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74. 서양귀신들을 몰아내고 청조를 지키자-의화단 운동(1899~1900년)

지식창고지기 2010. 4. 24. 09:48

74. 서양귀신들을 몰아내고 청조를 지키자-의화단 운동(1899~1900년)

 


  아편전쟁 이후 청은 계속 외국의 강압에 의해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으며 중국의 이권은 잇따라 강대국의 손으로 넘어갔다. 청조에 의한 개혁정책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어려운 백성들의 생활은 개선될 가능성을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가뭄과 기근 또는 황하의 범람과 같은 자연재해가 이어졌다.


  서양세력의 침략행위는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특히 서양세력의 침략과 함께 들어온 크리스트교는 침략자의 종교로 인식되어 상당수의 중국인들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선교사의 살해를 이유로 프랑스 군대가 영국군대와 함께 중국을 공격했던 제2차 아편전쟁은 크리스트교에 대한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크리스트교의 활동은 곧 침략자들의 활동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여 백성들의 반감을 사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반감은 조직적인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이것을 '구교운동'이라고 한다. 이 운동은 유교질서의 유지를 원하는 보수적인 관료와 지방의 실력자인 향신층들이 주도했다. 그리고 그 비밀결사조직도 주도세력 중 하나였다. 중국에서의 종교적인 비밀결사조직의 뿌리는 매우 깊은데, 미신적인 종교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이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드러나게 된 것은 청일전쟁 이후 독일, 러시아, 영국, 프랑스가 조차지를 획득하고 일본이 만주에서 군사활동을 전개하려던 1890년대 말이었다. 이들은 지주들이나 외국세력에 굴복하는 태도를 보이는 관리들을 공격했으며, 서양 선교사나 중국인 크리스트 교도를 죽이거나 외국공관을 습격했다.


  1898년 사천성 동부지역에서 6천여 명의 무리를 끌고 교회와 교민들의 토지 및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활동을 했던 여동신이라는한 구교운동 지도자는 다음과 같이 그들의 뜻을 밝히고 있다.


  "양인들이 통상무역과 야소의 전교를 이용하여 우리 농민들의 생계와 의식수단을 빼앗았으며, 아편으로 우리 땅을 더럽혔으려...,조정을 모욕하고 우리 도시를 빼앗고...상해, 대만을 빼앗았다... 이제 우리들은 의롭게 일어서서 국가의 수치를 씻고자 한다"


  이러한 구교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의화단운동으로, 당시에는 권비의 난이라고 했다. 이는 그들이 권법을 익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권법을 수련했으며, 무술이 깊어지면 총알을 피할 수도 있고 하늘을 날 수도 있다고 믿었다. 이 무리들 안에는 여자들도 있었으며, 그들은 부채를 흔들며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식으로 무협지나 영화에 표현되기도 한다. 그들은 예수에 대항하여 옥황상제에서부터 손오공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전통신앙에서 여러 숭배대상을 찾아냈다.


  의화단 세력은 1895년경부터 산동성 서남부를 중심으로 산동, 강소, 하남, 안휘성 등을 무대로 활동했다. 1897년 의화단 세력은 중심부를 산동성 서북 및 하북성 남부로 옮기고 세력도 보강하여 농촌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으며 조직을 강화했다. 주로 여기에 가담한 백성들은 가난한 농민, 일자리가 없이 떠도는 사람들, 수공업자, 항구 등에서 일하는 운수 노동자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하나의 조직체계 안에서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각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여러 세력들이 있었다.


  청조의 관리들 내부에서는 이러한 의화단이 활동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가지지 못했다. 보수적이고 외국을 배척하는 입장에 있는 강경파들은 의화단을 지지하는 쪽이었고, 서양세력과 연결을 가지면서 그들의 힘을 빌어 개혁을 하고자 했던 양무파들은 의화단의 활동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했다. 청조의 군사 실력자인 원세개는 의화단을 공격했고, 독일인 장교에 의해 훈련된 정예부대가 의화단 공격에 앞장섰다.


  1900년 5월 의화단 세력은 천진과 북경에 들어가 모든 외국세력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하면서 외국공사관이 모여 있는 지역을 호위했다. 그 당시의 의화단 세력은 약 2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등의 서양세력들은 청조에 2개월 이내에 의화단을 진압할 것을 요구하고 청조가 진압하지 못한다면 서양 연합군을 결성하여 이를 진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청조에서는 의화단을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번번이 의화단에 패했다.


  특히 당시 청조의 실권자인 서태후는 의화단의 진압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서양 서러 나라들은 서태후가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야 하며 그녀에 의해서 폐위되었던 광서제가 복위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전했다. 이에 서태후는 강력히 반발, 의화난을 북경에 불러들여 활동하게 하는 한편, 열강에 선전포고를 했다. 북경에 들어온 의화난의 거리를 떼지어 다니면서 서양과 관계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파괴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들은 공동으로 청나라에 군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여기에 일본, 이탈리아, 독일 등이 가담한 8개국 연합군이 6월 17일 천진에 공격해 들어왔다. 뒤를 이어 그들이 북겨을 공격해들어오자 당황한 서태후는 재빨리 외국 공사관에 "의화단은 발란세력이고 이를 진압한다는 것이 청의 입장이다. 그런데 처리를 잘못하여 외국공사와 선교사, 크리스트 교 신도들을 보호하지 못했으므로 책임지고 스스로 힘으로 의화단을 진압하겠다"는 통보를 했다. 그러나 서양 연합세력은 8우  북경을 점령하고 북경은 제국주의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파괴, 약탈당했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서안으로 피난갔다.


  1901년 9월 청은 제국주의 침략세력과 '북경 의정서'를 맺었다. 이 조약은 회세에 반대하는 관리들의 처형, 외세배척운동에 대한 철저한 탄압, 중국 포대의 철거, 북경의 공사관이나 교통의 요지에 외국군사 주둔 허용, 배상금의 지불 등의 내용이었다. 북경 의정서에 이르러 청은 더 이상 자력으로 중국을 통치할 수 있는 위치에 머무르지 못하게 되었고,  중국은 어느 한 나라의 확실한 식민지가 되지는 않았으나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국권이 박탈된 반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