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흰고양이 검은고양이와 작은대포

지식창고지기 2010. 2. 27. 11:56

<남순강화 당시 모습>

등소평의 딸 등용(鄧榕)은 아버지의 인생행로가 너무나 파란만장하여 그의 일생을 정확하게 써낸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등소평 일생의 불우한 경력과 정계에서의 몇 차례 부침으로 등소평의 몸에는 중국에 대한 희망이 충만할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잔혹한 투쟁의 상흔이 남아있기도 하다. 등소평은 아주 개성적인 인물이다. 그에게는 전기적인 경험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있다. 그에게는 위인의 기백이 있으면서도 감히 사실을 바로 볼 수 없는 기록도 있다. 그에게는 선량한 면이 있는 동시에 인정사정 없는 면도 있다. 아래에 소개한 등소평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등소평의 개성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93년 9월 하순 등소평의 막내딸 등용은 홍콩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매일 황주(黃酒)를 한잔씩 마셨다고 털어놓았다. 음주는 등소평의 몇 안되는 취미 중의 하나였다.(흡연, 카드놀이도 그의 취미였다) 이로 인하여 그가 문혁 중에 강서성의 트랙터공장으로 추방되어 노동개조에 종사하였을 때 그의 부인 탁림(卓琳)은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술을 장만해 주려고 애썼다.

'사인방'이 분쇄된 후에 등소평은 비록 북경에 있었지만 처음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복권된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마오타이주(茅台酒)를 꺼내 단숨에 27잔이나 마셨다고 한다. 중국의 운명과 역사를 바꾼 이 철인 같은 사나이는 당시에 통쾌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 세상 최대의 내란을 단숨에 다 마셔 버리겠다!"

 

여기에서 등소평은 사인방을 극도로 증오하였지만 그가 진정으로 중국의 실권을 장악한 후에 문혁과 사인방을 부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최소한 모택동의 존엄성을 방위하여 그로써 공산당의 영도가 위협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94년 3월 8일 등용은 일본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혁 이후 모두 다 문혁에 대해 극도로 증오하였지만 그때 아버지는 앞장서서 모택동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전반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그분의 이러한 처사는 매우 심원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분은 모택동에 대한 전체 부정이 중국혁명의 근대사와 공산당의 역사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흰고양이 검은고양이(白猫黑猫)

 등소평의 주장에는 '묘론(猫論)'과 '모론(摸論)'이 있는데, '묘론'이란 "흰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不管白猫黑猫, 能到老鼠就是好猫)"라는 것이고, '모론'이란 "돌다리를 더듬어가며 강을 건너야 한다.(摸石頭過河)"라는 것이다. 등소평의 '묘론'은 그가 최후에 실권을 장악한 후에 제기한 것이 아니고 일찍이 60년대 초에 과감하게 주장한 것이다. 문혁시기에 강청(江靑)은 등소평의 '10대죄상'을 규탄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백묘흑묘론'이다.

"1962년 등소평은 국내외의 적들이 나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퍼붓는 상황에서, 돌연히 가정단위 도급생산과 가정단위 영농을 주장하여 '개인 경영 바람(單幹風)'를 불러일으키고, '흰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이것은 등소평이 노골적으로 농촌의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려고 여론을 선동한 것이며, 유소기(劉少奇)와 함께 무모하게 자본주의를 부활시키려고 기도한 대음모이다. "(1962년 중앙서기처 회의상에서의 강청의 발언)

 

등소평은 78년 중국의 운명을 주도한 후에 다시 '백묘흑묘론'으로써 중국의 경제건설을 지휘하였다. 은퇴한 후에도 등소평은 유명한 화가에게 <쌍묘도(雙猫圖)>를 그려 달라고 부탁하여 그것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등소평의 집을 방문하였던 인사의 말에 의하면, 등소평의 집에 걸려 있던 그가 특별히 좋아하였던 <쌍묘도>의 두 마리 고양이 중 한 마리는 온몸이 하얗고 털이 부드러웠으며, 다른 한 마리는 털이 아주 검게 빛났다고 한다. 그리고 두 마리가 앞뒤에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모습과 반짝이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두 눈동자가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쌍묘도>의 윗면에는 "흰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 이 <쌍묘도>는 등소평이 83세 때 '강남의 고양이왕(江南猫王)'이라 불리는 화가가 기증한 것이라고 하는데, 등소평은 이 그림을 얻은 후에 대단히 흡족해 하면서 그것을 벽에 걸어두고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 '작은 대포(小鋼)'라는 별명의 유래

등소평의 본명은 등선성(鄧先聖)으로 뒤에 이름을 등희현(鄧希賢)으로 바꾸었다가 1927년 상해에서 장석(張錫)과 결혼할 때에 비로소 등소평이라 하였다. 사실 등소평은 일생동안 다른 이름을 많이 가졌으며, 다른 이름 외에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도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작은 대포'라는 별명이다.

1925년 6월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등소평은 상해의 노동자 파업 소식을 듣고 그것을 성토하다 프랑스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고 모스크바로 도피하여 중산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때 등소평은 22세였다. 유학시절에 그는 둥근 얼굴, 다부진 체격, 뛰어난 언변으로 동기생들 사이에서 '작은 대포'라 불리었다.

그는 또 성격이 활달하고 조직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청년단 소조장으로 추천되었다. 당시 중산대학에 다니고 있던 장경국(蔣經國)도 이 그룹의 멤버였다. 그로부터 불과 1년 뒤에 등소평은 중국공산당 중앙 비서장을 역임하였다.

 

☞ 천륜의 즐거움

<설날 만찬 때 이미 대학생이 된 외손녀가

곁에서 천진난만하게 포즈를 취한 모습>

비록 등소평이 중국공산당 정계에서 '3전 3기'하는 고초를 겪었지만, 모택동과 달리 그에게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있었다. 어떤 철학자는 그 사람의 마음이 선한지 악한지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고 자식이 자식이 아닌 황실의 냉혹한 관계에 비해서 등소평의 집안에는 화목한 천륜의 즐거움이 가득하였다. 등소평은 어린애를 무척 좋아하였다. 그는 어린애들이 떠드는 소리를 "가장 훌륭한 음악"이라 하며 전혀 귀찮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반신불수의 아들 등박방(鄧樸方)의 몸을 직접 씻겨주면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시키는 아들의 지시에 따르기를 좋아하였다. 유명한 촬영사 여후민(呂厚民)은 "등소평과 박방의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말로써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등소평의 집에서는 2주에 한 번 가족회의를 하였는데, 등소평은 집에 있을 때는 반드시 그 자리에 참석하였고 집에 없을 때도 왕비서를 대리 참석시켰다.

식탁은 전가족이 함께 만날 수 있는 자리이다. 4대가 함께 우르르 식탁에 모여 않을 때는 등소평의 심신이 즐겁고 평온한 시간이었다. 온화한 미소로 가족을 헤아리다 한 명이라도 부족하면 반드시 음식을 남겨두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그가 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트랩을 내려와서 증외손녀를 보자마자 단정하게 서 있던 정부관원들을 한쪽으로 밀치고 혼자 성큼성큼 걸어가 그 아이를 덥썩 안고는 다정하게 뽀뽀를 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고지식한 관료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외국 기자들의 마음을 들끓게 했다.

등소평은 중국 정계에 있었던 정치투쟁을 처리할 때에 모택동 보다 훨씬 더 인정미가 많았다. 그러한 점은 임표와 사인방, 화국봉, 호요방, 조자양 등의 문제를 처리하면서도 잘 나타났다. 통치이념상에서 등소평은 전심전력을 다해 경제를 발전시켜 12억 인구의 빈곤을 구제하였지만, 중국공산당 정권에 대한 도전적인 언행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86년의 반자유화나 89년 학생운동의 무력 진압을 막론하고 등소평은 중국공산당의 영도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대가도 기꺼이 지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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