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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인도불교 전래와 수용

지식창고지기 2010. 3. 30. 09:08

중국의 인도불교 전래와 수용

 

 

불교는 2500여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인도를 벗어나 이란, 중앙아시아, 중국, 티벳, 몽고,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 등의 지역에 전파되었다. 원시불교의 이론 가운데 가장 중심은 무아설이다. 자아라는 개념은 불변적 주체로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근원 의식이다. 불교는 자아의식이 허구이며 자아의식을 갖는 순간 세계는 주체와 대상으로 나누어지고, 정신의 자기 분열을 구조화시키기 때문에 정신을 자각적 방향으로 유도하지 못하게 하므로 이 같은 자아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무아설의 의미이다. 한편 모든 것을 부정하고 판단을 유보하는 불교 논법은 실제 세계가 언어 세계와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 논법은 언어의 모호성과 사유의 불투명성을 고발하고 나아가 논리형식 같은 사유방식을 고정 틀로 삼아 외부세계를 판단하는 우리의 안이한 세계인식이 왜곡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불교의 기본적 사유방식으로 인연연기설 혹은 인과응보설이 있으며, 인과응보설을 사람의 행위에 적용할 때 업설이라 한다. 업설은 모든 행동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필연적으로 지배받는다는 것이다. 더 근원적으로 말하면 행동을 일으키는 주체의 마음이라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따라서 삶은 철저히 마음의 지배 아래에 있으며 그 결과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따라서 업설은 숙명론이 아니라 자유의지와 노력이 헛되지 않음을 보증하는 이론이다. 또한 윤회전생설은 고대 인도의 전통사상이었는데 전통 윤회사상이 선악업보에 의한 생명의 재탄생을 주장하여 도덕적 삶을 권고한 것이라면, 불교의 윤회전생설은 업보에 의한 삶을 고통으로 진단하고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강조한 것이다.

 

인도불교의 역사는 원시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원시불교는 석가가 활동하던 시기와 입멸 후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교단을 만들어 석가의 가르침대로 이어가고자 하였던 불교를 말한다. 부파불교는 아쇼카왕(B.C, 268-232)의 불교지원정책에 힘입어 인도 전역에 불교가 흥성함에 따라 여러 분파로 분열된 시기이다. 부파불교는 석가의 가르침을 경(經)과 율(律)로 문자화시키고, 그 속에 담긴 내용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던 이론불교시대이다. 대승불교는 출가자 위주의 부파불교를 벗어나려는 재가신자들의 불교개혁운동이며, 석가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부처 중심의 운동이다. 재가신자들 스스로 해탈의 주체, 즉 보살이 될 수 있다는 자각적 실천운동이기도 했다. 중관학파로 대표되는 초기 대승불교는 인간정신을 바깥 세계처럼 실체들의 관계로 파악하려는 부파불교의 관점을 바꾸어 인간의 정신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했다. 후기 대승불교인 밀교는 인간의 감각과 성적 생리적 요소를 긍정하고 이를 통하여 초월적 존재와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고 보았지만 유교적 윤리에 젖어 있는 중국에서 좌도밀교(左道密敎)라 비판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교에 의한 중국문화의 변용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의 도전에 응하여 계속적인 자기변화를 겪어 가는 문화양상이었다. 양 문화 사이에는 언어와 사유방식의 차이가 존재하며, 중국 사유가 현세주의적이라면, 인도 사유는 정신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두 문화의 격차를 이어준 다리는 도가사상이었고, 다리를 건널 수 있도록 한 상황은 변방민족이 북중국을 지배한 일이었다. 첫 단계는 후한 초기 불교의 전파와 한 제국의 멸망부터 위진시대까지이며, 둘째 단계는 변방민족이 북중국을 지배하던 남북조시대(317~589)이다. 앞 시기를 중국불교의 준비기라고 하고 뒤의 시기를 토착화 시기라고 하기도 한다.

 

불경 번역의 경우 초기에는 ‘다르마(dharma)’를 도가사상의 ‘도(道)’로, 불교의 ‘니르바나(涅槃, nirvana)’을 ‘무위(無爲)’로 번역한 것처럼 중국 토착 용어를 단편적으로 차용한 의탁불교(依託佛敎)였다. 그 뒤 번역 용어와 개념들 사이의 체계와 조직을 상호 비교한 뒤 ‘개념 짝짓기’를 광범위하게 시도한 격의불교(格義佛敎) 단계가 이어진다.

 

중국불교의 토착화 단계인 남북조시대를 보면 남중국의 경우 혜원, 지둔 등이 불교를 그 지역 사정에 맞게 교리적인 쇄신을 많이 했다. 특히 지둔은 ‘리(理)’ 개념에 불교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불교만이 아니라 성리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남중국 불교는 도교 교단과 경쟁하면서 민중에게 파고드는 민중불교의 성격을 보였다. 이와 달리 북중국 불교는 변방 민족들이 지배하면서 많은 살육이 이어지는 속에서 가해자의 회한을 무마시키고 피해자의 비통함을 달래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급격히 성장한 불교신앙과 교단세력은 동시에 북중국 통치자의 의혹을 일으켜 혹독한 폐불사건을 겪는다. 이 같은 폐불사건은 오히려 ‘지금’ ‘여기’에 사는 자신들의 삶과 정신에 지주가 되는 불교를 만들어냈다. 북중국 불교의 일반적 특징이 강력한 국가불교라는 점과 교학적 이론추구보다는 선관 위주의 실천적이고 정신적인 문제를 추구한 점에 있다면, 남중국 불교는 귀족불교이며 학문불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