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타도! 제국주의 - 5. 4 운동 발발(191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19년/3.1운동 발발, 상해에 임시정부 수립
1914년 7월 게르만 족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슬라브 족인 세르비아를 침공함으로써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 전쟁은 주로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아시아 등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이들 서양열강들의 식민통치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강들의 세력변화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은 어느 한 나라에 의해 전적으로 식민지배를 받지는 않았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에게 많은 이권을 빼앗기고 있었다. 독일에 의해 주도된 1차대전에서 연합국에 가담한 중국은 연합국의 승리로 전쟁이 끝남에 따라 전승국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여러 학교들이 휴교하고 천안문 광장에서는 북경대 교수들이 전승축하 강연을 하는 등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분위기가 중국 전지역에 넘쳤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기쁨과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것은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회담에서 중국의 이익이 철저히 무시당했기 때문이었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이 평화회담에서 윌슨의 '14개조 평화안'이 전후 처리를 위한 원칙으로 제시되었고, 그 평화안의 핵심적인 내용 중의 하나가 민족자결의 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중국인의 기대를 한껏 부풀게 했다. 중국도 전승국의 위치로 대표단을 파견하여 중국의 요구를 국제사회에 제기하고자 했다. 특히 중국으로서는 독일을 비롯한 열강들이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여러 이권을 되돌려 받으려 했다. 즉, 열강들이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세력범위와 이익범위 철폐, 외국군대 경찰의 철수, 영사재판권 폐지, 조차지 조계의 반환, 관세자주권 승인 등을 획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기대는 환상이었음이 금방 드러났다. 파리회담은 정의로운 세계, 평화로운 세계건설을 위한 모임이 아니었다. 패전국 독일이 가지고 있는 이권을 나누어 가지는 자리였고, 전승국들의 이권이나 식민지에 대한 권리는 전혀 양보되지 않았다. 중국측의 요구는 대부분 묵살되었고, 전쟁 전에 독일이 가지고 있던 여러 권리는 일본으로 넘기도록 하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이런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중국의 군벌정부가 보여준 반민족적인 성향, 일본의 치밀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미 전쟁 전에 일본측이 산동과 남만주 등의 이권을 확보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21개조 요구'가 원세개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1917년 이후 일본은 중국에게 막대한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1918년 중국영토 내에서의 일본군의 자유로운 군사행동, 군사기지 설치 등을 승인하는 '중일공동방적협정'을 비밀리에 맺은 것이다.
파리 강화회담에서 중국대표의 요구가 묵살되고 일본에게 유리한 결정이 내려지자 중국인들의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그 분노는 그들의 이권과 주권을 배앗아가려는 제국주의 열강들을 향한 분노였고, 또한 외세와 결탁하여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중국의 군벌세력에 대한 분노였다. 파리 강화회담의 결정내용이 중국에 전해진 1919년 4월 30일 이후 북경에서는 5월 1일 북경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그 결정에 대한 반대표시를 해야한다는 의견이 모아졌으며, 5월 3일 저녁 각 학교 대표들은 파리 강화회담 반대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5월 4일 오후, 천안문 광장에서는 약 3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21개조를 취소하라)(청도를 반환하라)(매국노를 타도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깃발을 들고 파리 강화회담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말 것과 중국의 이권을 외국에 넘긴 매국노들을 처벌할 것을 외쳤다. 시위대는 그들의 의사를 세계에 전하기 위해 각국 공사관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몰려갔으나 경찰과 군대에 의해 저지당한 끝에 시위대표들이 진정서를 전하는 데 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노한 시위대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매국노로 지목된 조여림의 집을 습격했다. 그는 군벌정부의 교통총장으로 중국의 이권을 외국에 넘기는 등 반민족적인 행위를 한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조여림은 이미 도피한 후였다. 시위대는 조여림의 집을 불태웠다.
이날의 시위에 대해 중국정부는 학생 30여 명을 체포하고 학생들의 타도대상이었던 조여림 등의 매국노들에게 상을 줌으로써 중국인들의 민족감정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에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항의했고, 이날의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항의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동맹휴학 사태가 전국에 걸쳐 전개되자 그때까지 사태를 관망하던 정부는 마침내 6월에 들어서면서 시위에 가담한 대학생들을 마구 체포하기 시작했다. 체포된 학생의 숫자가 많아져서 북경대학 건물이 임시수용소가 될 정도였다.
시위대의 체포소식이 당시 중국경제의 중심도시인 상해로 번지자 상해의 상가는 항의의 뜻으로 문을 닫고 노동자들은 파업했으며, 도시의 창녀까지도 이 항의에 동참할 정도였다. 범죄가 넘치던 상해에서 시위가 행해지던 10여일 동안 한 건의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상해시민들의 애국적인 시위를 잘 말해주고 있다. 부두 노동자들의 작업거부로 일본 화물선은 화물을 싣지 못한채 항구를 떠나야 했다.
상해의 경제활동이 중단되는 것은 곧 중국경제의 마비를 의미했고 정부도 더 이상 강경책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마침내 중국정부는 전국민적인 항의에 굴복하여 매국노로 지목된 조여림 등 3명을 그 지위에서 파면했으며, 파리에 파견되었던 중국대표로 하여금 파리조약을 거부하도록 했다.
5월 4일 북경대생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시위는 전국의 많은 국민이 동참하면서 한달여 만에 외국에 굴욕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던 군벌정부로 하여금 주권을 회복하도록 하는 결실을 맺었다. 이 운동은 우리 나라의 3.1운동과 마찬가지로 침략적인 외세에 대한 전국민적인 저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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