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개혁개방의 가속화

지식창고지기 2010. 2. 27. 11:57

"흰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고 한 말이 명언이 되었듯이, "현재의 세계는 개방의 세계이다.(現在的世界是開放的世界)"라고 한 말도 명언이 되었다.

'개혁 개방의 총설계사'로 추앙받는 등소평의 역사적 지위를 확립한 것은 첫째가 개혁이고 둘째가 개방이다. 개방은 등소평에게는 숭고한 역사적 지위를 가져다 주었으며, 중국에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시야, 새로운 추구,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외부로부터 받은 충격을 중국 내부의 개혁요구, 개혁역량과 결부시켜 중국을 새로운 역사시대로 나아가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홍콩의 발전에도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개방사상은 등소평 사상체계의 핵심으로 그것은 하나의 과정 속에서 형성, 확립, 발전되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체계는 청소년 시절 유럽 유학생활에서 싹트기 시작하여 지도자 시기에 여러 차례 선진국을 방문하면서 성숙되었다.

행동이 방정하고 사고가 원만한 지도자 등소평은 소년시절의 이상을 풍부한 경험과 결부시켜 전면적인 개방사상으로 성숙시키고 그것을 국가의 기본 정책으로 확립하였다. 그는 일찍이 "중국의 경제 개방정책은 내가 제기한 것이다."라고 자랑스럽게 공언하곤 하였다. 그의 개방사상은 대외개방, 대내개방, 일국양제(一國兩制)를 포함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대외개방사상이다.

등소평의 대외개방사상의 주요 특징은 첫째가 외자도입이고, 둘째가 자본주의 경제 원리에 따라 경제특구를 설치한 것이다. 이를 다시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경제특구를 설치하여 연해도시를 개방하고, 연해경제개발구를 설치하여 장강(長江) 연안도시와 내륙지역의 성도(省都: 성정부소재지)를 개방한다.

2. 외자를 도입하고 외국인의 대중국투자를 환영한다.

3.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대외 경제기술 교류를 확대하고 외국의 선진 기술을 적극 도입한다.

4. 대외무역을 확대하여 외화수익을 늘리고, 무역체제를 개혁하여 지방과 기업의 수출을 적극 장려한다.

5. 자급자족의 자연경제 관점과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관념을 철저히 포기한다. 국내시장과 국제시장을 모두 개척하되 국내시장을 우선시 하고, 국내경제의 관리 능력과 대외 경제무역의 관리 능력을 배워야 한다.

 

등소평의 개방사상에는 당연히 여러 가지 제한도 있었다. 예를 들면, 그가 대외개방 중에 반드시 4개의 기본원칙을 견지해야 하고, 자주독립을 견지해야 하며, 정신문명 건설에 부합되어야 하고, 화목단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등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주의제도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상술한 제한에 대하여 등소평은 사회주의제도가 개방적인 제도라고 설명하였다.

등소평의 사상체계는 개방과 사회주의를 함께 융합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등소평은 대외개방이 사회주의를 붕괴시켜 자본주의로 나아가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부 개방된 도시에 자본주의의 부분적인 유입을 허용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사회주의 경제발전을 보충하기 위한 것일 뿐, 아무리 개방되고 외자가 얼마나 되든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적어 사회주의제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회주의의 경제적 기반은 아주 견실하기 때문에 수백 수천억위앤의 외자를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이 사회주의의 기초를 와해시키지는 못하며, 약간의 위험은 있겠지만 그렇게 크지는 않다고 하였다.

대외개방 방침이 확립된 이후 그것을 어떻게 실행에 옮기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는 먼저 하나의 근거지를 설정하고, 1980년 홍콩, 마카오, 대만에 인접한 광동성과 복건성에 심천(深), 주해(珠海), 산두(汕頭), 하문(廈門)의 4개 경제특구를 설치하였다. 만약 특구의 개방이 성공한다면 전국적인 개방을 추진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등소평은 이렇게 말하였다.

"특구는 개방의 기지로서 경제와 인재양성 측면에서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중국의 대외 영향력도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등소평의 구상에 따라 특구에서는 특수한 경제정책을 시행하였는데 그것이 내륙과 다른점은 다음과 같다.

1. 특구의 경제구조는 중외합자, 합작경영, 외상독자기업을 위주로 하고, 그 자본금은 주로 외자에 의존하고 생산품은 주로 수출에 사용한다.

2. 특구에 투자하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세금, 출입국 등에 있어서 특혜와 편의를 제공한다.

3. 특구의 경제는 시장경제 원리를 위주로 한다.

4. 특구에는 내륙과 다른 관리체제를 시행하여 더욱 큰 자율권을 누릴 수 있게 한다.

 

다년간 계획경제를 시행한 중국에서 이러한 특수한 자본주의식 경제정책을 시행하다 중국공산당 고위층을 비롯한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혀 특구의 운명이 끝나 버릴  위험에 처한 적도 있었다. 중국공산당의 원로 진운(陳雲)이 특구를 한번도 시찰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당시에 의견 대립이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저항에 직면하였지만 등소평의 신념은 확고했다. 그는 특구를 두 차례 시찰하였는데, 특히 두 번째 시찰에서는 90 노구를 이기지 못해 딸의 부축을 받으며 남쪽으로 내려기기도 하였다. 두 번의 시찰에서 그가 발표한 머릿글과 담화는 개방정책의 추진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등소평은 1984년에 심천, 주해, 하문을 시찰한 후에 그 지역에 각각 다음과 같은 머릿글을 써 주었다.

"심천의 발전과 경험은 우리의 경제특구 정책이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었다."

"주해 경제특구는 아주 훌륭하다."

"경제특구를 더욱 빠르게 더욱 잘 운영하라."

 

1992년 초에 등소평은 다시 심천, 주해를 시찰한 후에 유명한 담화를 발표하여 경제특구를 반대하는 자를 "좌경"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등소평의 개방사상은 그의 반좌사상(反左思想)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구를 설치한지 4년이 지난 1984년에 등소평은 다시 연해지역 14개 항구도시를 개방하였다. 그 14개 도시는 바로 천진(天津), 상해(上海), 대련(大連), 진황도(秦皇島), 연대(煙台), 청도(靑島), 연운항(連雲港), 남통(南通), 영파(寧波), 온주(溫州), 복주(福州), 광주(廣州), 담강(湛江), 북해(北海)이다. 이 지역들은 특구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특구에서와 유사한 특별정책을 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