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73. 백일천하로 끝난 개혁파의 꿈-변법자강운동(1898년)

지식창고지기 2010. 4. 24. 09:48

73. 백일천하로 끝난 개혁파의 꿈-변법자강운동(1898년)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등 세계의 대부분의 침략세력들이 중국에 들어와 이권을 나누어가 졌고, 중국은 외국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외국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힘을 키우려 했던 양무운동도 청일전쟁의 패배로 성공하지 못했음이 드러났다.


  중국의 이권은 계속 외국에게 넘어갔다. 중국 남부지방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은 프랑스가 광산개발, 철도건설 등의 이권을 가져갔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후 청은 러시아에 접근, 삼국간섭을 끌어내 일본의 압력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러시아 역시 만주지역 철도건설 등의 이권을 챙겼으며, 아울러 여순과 대련을 강압적으로 조차했다. 독일은 산동을 중국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1898년경에 동북지역은 러시아, 양자강 유역은 영국, 강남의 광동, 광서, 운남은 프랑스, 복건은 일본, 산동은 독일이 각가 세력권으로 확보했다.


  서태후와 이홍장 등이 중심이 되어 수행한 청일전쟁의 패배는 상대적으로 그 반대파라고 할 수 있는 광서제, 장지동 등 황제파의 발언권을 높일 수 있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홍장에 의해 주도되었던 양무운동의 한계도 역시 청일전쟁의 패배로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제 지배층 내부에서는 좀더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한 움직임을 주도했던 대표적 인물이 강유위, 양계초 등이었다.


  강유위는 공자의 사상을 새롭게 해석하여 자신의 개혁사상을 합리화시켰다. 즉 "옛것에 비추어 오늘의 제도를 고친다"는 말을 빌어온 것이다. 그는 또한 (대동서)라는 책 속에서 모든 인류가 평등한 조건으로 살 수 있는 이상사회를 구상하기도 했다. 그런 사회가 바로 대동사회라는 것이다. 1895년 북경에서 과거시험이 있었고 강유위는 이 시험에서 합격, 진사가 되어 관료의 길에 들어섰다.


  관료의 길에 들어선 강유위는 본격적으로 그의 생각을 실천해나갔다. 강유의를 중심으로 하는 변법 개혁파들은 (만국공보)를 간행, 자본주의 체제의 도입, 입헌정치의 실시, 유럽의 학술과 교육의 도입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북경에서의 변법파의 활동은 서태후가 중심이 된 수구파들의 반격에 의해 저지되었고, 강유위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상해로 잠시 피했다. 상해에서 그는 황준헌, 장건 같은 당대의 개혁론자들과 어울려 중국의 개혁정책을 모색했다. 변법파의 개혁안은 북경보다는 일부 지방에서 더욱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각 지역의 실력자들은 그런 움직임을 저지했다.


  변법파들의 개혁안이 정책적으로 시행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된 것은 독일이 교주만을 점령한 사건이 발생했던 1897년 말 이후였다. 강유위는 황제에게 다섯 번째 상서를 올려 법과 제도를 고쳐나가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법을 다시 한번 제시했다. 당시 황제인 광서제는 강유위 일파의 개혁안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다. 1898년 제도의 개혁 들을 주로 하는 개혁세력들과 함께 제도를 새롭게 한다는 의미 '변법'을 추진하겟다는 선언을 했다. 1898년의 이 개혁을 제도의 개혁을 통해서 나라를 강하게 만든다는 의미로 '변법자강운동'이라고 하기도 하며, 무술년에 있었다고 하여 '무술개혁'이라고 하기도 하낟. 그해 6월 강유위, 담사동, 황준헌, 양계초 등이 관서제의 부름을 받았다.


  광서제는 이러한 개혁세력들에 의해 구상된 정책들을 정리하여 100여 항목이 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 몇 가지 중심적인 개혁내용은 과거제 개혁, 새로운 학교제도의 도입, 신문, 잡지 발행, 인재등용, 농공상업 진흥, 우편사업, 육해군의 근대화 등이다.


  광서제는 변법파의 활동에 제약이 되는 고위관리들을 해임시켰다. 그들은 대부분 서태후에 충성하는 자들이었다. 9월에는 이홍장이 총리아문대신의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러한 광서제의 과감한 조치는 서태후와 그의 일파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서태후는 자기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군사 지휘관들에게 명령하여 군대를 이동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은 광서제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광서제는 마침내 당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인 원세개에게 기대고자 했다. 개혁파 담사동은 원세개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서태후가 머물고 있는 이화원을 호위하여 서태후파의 활동은 제한시켜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약삭빠르고 야심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서태후측과도 긴밀하게 관게를 맺고 있었다.


  개혁파들의 계획은 고스란히 서태후에게 보고되었다. 9월 21일 아침 일찍 서태후는 광세제의 침실로 찾아와 모든 왕실의 일과 국가의 정사를 자신이 담당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황제 광서제는 유폐되었고, 개혁파들은 숙청당했다. 강유위 등 몇 명은 보수파의 공격을 간신히 피해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으며 당사동 등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른바 무술정변이다. 무술개혁이 시작된 지 103일 만에 개혁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