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81. '한 점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 공산당 창당(1921년)

지식창고지기 2010. 4. 25. 16:45

81. '한 점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 공산당 창당(1921년)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22년/ 방정환, 일본에서 색동회 조직하고 어린이 문화운동 시작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재일 조선인 다수 사망

  지금 중국은 세계에서 몇 안되는 사회주의 체제 국가 중의 하나다.


중국 사회주의의 원천은 어디일가? 마르크스, 엥겔스에 의해 정리된 공산주의 이론은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현실에서 실현되어 사회주의 정치체제가 성립되었고 점차 세계로 퍼져나갔다. 사회주의 구호의 하나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였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후 1919년 국제적인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이른바 코민테른(제3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이다. 그 후 1920년에 인도네시아와 이란, 1922년에는 일본에서 각각 공산당이 창설되었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창설된 것은 1921년이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공산주의 이론은 일부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하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5, 4운동을 전후로 북경대 교수들 중 일부는 이미 공산주의 이론에 접하고 있었다. 중국에 공산주의를 소개한 인물은 이대교, 진독수와 같은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들이었다. 


  공산주의 이론은 외세와 결탁한 군벌을 타도하고 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중국의 반군벌 반제국주의 혁명운동에 힘이 되는 것이었다. 코민테른도 중국의 이같은 상황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으며, 제1차대전 이후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과정에서 러시아는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한다는 원칙아래 중국의 입장을 지지했다. 러시아의 이런 모습은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시달리고 있던 중국의 민족주의자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체제를 우호적으로 보게했다. 


  코민테른은 세계 공산화 전략의 일환으로 중국을 주목, 1920년 중국에 공산당을 창설하라는 임무를 띠고 보이틴스키가 북경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우선 중국 내 공산주의 이론에 밝은 북경대 교수 이대교를 만났다. 이대교는 북경대 교수를 그만두고 상해에서 글쓰는 데 전념하고 있던 진독수에게 보이틴스키를 소개했다. 


  코민테른의 임무를 띤 보이틴스키와 중국의 대표적인 혁명적 지식인인 진독수의 대면은 중국에 사회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있어 결정적 계기가 되는 중요한 만남이었다. 진독수는 보이틴스키와의 만남이후 1920년 8월 7명의 구성원으로 공산당 창립 발기대회를 개최했다. 그후 북경, 상해, 제남, 광주 등 전국 각지에 공산주의 소그룹(소조)들이 만들어졌고,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일어났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는 주로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마침내 1921년 7월, 상해의 프랑스 조계의 한 사립학교 기숙사에서 역하적인 중국공산당 창립모임이 있었다. 그 기숙사는 방학으로 학생들이 없었다. 이때 참가한 사람은 겨우 13명이다. 나중에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공산혁명을 성공한 모택동도 이 13명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은밀하게 창립대회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비합법 활동으로 당국의 추적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은밀히 진행하고 있던 집회도 경찰에게 들통이 나 집회도중 서류를 싸들고 황급하게 대회장소를 옮겨야 했다. 추랄점부터있었던 이런 시련은 공산혁명이 성공하는 때까지의 긴 장정의 시작에 불과했다. 


  1921년 출발한 당원을 공산당은 30여 년 뒤에 중국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고 수천만의 당원을 거느린 대조직이 되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정식 명칭은 중국공산당으로 정해졌으며 초기 당강령은 노동자 계급에 의한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를 위한 1단계 목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의 수립이었다. 또한 당연히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고 생산수단을 전부 사회적 소유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물론 공산혁명이 성공해야 가능한 정책들이었다. 


  공산당의 창당이후 조직활동은 아주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주된 활동은 계몽적인 선전활동 그리고 노동자를 조직하여 노동운동을 활발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1922-23년을 전후로 하여 이들의 조직적인 활동으로 노동운동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1922년 처음으로 대외선언을 채택하여 공산당의 존재를 정식으로 대외에 알리는 선언을 했다. 또한 코민테른에 가입. 국제적으로 공산주의 조직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눈부신 조직확대로 군벌과 외국에 대항하는 국민혁명 운동의 한 세력이 되었음을 인정받게 되었다. 1923년에는 군벌타도를 목적으로 하여 국민당과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1924년 1월 국민당 전당대회에서는 '연소, 용공, 농공부조'의 삼대정책이 채택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하게 된다(제1차 국공합작). 물론 국민당과의 합작은 당 대 당의 통합이 아니라 공산당 소속원들이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들어가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군벌타도를 위한 북벌운동이 성공하여 국민당이 중국을 장악한 후 국민당의 우파들은 공산당을 몰아냄으로써 이때부터 국민당과 공산당은 분열, 대립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그 뒤로 국민당은 공산당을 말살하기 위해 계속적인 공격을 가했으며, 공산당은 국민당과 투쟁하면서 조직을 유지해나가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만 했으며, 결국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최후의 승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