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등소평의 실책

지식창고지기 2010. 2. 27. 11:55

1985년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35주년이었다. 성대한 국경일 관광대열 속에 북경대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소평, 안녕하세요!"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이로부터 4년이 지나 세계를 진동시킨 천안문 유혈사건이 발생한 후에 학생들은 "소평, 당신은 아주 잔인하다!"라는 말을 토로하였다. "잔인하다"는 이 말은 분명 '6.4' 천안문사건에 대한 등소평의 책임을 질책하는 것이었다. 6.4 천안문사건의 영향은 중국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신속하게 중국에 대한 경제적 제재 조치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로써 중국과 서방 국가의 경제적 협력은 거의 단절되었다시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등소평에게 유감을 표하면서 만약 6.4 천안문사건이 없었더라면 그가 중국 근대사상 진정한 위인이 되었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그의 중국공산당 입당 후의 경력을 통해서 다시 살펴보면 그러한 조치는 완전히 그의 업무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일찍이 등소평이 다른 사람에게 준 인상은 규칙을 준수하면서 온순하고 예의가 바르며 좀처럼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 묵묵히 업무에 열중하는 스타일이었다. 권력을 다투지도 않고 주제넘게 자기 위세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이는 그가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날부터 주로 다른 사람의 보좌역과 중국공산당 중앙 비서장 등을 역임하면서 이유한(李維漢), 주은래(周恩來), 이립삼(李立三) 등의 여러 상사들을 섬겨왔기 때문이다.

비서는 업무적으로 대단히 번거로운 일이 많기 때문에 인내심이 아주 강해야 맡을 수 있는 직책이다. 등소평은 오랜 시간동안 그것도 몇 번이나 그렇게 번거로운 직책을 맡았다. 이는 그가 확실히 겉으로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형세가 자기에게 불리할 때는 더욱 인내하고 양보하면서 몸을 굽히고 일선에서 물러나 자신을 보호하였으며, 극도로 긴급한 상황이 아니면 결코 강적에게 강하게 맞서지 않았다. 그러나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달려나가 필사적으로 싸워서 살아남았다.

1989년 중국공산당 총서기 호요방(胡耀邦)의 사망을 계기로 북경 지역의 대학생들이 정부에 대화를 요구하면서 중남해(中南海)에서 정치개혁 압력을 가했을 때 등소평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학생들을 만나지 않겠다. 추모행사가 열린 후에 학생들이 다시 소란을 피울 이유가 없다. 만약 다시 소란을 피운다면 그것은 성격이 변질된 것이다. 때가 되면 우리가 자발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이 말이 끝난 후에 등소평은 극도의 긴장이 감도는 북경을 떠나 4월 18일부터 5월 8일까지 20일간 북대하(北戴河)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5월 8일 그는 군부 책임자들을 만나 고급장교들에게 충성 맹세를 요구하고 학생 진압을 위한 병력을 배치토록 지시하였다. 5월 17일 그는 사실상 학생들을 진압할 준비를 모두 끝냈던 것이다.

이외에 정치적 주장을 통해서 보더라도 그는 한번도 민주주의자로 행세한 적이 없었다. 1986년 5월 그는 개혁개방과 평화발전 문제를 언급할 때에 서두에서 첫 마디를, "나는 맑스주의자이며, 지금까지 줄곧 맑스주의의 기본 원칙을 준수해 왔다."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따라서 부단히 증대되는 정치체제 개혁 요구에 직면하여 그는 잠정적으로 양보하는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철저한 개혁에 착수할 수 없었다. 이른 바 정치체제의 개혁이라는 것도 현행 체제를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의 조정일 뿐, 현행 체제 자체를 전면적으로 개혁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등소평은 6.4 천안문사건이 발생한지 5일째 되던 날 계엄군 장교들을 접견한 자리에서도, "그들은 공산당을 타도하고 사회주의제도를 전복시키려 하였다."라고 아주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그해 겨울 엎친데 덮친 격으로 구소련과 동구 공산국가들이 모두 사회주의체제를 포기하였다. 이것은 6.4 천안문사건에서 아직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중국정부에 새로운 압력으로 다가왔다. 당시에 송평(宋平)은 "중국은 사회주의의 튼튼한 대들보를 준비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였지만, 등소평은 아주 적시에 정세를 판단, "냉정하게 살피고 진용을 단단히 다지면서 대응 방침을 천천히 마련하라" 하고 이념상의 분쟁을 강력하게 회피하였다.

그 후 중국의 전방위 외교를 통해서 나타난 방대한 중국시장의 매력은 인권을 핵심으로 삼고 있는 서방 국가들의 대중국 제재 조치를 점차 와해시켜 나갔으며, 이로써 중국은 점진적으로 '6.4 천안문사건'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등소평이 죽은 지금에도 '6.4 천안문사건'이 중국 국민에게 안겨 준 마음의 엉어리는 여전히 풀기 어려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등소평은 77년 복권된 이후 정치적으로는 4개의 기본 원칙을 견지하면서 경제적으로는 개혁 개방을 추진하였다. 십 수년간 경제체제 개혁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룩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취한 보수적이고 경직된 노선은 항상 외부의 비난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가 많이 폄하되기도 하였다.

70년대 말 80년대 초에 등소평은 정계에 복귀하여 화국봉(華國鋒)의 수중에서 권력을 탈취하였다. 반우파와 문혁의 동란이 빚어낸 날조사건, 역사문제 등에 대하여 등소평은 호요방(胡耀邦)의 협조 속에 대담한 시정작업을 시행하여 새로운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문혁의 부정을 통하여 등소평은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대재난을 매듭짓고 모택동을 새롭게 평가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대성공을 거두고 국민의 여망을 등에 업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한계로 70년대 말 북경 서단민주장사건(西單民主牆事件), 87년 자산계급 자유화 반대, 89년 6.4 천안문 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 개혁 개방에 중대한 공헌을 한 지도자 호요방과 조자양의 강제 축출 사건 등을 처리하면서, 그는 학생과 민중의 피를 두 손에 가득 묻히는 엄청난 과오를 범했다.

1978년 말부터 1979년 초까지 북경과 상해 등 주요 도시에서는 자발적인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해외 평론가들은 그것을 '북경의 봄' 또는 '서단민주장사건'이라 일컬었다. 당시 진리 규명과 정의 실현에 고무되어 북경에 인접한 중공 중앙 소재지 중남해(中南海)의 서단가(西單街)에는 시정을 비난하고 불만을 토로한 각양각색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민주화 의식을 가진 청년들은 이를 계기로 유인물을 간행하여 사회현상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세상에 널리 알렸으며, 실명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면서 중앙의 실권자를 비평하였다. 이때 간행된 간행물로는 ≪북경의 봄(北京之春)≫, ≪사오론단(四五論壇)≫, ≪탐색(探索)≫ 등이 있다.

민중의 민주화 요구와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는 민간 간행물과 대자보에 대하여 등소평은 초기에는 이해하고 용인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79년 1월에는 각성의 방문단들이 민주화운동 청년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북경에서 세 차례 시위행진을 벌였으며, 그 해 2월 초에는 상해로 추방되었던 지식청년들이 상해시위원회 정문 앞에 집결하여 열차를 가로 막고 상해로 되돌아 올 것을 요구하였다. 나아가서 서단민주장의 대자보에는 위경생(魏京生)의 <민주냐 독내냐>와 같은 등소평을 새로운 독재자로 지목하고 그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글들이 나붙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등소평의 태도는 백 팔십도로 돌변하여 단호하게 위경생과 유청(劉靑) 등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다음 전국인인대표대회에서는 헌법 중의 누구나 자기 주장을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다는 '대명대방(大鳴大放)'과 대자보, 대변론의 규정을 삭제하였다. 이로써 유명한 민주투사 위경생은 투옥되었다.

78년 말 중공 11기 3중전회에서 중국사회와 문예계에는 사상의 해빙 현상이 나타났으나 이 사건으로 다소 느슨해졌던 사상계에는 다시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다. 83년 당총서기 호요방의 창작 멤버 중의 한 사람인 백화(白樺)의 작품 ≪고련(苦戀)≫이 비판을 받았고, 유명한 작가 대후영(戴厚英)의 소설 ≪사람아 사람아(人人)≫가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사상 개방으로 유명한 ≪인민일보(人民日報)≫ 사장 호적위(胡績偉)와 부편집장 왕약수(王若水)도 파면 되었다. 등소평이 주도한 이 '반정신오염운동(反精神汚染運動)'은 순식간에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마치 또 다른 정풍운동의 회오리가 도래하는 듯 했다.

이후 이 운동은 신속히 중단되었는데, 그 이유는 호요방과 조자양이 조사를 통해 그것의 편향성을 발견하고 강력하게 제지하였기 때문이다. 반정신오염운동은 등소평이 정권을 장악한 후 두 번째로 민심을 잃은 사건이었지만, 이때의 등소평은 여전히 사실에 입각하여 대세를 살피면서 그것을 무모하게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1986년 말 중국에는 천안문사건 이래 최대의 자발적인 학생운동이 또 다시 일어났다. 등소평은 호요방과 조자양의 소극적인 반우파투쟁에 극도의 불만을 품고 "자산계급 자유화를 반대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이듬해 초에 총서기 호요방을 파면하였다. 이 영향으로 등소평은 국내외에서 명성이 크게 실추되었다.

그러나 등소평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 범한 최대의 과오는 결코 반정신오염운동이나 자산계급 자유화 반대가 아니라 그로부터 몇 년 뒤인 89년 6.4 천안문 민주화운동의 무력 유혈진압이었다. 최근에 출판된 ≪등소평문선(鄧小平文選)≫ 제3권을 보면 등소평이 6.4사건 중에 폭동진압의 결정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6.4사건 이후 등소평은 자신이 직접 선정한 후계자 조자양을 다시 정계에서 끌어내리고 강택민(江澤民)을 총서기로 임명하였다.

등소평의 잔혹한 민주화운동 진압은 중국을 결코 혼란에 빠뜨릴 수 없다는 그의 기본적인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등소평이 독재정치를 통하여 이룩한 정국의 안정은 경제 발전을 위한 기초를 확고히 다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정치개혁의 지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경제개혁의 심화에 더욱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등소평의 명성은 92년 초 '남방순시' 후에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공적과 권위도 남방순시 후에 더욱 확고해졌다.

등소평이 죽은 후에도 강택민을 핵심으로 한 영도그룹은 등소평의 권력을 완벽하게 계승한 이후 모두의 우려를 단숨에 씻어내고 중국경제의 성숙을 향해 순항을 거듭하였다. 각계에서는 등소평 사후 중국공산당 고위층의 새로운 권력 투쟁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강택민은 이붕, 주용기를 중심으로 중국의 권력체제를 확고히 다졌을 뿐만 아니라, 2003년부터는 다시 호금도를 중심으로 한 신세대 영도그룹으로 자연스런 권력 이양을 추진함으로써 지금까지 전반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세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