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시련과 승리, 그리고 전락 - 국민당의 등장(1919년)
중국 현대사의 전개에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공산당과 국민당이다. 국민당은 공산당보다 먼저 창설되었고 1949년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할 때까지 중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정당이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의 싸움은 최종적으로 공산당의 승리로 돌아갔다. 대륙에서는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국민당은 신해혁명으로 성립된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대만으로 가게 된다.
국민당의뿌리는 19세기 말의 해외 독립활동에서 비롯된다. 중국의 혁명세력들은 19세기 말 주로 일본을 중심으로 조직으로 형성해 나갔고, 그러한 조직은 1907년에 '중국동맹회'로 결집되었다. 1911년 무창의 군대봉기로 댕겨진 혁명의 불길은 마침내 중국대륙을 휩쓸었고, 1912년 중화민국이라는 근대적인 공화국 체제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중국동맹회는 중화민국의 건국으로 해체되고, 중화민국을 이끌어갈 혁명적인 정당으로 창설된 것이 국민당이다. 국민당은 중화민국 아래서 1912년에 실시한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위의 그림은 국민당 전국대회가 끝난 후 대회장에서 나오는 대표들. 가운데가 손문이며, 그 옆에 황홍의 얼굴도 보인다. 손문이 1925년 죽은 후 장개석이 이끌게 된다'
그러나 국민당이 새로운 중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정당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난관을 넘어야 했다. 중화민국 내에서 혁명파들은 혁명을 주도적으로 실권해나갈 실질적인 힘을 완전히 갖추지 못했고, 보수세력들의 군사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또 다른 보수세력과 손을 잡아야 했다. 중화민국을 구성하는 여러 세력들이 손문의 삼민주의를 지지하여 근대적인 민족 민주국가를 세우는 데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분위기에 밀려 참가한 군벌세력도 있었으며, 이들은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원세개를 총통으로 앉히자는 입장이었다. 원세개는 근대적인 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신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결국 타협이 필요하게 되었고 원세개는 중화민국의 총통의 지위에 올랐다. 원세개는 민족주의적이거나 혁명적인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으며, 개인적인 야심에 가득 찬 인물일 뿐이었다. 원세개에 대항할 만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혁명세력이 원과 타협한다는 것은 곧 그의 야욕에 희생물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1913년 의회는 해산되고 국민당은 사라졌다. 손문은 일본으로 망명, 다시 일본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했다. 이 조직을 바탕으로 활발한 공작을 하여 제2혁명, 제3혁명을 거듭 일으켰으나 손문과 혁명당은 중국을 장악하지 못했다.
1919년 겨우 광주지역에 혁명파의 거점을 마련하고 광주에서 다시 국민당의 이름으로 정부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1910년대 말까지 중국은 원세개의 뒤를 이은 군벌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으며, 국민당은 군벌과의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국민당 내부에는 혁명세력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일부 군벌 세력들까지 가담하고 있었고 이들 반동세력은 끊임없이 국민당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1920년 4월 광주에서열린 중국국민당 비상회의에서는 대총통에 손문을 선출하고 새로운 내각을 구성, 아직까지 세력을 떨치고 있는 군벌들로부터 중국을 되찾기 위한 북벌계획을 세웠다. 특히 1920년 초반 군벌들 내부의 세력다툼이 크게 일어나 전쟁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국민당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마침내 혁명군이 군벌을 잡기 위해 북상을 시작할 때 국민당에 속해 있던 진형명이라는 자가 내분을 일으켜 배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것은 국민당 내부에도 자기의 이해관계나 세력관계에 따라 그 이념에 동조하지 않는 세력들이 다수 섞여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진형명의 반한을 간신히 제압한 국민당은 당의 단결과 중국에서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국제적으로는 소련과 손을 잡고 급속하게 세력을 확대해가는 공산당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이러한 계획은 손문에 의해 진행되었다. 마침내 1924년 제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공산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참가하게 되어 모든 힘을 군벌타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925년 3월 북경의 군벌정부의 협상제의를 받고 북경으로 향하던 손문이 병으로 죽은 후 국민당은 손문 사상의 충실한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장개석이 이끌었다. 장개석은 1920년대 말까지 북벌에 전념하였고, 북벌이 마무리되자 이번에는 공산당을 소멸하고자 했다. 따라서 국공합작은 결렬되었고, 이후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질 때까지 국민당은 공산당을 소멸시키기 위해 5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했다. 공산당은 이 토벌작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대장정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위협이 가속화되던 1936년, 만주의 군벌 장학량에 의해 장개석이 서안에서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서안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과 국민당은 다시 항일 통일전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제2차 국공합작이다. 그러나 장개석은 합작 이후에도 일본과 싸우는 것보다는 공산당의 세력확대를 막는 데에 골몰했다.
일본이 패망한 뒤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마지막 대결이 벌어졌고 결과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다. 장개석과 국민당은 대만으로 밀려났다. 대만에 자리잡은 국민당은 일당통치로 중화민국을 지금까지 40여년 동안 통치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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