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고원의 성산 카일라스와 구게왕국 폐허 답사기…
1. 초자연의 신비가 살아 숨쉬는 땅, 티베트 고원 |
티베트 서북부 고원에 솟아 있는 카일라스(Kailas·6,714m)는 라마교와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이 살고 있는 성스러운 산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과 자연과 신이 만나는 그 산을 찾아가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나는 벌써 순례자의 여정을 밟고 있다.
라사에서 카일라스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상상 마을. 가축들이 풀을 뜯고 있는 동안 주민들이 창(티베트산 막걸리)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배경에 무지개가 떴다.
카일라스로 가는 길은 티베트의 제2도시 시가체를 벗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곧 고생길이다. 하지만 고생길과 고행길은 어쩌면 하나로 통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포장된 도로도, 부드러운 음식도, 포근한 잠자리도 포기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걱정거리는 해발 4,000∼5,000m의 고산 지대에서 나타나는 고소증을 어떻게 견디느냐이다.
7월 2일.
송하패스(4,400m)라는 고갯마루를 넘으면서 드디어 티베트 오지로 들어선다. 문명의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하자 주변 풍경들이 새롭게 다가선다. 투명한 공기를 가르며 맑은 종소리가 들려온다. 댕그랑 댕그랑……. 야크의 목에 걸린 방울 소리다. 찻소리에 놀라 귀를 쫑긋거리며 뛰어가는 산토끼의 모습도 신비롭기만 하다. 티베트 고원에도 여름이 찾아 온 것이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에도 푸른 기가 번져 가고, 야크 무리와 양떼들은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 부지런히 풀을 뜯는다.
서쪽에서 바라본 카일라스.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와 힌두교의 성산으로 산자락을 도는 순례길이 있고, 정상 등산은 종교적으로 금지돼 있다.
2. 신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마다 타루초 나부켜 |
마을 사람들은 가축을 돌보면서 창이라는 술을 마시고 있다. 그들은 나를 불러 창을 마셔 보라고 권한다. 잔이 비자 다시 채워 주면서 더 마시기를 권한다. 손을 내저으며 사양한다. 숨이 가빠 온다. 고소증 때문이리라. 마을 주민들이 따라 주는 버터 차를 미시니 가쁜 숨이 가라앉는다.
인더스강 최상류를 이루고 있는 자따부리. 부리는 골짜기를 뜻하며, 자따는 이곳 현의 이름이다. 이 계곡에 한 때 불교왕국을 이룬 구게왕국의 폐허가 있다.
바로 맞은 편의 민둥산에는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다. 여름철이라 날씨 변화가 심한 것이다. 바로 앞에서는 무지개가 뜬다. 고소증 때문에 내가 환상을 본 것은 아닌가. 고도가 4,600m나 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무지개를 쫓아 뛰어다니다가 끝내는 풀밭에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 쉬어야만 했다. 당나귀를 몰던 소년이 걱정스러운지 가만히 내려다본다.
7월 3일.
티베트에는 고갯마루마다 어김없이 서낭당 같은 곳이 있어 오색 깃발과 경문이 씌어진 천(타루초)이 걸려 있다. 이곳 사람들은 신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마다 이런 제단을 만들어 놓고 길을 떠날 때마다 기도를 올린다.
다시 출발이다. 지형이 사막으로 바뀌어 간다. 둥그스름한 민둥산들이 늙은 어머니를 닮아 있다. 오랜 세월 서 있기만 하던 산이 허물어져 모래로 변하고 있다.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오랜만에 먼 여행을 떠나려 한다.
라사에서 약 270km 떨어진 상상 마을 위로 먹장 구름이 내리누르고 있다. 모래 바람이 휘몰아치는 쫑바 마을을 만난다. 사원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모래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고, 빈집들은 모래에 묻히고 있다. 그래도 물은 마르지 않아 동네 가운데 우물에는 맑은 물이 솟아오른다.
이 마을의 한 집에서 묵어 가기로 한다. 방이 모자라 이 집 식구들이 사용하는 안방에서 눈을 붙이기로 한다. 붙박이 침대가 '디귿'자형으로 벽에 붙어 있고, 가운데 난로 위에는 야크 고기가 끓고 있다. 우리한테 방을 빼앗긴 이 집 식구들은 바깥에서 불을 지핀 채 야크 고기와 창을 마시며 밤이 이슥토록 떠들어댄다.
7월 4일.
쫑바를 벗어나자 앞서가던 트럭 3대가 모래에 빠져 길을 막고 있다. 우리가 탄 랜드크루즈는 바람에 다져진 길을 돌아 빠져나왔지만, 기름과 부식을 실은 트럭은 모래에 빠져 헤매고 있다. 우리의 트럭에 실린 긴 나무를 이용해 부식 트럭을 구해 내고, 다른 3대의 트럭도 덤으로 구해 주고 길을 떠난다.
파양(4,600m) 마을에서 잠시 쉬면서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떠난다. 큰 내가 있는 곳에서는 다리 공사가 한창이다. 큰물이라도 지면 어쩌나 하고 돌아올 길이 걱정이다. 드문드문 나타나는 유목민들, 별로 달라질 것 없는 풍경들이 지루하게 펼쳐진다. 왼쪽으로 야생마 두 마리가 광활한 대지를 내달리기 시작한다. 저 야생마의 자유로움에 눈이 부시다. 차를 따라 계속 달리던 야생마도 사라지고 다시 적막한 풍경만 이어질 뿐이다.
작은 개울이 흐르고 서쪽으로 구릉이 막혀 있는 곳에서 야영을 하기로 한다. 불에 그을린 돌멩이들이 있는 걸로 보아 다른 여행객들도 이곳에서 묵어 갔나 보다.
3. 산자락 13바퀴 돌아야 오를 수 있는 성산 |
7월 5일.
오늘은 카일라스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아침 일찍 출발한다. 이곳에서 카일라스까지 230여km. 서쪽으로 갈수록 길이 험해지고 있다. 황량한 풍경 사이로 순례자들이 바람처럼 지나가고 있다. 야영지를 출발한 지 4시간쯤 지났을 때 왼쪽으로 설산이 그 모습을 보여 준다. 카일라스에 점점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작은 언덕 하나를 넘자 동쪽으로 멀리 카일라스 봉우리가 하얗게 빛나고 있다. 남쪽으로 나무나니봉(7,694m)이, 그리고 그 아래로 마나사로바르 호수가 길게 드러누워 있다. 드디어 신의 땅에 들어온 것이다.
짐을 실은 야크 무리가 상상 마을로 접근하고 있다. 야크는 티베트의 주요 운송수단이자 우유·고기·가죽을 제공해 주는 주요한 가축이다.
다르첸 마을(4,600m)은 카일라스를 향해 먼길을 온 사람들에게는 반갑고 소중한 마을이다. 카일라스에서 녹아 내리는 물이 이루는 내를 사이에 두고 여행자 숙소와 순례자들의 천막이 마주보고 있다.
아침 일찍 카일라스 산쪽으로 난 가파를 길을 따라 올라본다. 순례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한 승려가 묵묵히 산길을 오르고 있다. 고갯마루에 오르면 카일라스가 보일 듯싶어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나 마루에 올라도 카일라스의 자태는 내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 주변의 산들이 제왕의 근위병처럼 카일라스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경문통을 돌리며 순례하고 있는 한 카일라스 순례자. 고갯마루에는 어김없이 수많은 타루초가 걸려 있고 가람들이 벗어두고 간 옷가지들이 언덕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안내를 맡은 사람이 올라와 이곳은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전한다. 카일라스를 13바퀴 이상 돈 사람만 오를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코라(산을 도는 불교 의식)의 길은 저 산아래 옆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이 산을 한 바퀴 도는 코스는 제일 짧은 거리가 52km이다. 고도는 4,700~5,600m. 이곳 사람들이 보통 한 바퀴 도는 데 사흘이 걸린다. 이번에는 이곳까지 무사히 왔으니 코라 도는 일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바위에 음각된 경문들(쯩바 마을). 카일라스를 뒤로하고 동쪽으로는 깡디스 산맥. 서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이 만든 고원 평지를 우리가 탄 차가 시원스레 달려간다. 2시간 30여분을 달려 멘실이라는 곳에서 왼쪽으로 길을 꺾는다. 이곳 사람들이 카일라스만큼이나 신성시하는 곳이 있어 그곳에서 오늘밤 묵어 가기로 한다.
따따부리(따따는 지명이고 부리는 계곡이란 뜻)라는 작은 강이 흐르는 곳에 사원이 있고 뒤쪽으로 나즈막한 산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곳이다. 이 사원을 중심으로 산을 돌아 순례하는 코스가 있다. 인도의 유명한 성자 파드마 샴바바(Padma sambhava)도 이곳에서 오랫동안 수도했다고 한다. 강 주변으로 노상 온천이 솟구치고 있어 야영하면서 하룻밤 묵어 가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양손에 신발을 끼워 오체투지의 예를 하면서 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강 언덕 곳곳에는 수도를 위한 토둘이 눈에 띈다. 날이 저물자 순례자들은 하나둘 돌아가고 강물만이 혼자서 경전을 외고 있다. 저녁을 일찍 먹고 아무도 없는 순례의 길을 따라 걸어 본다. 가파른 언덕에는 어김없이 타루초가 걸려 있다. 이곳을 지날 때는 엎드려서 지나야 한다.
4. 1만명이 거주했던 궁성의 비밀 |
7월 7일.
평지를 달리던 차가 푸석푸석한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산길이다. 돌아오는 길에 눈비라도 내린다면…. 아찔한 생각이 든다. 지요한씨가 차고 있는 고도계가 숨가쁘게 5,000m을 넘어서고 있다. 이 부근에서 제일 높다는 룽카라산을 넘는 것 같다.
쯩바에서 파양에 이르는 황무지에 방목한 야크 무리. 황무지 모래사막에서 트럭은 대부분 바퀴가 빠져 고생한다.
산을 돌아 골짜기로 내려서자 소금기와 석회적으로 골짜기가 하얗다. 먼 옛날 티베트가 바다였다는 걸 입증하고 있다. 이곳은 죽음의 골짜기라 부른다. 인도쪽 히말라야 산맥 아래로 그랜드캐년을 닮은 지형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저 협곡 어디쯤에 오늘 가야 할 구게왕국 유적이 있는 것일까.
드디어 차가 협곡 아래로 내려서고 있다. 골골이 패인 황토산이 만들어 놓은 계곡에 들어선다. 계곡은 말 그대로 수만 년에 걸쳐 자연이 빚어낸 예술품이다. 거대한 스투파를 닮은 형상이다. 룩소르 신전에서 본 석상이 이곳에도 있다. 그리수 파르테논 신전들이 수없이 서 있는 형상이기도 하다. 외계의 어느 행성에 착륙한 느낌도 든다. 저 멀리 발 아래로 강이 보이면서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드디어 자따현 소재지에 다 온 것이다. 이런 협곡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백양나무 가로수가 무성하다. 정말 오랜만에 나무를 본다. 이곳에서 구게왕국 유적지까지는 20km 남짓. 해지기 전에는 도착해야 될 텐데…. 여행 허가를 받기 위해 현청에서 잠시 시간을 지체한다. 마을 입구에서 올려다본 유적은 주변의 황토산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구게왕국 정상에서 내려다본 무너진 유적들. 한때 1만명이 거주했다는 거대한 궁성이었다. 언덕길을 올라서자 불탑이 나타나고 무수한 토굴로 이루어진 토성이 버티고 있다.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해 만든 왕궁이다. 산 정상에는 왕이 여름에 사용했다는 궁전과 사원이 있다. 겨울이 되면 왕은 지하에 있는 궁전에서 보냈다고 한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땅속으로 연결되어 있다. 입구에 있는 백궁과 홍궁에는 인도 사람들이 그린 벽화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당시 이 산성 안에는 1만 명 이상이 살았다고 한다. 자연이 황폐해지면 인간의 정신 세계는 더 깊어진다고 했던가. 이 척박한 땅에서 700여 년동안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던 구게 왕국. 그러나 왕궁 옆으로 흐르던 강물은 오래 전에 말라 버렸고, 왕궁 앞에 있었다는 큰 호수도 그 흔적을 찾을 길 없다. 다만 앞쪽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인더스강만이 기나긴 시간을 품고 있다.
오체투지례로사원을 돌고 있는 순례자들(자따부리).
7월 8일.
카일라스 성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드는 성스러운 호수 마나사로바르(수면해발 4,588m)를 만난다. 티벳 사람들은 이 호수를 마팡융초라 부른다. 초는 호수라는 뜻이고, 마팡은 누구에게도 정복당하지 않는 존엄한 존재라는 뜻이다. 이 호수에서 4개의 강이 발원해 인도 대륙으로 흐른다.
이곳에도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호수의 물로 몸을 씻고 호수 주위를 돈다. 호수의 둘레는 90km. 한 번 돌면 카일라스를 도는 것처럼 속세에서 지은 죄가 소멸된다고 믿는다. 입구에 있는 '추꾸스' 사원에서 호수를 내려다본다.
카일라스 산자락을 배경으로 검은 점 몇 개가 다가오고 있다. 등짐에 하얀 깃발을 꽂은 채 거대한 공간 속으로부터 묵묵히 걸어 나오는 사람들. 카일라스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고행자의 모습이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이 고행의 길을 택했을까. 신을 향한 순례의 길인가. 유목민 특유의 방랑벽 때문인가.
구게왕국 폐허. 폐허 넘어로 인도로 넘어서는 산릉들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내 안에 꿈틀대는 방랑의 실체가 순례자들을 뒤따라가게 한다. 그들을 따라 한참을 걸어 본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물어 본다. 너는 무엇을 위해 이곳 티베트땅을 떠돌고 있는가. 순례자들은 점점이 멀어져 간다. 이 고원에 나는 혼자 서 있고…….
카일라스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례자들. 하얀 깃발은 순례자 표시다.
카일라스 산자락을 배경으로 우리의 차가 돌아오고 있다. 다음 행성지로 떠날 수 있는 기름과 식량,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싣고서…….
※ 본 내용의 글과 그림은 아래의 자료 가운데의 일부 내용을 수정·편집하여 정리한 것임을 밝혀 둠.
- 이해선, '인간과 자연과 신이 만나는 불가사의한 고원; 티베트 고원의 성산 카일라스와 구게 왕국 폐허 답사기'('월간 산', 조선일보사, 1997, 10월호, pp..1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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