽어갔다. 그는 또 낙양의 서쪽 근교에 '서원(西苑)'을 짓게 하였다. 1.3 ha나 되는 서원 안에 바다를 만들고, 그 바다 안에 다시 높이 1백여척에 달하는 섬을 3개 만들었으며, 그 섬 안에 정자와 누각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대단히 장관을 이루었다. 바다의 북쪽에는 '용린거(龍鱗渠)'라는 인공수로를 만들어 바다로 굽이쳐 흘러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수로를 따라서 16개의 화려한 정원을 만들고, 모든 서원은 사계절의 특징이 잘 살아날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예를 들면, 봄과 가을에는 다양한 색상의 비단을 잘라 꽃잎을 만들어 나뭇가지에 가득 매달아 두었고, 겨울에 양광이 찾아가는 정원에는 연못 속의 얼음에 구멍을 뚫어 다양한 색상의 비단을 잘라 연잎과 연꽃을 만들어 수면 위에 띄워 두었다. 서원 안에는 각종 희귀 동물들을 사육하여 양광의 사냥감과 관상용으로 제공하였다. 저녁이 되면 양광은 항상 수천 명의 궁녀들을 데리고 서원으로 달려가 음악을 연주하면서 밤새워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양광은 남방에 대한 통치를 강화함과 동시에 유흥을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백만여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동북 탁군(涿郡: 지금의 하북성 탁현)에서 동남 여항(余杭: 지금의 절강성 항주시<杭州市>)까지 장장 4천여리에 이르는 대운하(大運河: 즉 경항운하<京杭運河>)를 6년만에 건설하였다. 대운하 양 옆에는 대로를 건설하고, 대로 옆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두 개의 역참마다 양광에게 휴식을 제공할 행궁(行宮)을 설치하였다. 낙양에서 강도(江都: 지금의 강소성 양주시<揚州市>)까지 40여개의 행궁을 설치하였다. 대운하 건설 사업에는 약 1억 5천만명의 인력이 소요되었으며, 한 가구당 20여명 분의 일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많은 인부들이 운하를 파다 피로에 지쳐 물속에서 죽어갔다. 어떤 구간에 수로의 깊이가 약간 얕은 곳이 발견되자 양광은 그 구간을 공사한 관리와 인부 5만명을 잡아다 전부 손발을 묶은채로 강가에 생매장시켜 버리기도 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렇게 백성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여 건설한 대운하가 남북간 교통을 편리하게 하고, 남북간 경제 문화 교류를 촉진시켰으며, 국가의 통일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2. 유람하며 놀기를 좋아하였다. 서기 605년부터 양광은 3번이나 대운하를 통해 강도(江都)로 유람을 떠났다. 그는 길이 2백척, 상하 4층의 대형 용주(龍舟: 용머리 모양을 한 배)를 타고, 그를 수행한 비빈(妃嬪), 왕후장상, 승려 도사들은 수천 척의 화려한 배에 나누어 탔는데, 앞뒤로 끊임없이 이어진 이 배 행렬의 길이는 무려 2백여리에 달하였고, 배를 끌어당기는 인부들은 8만여명이나 되었다. 운하의 양 언덕에는 기마병들이 호위를 하였는데 깃발이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밤이 되면 등불을 훤히 밝히고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양광은 배 위에서 마음껏 술을 마시고 즐기면서 주위의 경관을 감상했으며, 길가 5백리 이내에 사는 백성들은 음식을 갖다 바쳐야 했다. 진귀하고 맛있는 음식들은 다 먹지 못하고 배가 떠날 때 구덩이를 파서 묻어 버렸다. 이로 인해 무수한 백성들이 가산을 탕진하였다. 한번은 그가 육로를 통해 북방으로 50만 대군을 거느리고 유람을 떠났는데, 특히 십 몇 개 군(郡)에서 인부들을 징집하여 태행산(太行山)에 터널을 뚫고 대로를 건설하였다. 그리고는 백만여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20일만에 장성(長城)을 수축하고 그의 안전을 보호했다. 북방에 도달하여 행궁이 없는 것을 보고 그는 뛰어난 기술자 우문개(宇文愷)에게 이동식 궁전을 짓도록 명했다. '관풍행전(觀風行殿)'이라 불리는 이 이동식 궁전은 수백명을 수용할 수 있고, 언제든지 설치하고 해체할 수 있으며, 아래에 바퀴가 달려 있어 이동이 가능하였다.
3. 군사력을 남용하여 전쟁을 일삼았다. 양광은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와의 전쟁을 일으켰다. 출전하기 전에 그는 많은 기술자들을 산동 동래(東萊: 지금의 산동성 액현<掖縣>) 해안으로 소집하여 대규모 전함을 만들게 했다. 강요에 못이긴 기술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물속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였든지 하체에 구더기가 생겨 죽은 사람이 30~40%에 달했다. 그는 또 강회(江淮) 이남의 인부와 선박을 소집하여, 여양창(黎陽倉)과 낙구창(洛口倉)의 식량을 탁군(涿郡: 지금의 북경성 서남쪽)으로 운반하게 했다. 앞뒤로 끊임없이 이어진 선박의 행렬은 그 길이가 무려 1천여리에 달했으며, 길위로 뛰어다니는 인부와 병사들은 항상 수십만명이나 되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서 쓰러져 죽어 시체 썩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서기 612년 수나라 백만대군이 바다와 육지로 나누어 고구려를 공격해 들어갔다. 그 중 수군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을 통해 평양성으로 쳐들어갔으나 고구려군에 대패하였다. 수양제 양광이 직접 지휘한 육군은 요동성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별동대를 편성하여 곧장 평양성으로 쳐들어가려 하였으나,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작전에 걸려 살수에서 대패하였다. 이때 간신히 살아 돌아간 병사는 불과 2700명 뿐이었다고 한다. 양광은 계속해서 두 번이나 더 고구려와의 전쟁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4. 자신의 위엄과 명성을 과시하길 좋아하였다. 양광은 수나라의 부강함을 자랑하기 위해 서역의 사신과 상인들을 조정으로 끌어들였으며, 그들이 들어오는 길목의 군현에서는 거액의 환송비를 지불해야 했다. 서기 610년 서역 각국의 사신과 상인들이 낙양으로 모여들었다. 정월 15일 밤부터 시작하여 양광은 황성의 정문 밖 대로에 성대한 공연장을 설치하고, 서역 사람들을 위해 백희(百戱)를 공연하였다. 정월 말까지 계속된 이 공연은 사방 5천보에 이르는 규모의 공연장에 악대가 18000명이나 되었으며, 수 십리 밖에서도 음악소리를 들을 수 있고 등불이 대낮처럼 훤히 밝았다. 서역 사람들이 낙양 동시(東市)로 와서 무역을 할 때, 양광은 시장 상인들에게 명하여 시장의 모습을 근사하게 꾸며 진귀한 물건을 가득 쌓아두게 하고, 상인들은 모두 화려한 복장을 갖추게 했다. 심지어는 채소를 파는 노점상도 돗자리를 깔고 장사하도록 했다. 서역 사람들이 음심점 앞을 지날 때는 주인이 그들을 청하여 배불리 먹이되 한푼도 받지 말고, 나라가 부유하니 먹고 마시는데 돈을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게 하였다. 시내의 나무도 모두 비단으로 장식하여 나라가 부유하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그러자 서역 사람들이, "당신네 수나라는 벌거벗은 가난뱅이도 있는데 어째서 이 비단들로 옷을 만들어 그들에게 주지 않고 쓸데없이 나무를 장식하는데 쓰시오?"라고 물으면,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수 문제 때 축적해 두었던 거액의 재산과 무수한 인력은 양광에 의해 이렇게 한없이 흥청망청 낭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끝없이 계속되는 부역과 병역으로 무수한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게 되면서 많은 전답들이 황무지로 버려졌다. 살아갈 길이 막막해진 많은 농민들은 나무껍질이나 나뭇잎을 먹을 수밖에 없었으며, 심지어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처참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포학한 양광의 통치를 견디다 못해 서기 611년 마침내 농민대봉기가 일어났다. 그래도 양광은 오히려 절제하기는 커녕 여전히 사치와 폭정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의 충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스로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다고 생각한 양광은 시중드는 신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선제(先帝)의 유업을 계승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대부들과 재학(才學)을 견주어도 나는 당연히 황제감이야." "나는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의 충고를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고관이라면 간언(諫言)으로 명성을 구하려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들을 더욱 용서하지 않겠다. 만약 비천한 선비라면 용서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결코 출세하는 일은 없도록 할 것이다!"
개국공신 고경(高경, 경=潁에서 水 대신 火), 하약필(賀若弼) 등은 양제의 사치에 불만을 품었다는 이유로 양제에 의해 조정을 비방하였다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서기 616년 그는 조정의 안위는 돌아보지 않은채 다시 강도(江都)로 유람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하급 관리 최민상이 만류하는 간언을 올리자 그는 최민상을 죽여 버렸다. 사수(汜水: 지금의 하남성 형양현<滎陽縣>)에 이르렀을 때 하급 관리 왕애인(王愛仁)이 만류하는 간언을 올리자 그는 또 왕애인도 죽여 버리고 유람을 계속하였다. 양도(梁都: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에 이르렀을 때 어떤 사람이 길을 막고 상소를 올려, 계속 강도로 간다면 천하가 그의 것이 안된다고 하자, 그는 또 상소를 올린 사람을 죽여 버렸다. 그렇게 하여 결국 그는 강도에 도달하였다. 양광은 말을 해도 믿지 않았다. 서기 615년에 그는 다시 북방 변경 지역으로 유람을 떠났는데, 돌궐족 기마병 수십만명의 기습을 받아 안문(雁門: 지금의 산서성 대현<代縣>)에서 포위되었다. 속수무책이었던 그는 어린 아들 양고(楊杲)를 부둥켜 안고 밤낮으로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신 소위(蘇威)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조서를 내리고, 병사 모집에 상금을 걸었다. 그러자 각지의 현령들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달려와서 그를 지원하여 간신히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낙양으로 돌아가자마자 약속을 번복하고 상을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농민대봉기의 봉화가 갈수록 격렬하게 타오르자 양광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겁이 나서 벌벌 떨었다. 밤이 되면 그는 편히 잠들지 못하고 꿈속에서 "도적이야"라고 놀라 소리치기도 하였으며, 궁녀들이 어린애를 달래듯이 흔들고 어루만져 주어야 잠들곤 하였다. 하루는 밤에 대업전(大業殿)에 불이 났다. 그는 농민군이 자기를 죽이러 들어온 것이라 생각하고 황망히 서원(西苑)으로 도망가서 풀숲에 숨어 있다가 불이 진화된 후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강도(江都)로 도피한 후에 그는 더욱 황음무도해졌다. 궁궐 안에 백여개의 방을 만들고, 방마다 여러 명의 미녀들을 데려다 놓은 다음 매일 돌아가면서 각 방을 찾아다녔다. 그는 후궁과 시녀 천여명을 데리고 술을 마시며 온종일 술을 입에서 떼지 않고 밤낮으로 술에 취해 있었다. 그는 불리한 소식은 들을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늘 마음속의 두려움을 씻어내지는 못했기에 소황후(蕭皇后)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해치려 하고 있지만, 다른 건 신경쓰지 말고 즐겁게 술이나 마십시다."
한 번은 그가 한참동안 거울을 멍청히 보다가 소황후에게 묻는 것이었다. "나의 이 머리를 누가 베러 올지 모르겠소!"
소황후가 놀라서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귀천과 고락은 정해진 것이 아니고, 목 잘리는 것 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오!"
당연히 그는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려고만 하지는 않았다. 수나라 영토의 대부분이 봉기군의 통제에 들어가고, 낙양과 강도 등 몇 개의 성만 어렵게 지키고 있는 상황을 목도하고, 그는 강도(江都)도 안전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장강 남쪽의 단양(丹陽: 지금의 강소성 남경시<南京市>)으로 천도할 준비를 하고, 민중들에게 궁궐을 수축하라 명하였다. 모두 관중(關中) 출신들로 구성된 양광의 금위군(禁衛軍)은 양제가 강도에 오래 머물면서 황음무도함에 빠져 있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 그가 다시 남으로 천도하려 하자 고향과 가족을 잊지 못한 병사들은 고향 생각에 마음이 동요되어 하나 둘씩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서기 618년 3월 3일(병신일<丙辰日>) 장작소감(將作少監: 궁궐의 토목건축 담당 관직) 우문지(宇文智)와 낭장(郞將: 수도 호위대 장수) 사마덕감(司馬德勘), 직각(直閣: 황제 호위대 장수) 배건통(裴虔通) 등이 우둔위(右屯衛: 호위부대의 하나) 장군 우문화급(宇文化及)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병사들을 선동하여 저녁 무렵에 궁궐에 불을 지르고 현무문(玄武門)을 통해 궁안으로 쳐들어갔다. 양광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옷을 바꿔 입고 서각(西閣)으로 도망갔다. 반란군 장수 배건통과 원례(元禮), 마문거(馬文擧) 등은 궁녀들을 협박하여 양제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는 병사들을 이끌고 서각으로 달려갔다. 양광은 반란군 장수들을 꾸짖으며,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묻자, 반란군 장수들은 이렇게 답했다. "당신은 무력을 남용하여 전쟁을 일삼고, 유흥에 빠져 그칠 줄 몰랐으며, 사치와 황음무도한 생활을 하였소. 간신들의 말만 믿고 충언을 듣지 않았으며, 남자들을 전장에서 억울하게 죽게 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들판에서 죽게 하여, 백생들은 생계를 잃고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소. 그런데도 당신은 죄가 없다 말하겠소?"
그러자 양광이 대답했다. "난 정말 백성들에게 잘못했다. 그러나 나와 함께 부귀영화를 누린 너희들에게는 잘못이 없다. 오늘 일을 일으킨 주동자가 누구냐?"
반란군 장수는 "세상 사람들은 당신 같은 우매한 폭군을 뼈에 사무치게 증오하고 있는데, 어찌 주동자가 한사람 뿐이겠소!"라고 말한 후, 양광을 누각 아래로 끌어내렸다. 이 때 반란군 관리 봉덕이(封德彛)가 달려와서, "이런 우매한 군왕은 내게 데려올 필요도 없으니 즉시 그를 해치워라."는 우문화급의 명령을 전하였다. 소황후는 "황제가 어질지는 못했지만 옛날에 그대들에게 베풀었던 은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를 양위하게 하고 삼공(三公)으로 강등시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라고 애원하였다. 배건통을 비롯한 반란군 관리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칼을 뽑아 양광을 죽이려 하였다. 양광은 "움직이지 마라. 내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자진하겠다!"라고 소리쳤다. 배건통은 "독주가 칼보다 편하지 않지."라고 하면서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양제는 "어쨌든 내가 천자였으니 내 시신만은 건드리지 말아 다오."라고 울면서 말했다. 마문거는 병사들과 함께 양제를 내실로 끌고 들어가 목졸라 죽였다. 거사가 끝난 후 소황후는 궁녀들에게 침대로 관을 짜게 하여 양광의 시체를 염하였다. 얼마 후 우문화급은 그를 강도궁(江都宮) 서쪽의 오공대(吳公臺) 아래에 안장했다. 당나라가 수립된 후에 다시 뇌당(雷塘: 지금의 강소성 양주시<揚州市> 근교) 옆으로 이장했다. 양광이 죽은 후에 시호를 양제(煬帝)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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