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72.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중국-청, 프전쟁과 청일전쟁(1894년)

지식창고지기 2010. 4. 24. 09:47

72.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중국-청, 프전쟁과 청일전쟁(1894년)

 


  몽고제국을 제외하면 청나라는 중국대륙을 지배한 세력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다. 그들은 그들의 근거지인 만주와 중국대륙은 직접 지배했으며, 정복하여 굴복시킨 주변 나라들은 직접지배 방식이 아닌 조공관계의 의한 간접지배 방식을 택했다. 조공국의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월남과 한반도 조선이었다.


  서양세력들은 해외 식민지 개척에 핏발을 세우고 있었고, 종이호랑이로 무력해져가는 청제국의 드넓은 영토나 조공국은 서양세력이 노리는 군침나는 먹이감이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는 중국대륙을 지키기도 힘겨웠으며, 조공국들은 하나씩하나씩 외국의 손에 넘어갔다.


  우선 월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로 넘어가게 된다. 19세기 중반의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하는 제2제정인데, 그는 프랑스 국내문제에서는 무능하면서도 외국에 대한 침략을 매우 빈번하게 했던 인물이다. 이때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다. 당시 월남은 완조의 이배하에 있었으며 청나라와는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침입하여 1862년 베트남의 왕조인 완조와 사이공 조약을 맺고, 야금야금 땅을 먹어 들어가 1873년경에는 통킹 지방의 송코이 강 하류 델타 지대를 거쳐하노이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완조로 하여금 청조에 대한 조공관계를 부인하도록 했다. 이것은 베트남을 프랑스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의도였다.


  이때 국경지대에서는 유영복이라는 사람이 흑기군이라는 사병을 거느리고 중국의 운남지방과 배트남 사이에서 통행세를 받아 먹으면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완조의 원조를 받아 베트남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군대를 공격했으며, 1881년 하노이로 근거를 옮겼다. 그러자 프랑스에서는 이 세력을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1882년 하노이를 점령했다.


  하노이가 점령되자 청을 월남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프랑스 군을 밀어내기 위해 운남, 광서 지역의 청군을 베트남 북쪽으로, 남양함대를 통킹 만으로 이동시켜 프랑스와 한판 싸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청의 움직임에 아랑곳하지 않고 월남에 압력을 넣어 84년에 앞서의 조약을 수정하여 새로운 조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실질적으로 프랑스가 월남을 독점지배한다는 것이었다.


  84년 8월 프랑스는 월남으로부터 북상하여 대만의 포대를 공격하고 이어 복건성의 복건함대를 대파했다. 이때 중국의 강력한 이홍장의 북양함대는 이 전투에 가담하지 않은 채 뒷짐을 지고 있었다. 청나라는 프랑스의 도발행위에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중국인들의 프랑스에 대한 감정도 격화되어 홍콩이나 광동의 곳곳에서 프랑스 교회나 프랑스 삼품을 불질렸다. 프랑스는 대만에 공격을 가해, 기륭을 공격하고 대만을 봉쇄했으며, 85년에는 팽호도를 점령했다.


  전세가 중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그 틈에 청 정부 내에서 실권을 쥐고 있던 서태후는 관리들 중 주전론자들보다는 주화론자들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프랑스와의 협상을 원했다. 양국은 결국 1885년에 '파리의전서'에 합의했고 천진조약이 맺어졌다. 청조는 월만에 대한 종주권은 완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 조약으로 월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편입되고 말았다.


  조선 역시 월남과 비슷한 형태로 청에 조공을 바치는 조공국이었다. 1860년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까지는 외국과의 정식 국교를 열지 않는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조선에 압력을 가해 문을 열게 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그들이 미국에 당한 방법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했다. 해안측량을 한다는 명목으로 '운요 호'가 조선의 해안을 오르내리자 조선 수비대가 이 배를 공격했으며, 일본은 그것을 빌미로 조선에 압력을 가해문을 열게 했다. 이른바 1876년의 '강화도조약'이다.


  그 뒤로 여러 나라들이 조선과 정식으로 조약을 맺어 조선에서의 이권 다툼에 끼어들었다. 일본은 조선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일부 세력에게 군사력을 지원해주기도 했으나 청나라가 행사하는 종주권을 완전히 뺏지는 못했다.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고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청을 격파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마침내 그 기회는 1894년에 왔다.


  1894년 2월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조선정부는 도저히 자력으로는 동학농민군을 당해낼 수가 없게 되자 청나라에 군대파견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조선에 약 3천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면서 일본에게 통보했다. 이미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사이에 맺어진 천진조약에 의하면 두 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동시에 물러나고 어느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될 경우 상대방에게 통보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일본이 이를 놓칠 리 없었고 즉시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두 외국군대가 들어오게 되자 동학농민군측에서는 원치 않는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정부와 협상, 외국군대를 내보내고 개혁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조건으로 점령하고 잇던 전주성에서 농민군을 해산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두 나라에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청나라에게 조선의 내정개혁에 개입하자는 제안을 내놓고는 청이 가담하지 않으면 일본 단독으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청의 원세개는 우선 철병을 주장했으나 일본은 결코 물러날 의사가 없었다.


  마침내 일본은 속셈을 드러내어 청에게 조선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공격하겠다는 뜻을 분명이 했다. 1894년 7월 25일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인천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대를 공격했다. 육지에서는 충청도 성환에서 청, 일군이 맞부딪쳐 싸웠으나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황해에서는 양국의 함대가 대격전을 벌인 결과 청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홍장이 수십 년간 애써 육성했던 막강 북양함대는 일본해군의 공격에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참패하고 말았다.


  결국 청과 일본사이에 배상금 지불, 조선의 독립, 대만과 요동의 할양 등의 내용으로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졌다. 조선이 독립국임을 밝힌 이 조약을 조선이 더 이상 청의 속국이 아님을 표현하는 다른 형식의 말이었고, 결국 일본이 조선을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을 청이 인정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