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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할 때에 머무는 임시 처소이자 수원 신읍치의 관아로서 건립되었다.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이장하고 그곳에 있던 수원부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함에 따라, 수원부의 관아를 옮겨짓고 행궁의 역할을 겸하게 하였다. 1793년(정조 17)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이를 화성 행궁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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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행궁은 여러 차례의 증축을 통해 경복궁 다음가는 궁이라 할 정도의 규모와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그것은 현륭원 천봉 이후 11년 간 12차에 걸쳐 화성에 행차할 만큼 정조의 능행이 정례화 되었고 이때마다 화성 행궁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성이 정조의 특별한 포부를 담은 도시였다는 점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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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신도시 건설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화성 신도시 건설은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상업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고자 하는 정조의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사업으로 강력한 왕권 구축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아울러 정조는 세자가 15세가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어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화성에 머물려고 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각종 문헌에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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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화성과 행궁에 대한 정조의 계획들은 모두 미완의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1801년(순조 1) 행궁 옆에 정조의 영정을 모시는 화령전(華寧殿)이 건립되었고, 이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현륭원과 정조의 능인 건릉(建陵)에 전배하고 화령전에 참배하는 원행(園行)을 계속하면서 화성 행궁은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행궁으로서의 기능을 이어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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