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실현되지 못한 공화국 황제의 꿈-원세개의 중국 통치(1912--1916년)
1911년 청나라 타도를 외치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실질적인 군사력을 가지지 못한 총나라로서는 원세개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원세개는 청조의 내각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원래 이홍장의 밑에서 성장했으며, 이홍장이 죽은 후 그뒤를 이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곧 북양군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가 점차 쇠약해지는것과 반대로 그는 독자적인 군대를 더욱 강화해나갔다. 원세개는 청의 황제에 충성을 바치는 충성스런 신하는 아니었다. 도리어 그는 황제의 지위를 넘보고 있었다.
원세개는 화평을 내세우면서 혁명세력을 공겨했다. 그의 군대는 신해혁명의 핵심지역 중의 하나인 한구와 한양을 점령했다. 원세개의 공격으로 혁명군이 밀리고 있었으나 혁명의 불길은 전국을 휩쓸었고, 원세개는 이런 불길을 그의 군사력만으로는 누를 수 없음을 알았다. 혁명세력도 신식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원세개를 완전히 격퇴할 수 없었다. 결국 원세개와 혁명군 사이에 "청조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조건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혁명군은 청조를 폐지하는 성과를 얻었고 원세개는 새로운 정부의 총통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1912년 원세개는 임시총통인 손문이 사임한 후 총통 자리에 앉았다.
남경의 중화민국 정부 총통에 취임한 원세개는 서서히 그의 야심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의 야심은 황제였다. 그는 중화민국의 의회활동을 막았다. 혁명파의 중심인물로서 의회를 통해 국가를 이끌어 나가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송교인이 암살되자 혁명파는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원세개에 대항하는 새로운 싸움을 벌여야 함을 감지했다.
원세개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던 일부 성의 도독들이 중심이 되어 1913년 7월 원세개 타도를 위한 사령부를 설치했다. 이것이 신해혁명에 이은 제2혁명이다. 그러자 원세개는 단기서, 풍국장 등으로 하여금 혁명세력을 공격, 혁명파의 의도를 저지시켰다. 그해 10월 대총통 선거가 실시되었고 의원들은 원세개 친위세력들의 포위 속에 갇혀 원세개를 총통으로 선출했다.
이듬해 1월 원세개는 약법 회의를 열어
1. 외교에 관한 권한은 총통의 전권이다.
2. 선전포고, 강화조약도 참의원의 동의 없이 할 수 있다.
3. 중요한 관직의 임명은 총독의 전권이다.
라는 법을 정했다. 이는 명목만 총독일 뿐 전권을 행사하는 황제나 다름없었다. 이제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는 일만 남게 된 것이다.
원세개가 황제의 꿈을 꾸며 중국을 통치하던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이때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독일군을 공격했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독일이 중국에 가지고 있는 이권을 차지하겠다는 의도였다. 원세개 정부는 독일과 일본이 중국 내에서 싸우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독일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중국 내의 일부 지역을 장악한 다음 원세개 정부에 그 유명한 '21개 조항'을 요구했다. 그 조항에는 독일이 갖고 있는 산동성의 이권, 여순, 대련의 조차권, 남만주 일대의 철도부설권 연장, 한양 등지의 철광, 탄광 경영권을 일본이 갖겠다는 것이다.
원세개 정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였다. 일본이 원세개의 개인적인 야심을 만족시키는 반대급부를 주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21개조 요구 협상을 벌이면서 원세개에게 (만일 성의를 가지고 교섭에 응한다면 일본정부는 대총통(원세개)이 다시 더 높은 단계에 오르는 것을 기대한다)라는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자기가 황제가 되는 것을 일본에게 양해받는 교환조건이었다.
1915년 10월 원세개는 국민에 의해 추대되는 식으로 황제에 오르기 위한 '국민대표대회조직법'을 공포했다. 그러나 원세개의 황제가 되고자 하는 꿈은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외국 여러 나라들도 찬성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21개조 요구를 들어주는 대가로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을 지지하기로 했던 일본조차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욕심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1916년 1월 1일로 황제가 된다는 것을 선포했다.
전국에서는 다시 원세개를 타도하자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원세개를 반대하는 이 전쟁을 제3차 혁명이라고 한다. 지방에서의 영향력이 감소되어가는 데에 대해 반발하는 지방실력자들, 그리고 공화국을 지향하고 있던 혁명세력 등이 원세개의 황제취임을 계기로 단결하게 되었다. 물론 원세개에 반대하는 중심세력을 손문 등의 혁명파였다. 혁명군 세력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급속하게 확대되는 가운데 상황이 점차 원세개에게 불리하게 흐르자 원세개의 부하인 풍국장 등이 먼저 나서서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일이 이에 이르자 원세개도 어쩔 수 없이 황제가 아니라는 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황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원세개는 총통 사임 압력까지 받게 되었다. 더욱이 원세개를 완전히 절망에 빠뜨린 것은 그가 가장 믿었던 사천장군 진환이 그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뜻을 보내왔을 때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졸도했으며,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58세의 나이로 욕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황제에의 꿈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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