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18개의 산맥과 17개의 강을 넘다. - 홍군의 대장정 (1934~1936)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1931년 / 만주사변 발발
1932년 / 이봉창, 윤봉길 의거
1933년 /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1927년 국공합작이 깨지고 고산당은 국민당 내에서 추방되었으며 국민당의 공격을 받은 공산당은 정강산에 최후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공산당은 정강산에서 조직을 정비하고 홍군을 재편성하여 다시 주변지역에 새력을 확대했다. 특히 농촌에서 농민들을 대상으로 토지혁명등을 통해 공산당의 근거지를 만들어 나가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1930년대 초에 들어서면 중국대륙의 중남부의 여러 성들에 소비에트가 들어섰다. 그리하여 1931년 11월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수도는 강서의 서금이었고 임시정부의 주석은 모택동이었다.
소비에트의 실질적인 힘은 노동자와 농민으로 구성된 붉은 군대 (홍군) 였다. 공산당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자 남경의 국민당 정부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공비토벌은 30년에서 35년까지 5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다.
홍군은 1930년 국민당군의 1차 토공전과 31년의 공격은 막아냈다. 32년 일본의 침략 (민주사변) 으로 공세가 잠시 추춤해졌지만 장개석은 민주사변에서 일본과 타협한 다음 공산당 토벌에 다시 힘을 집중했다.
1933년 말 제 5차 포위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국민당 군대의 포위망은 홍군의 세력근거지인 강서, 복건지역을 압박했다. 34년 공산당은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다. 공산당은 마침내 강서 소비에트 지구로부터 철수할 것을 결정했다. 약10만의 주력부대가 장개석군의 공격을 피해 포위망을 ?고 대장정에 오르게 되었다. 그 주력부대를 유지하여 후일을 기다리자는 공산당 지도부의 결정에의한 것이었다. 방지민이 ?는 복건성 북부지역의 군대가 먼저 탈출했다. 뒤를 이어 정강산 지구의 홍군 제 6군이 탈풀했으며, 그 뒤를 이어 홍군의 주력부대가 탈출했다. 홍군의 탈출 및 장정은 초기에는 거의 도주하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탈출한는 과정에서부터 많은 희생자를 냈고, 탈출에 성공하여 대장정에 나서면서 계속적인 추격을 받아 희생자는 늘어갔다.
34년 10월 탈출을 시작한 홍군은 4개의 봉쇄선을 뚫었다.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그들은 준의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중대한 회의가 열린다. 모택동은 국민당국의 5차 포위공격에 대한 공산당의 전술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비판했다. 즉 당지도부가 유격전이 아닌 진지전을 전술로 택한 것을 비판했다. 또한 모택동은 탈출과정도 '전략적 후퇴'가 아닌 '맹목적 도주'였다고 비판했다. 홍군의 간부 및 군인들에게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근거지였던 강서의 농민들을 납득시키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싸움에 지친 홍군에게 휴식시간을 주지도 않았고 무거운 장비를 지고 행군하게 함으로써 행진속도를 더디게 하고 병사들을 힘들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택동의 비판은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동안 지도부 중심에 있지 않았던 모택동이 다시 공산당의 지도권을 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도시봉기를 주도하고 탈출방식을 결정했던 지도부들은 제거되었다. 이 준의회의 이후 홍군의 장정의 방법과 방향이 달라지게 된다. 그것은 국민당군의 추적에 맞서 싸워 살아남아야 하며, 일본군과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는 것이었다.
홍군은 1935년 5월 마침내 양자강을 건너 부대를 다시 3개로 나누고 국민당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소부대 단위로 이동했다. 그들은 추격군의 예상을 뛰어넘어 귀주의 산악지역을 넘었으며, 마냥 도망만 가는 것이 아니라 기습적인 공격으로 추격의 발길을 멈칫하게 하기도 했다.
운남을 지나 사천을 접어들어서도 국민당군의 추격은 계속되었다. 장정에서 매우 중대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산악지대의 강 대도하를 건너는 것이었다. 국민당군이 도착하기 전에 그 강을 건너야 했다. 임표의 선봉대는 만 하루에 120킬로미터를 강행군하여 노정교라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선봉대가 다리 좌우의 거점을 확보해야 본부대가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도하를 건너자 이번에는 해발 4천미터가 넘는 대설산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 산을 넘어 7월에는 호북에서 탈출한 제4 방면군과 감숙에서 합류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섬서지방의 보안이었다. 이 지역은 강서 소비에트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역시 공산당의 근거지였다. 이 보안 소비에트는 유지단과 고강 등에 유지되고 있었다.
그들은 국민당군의 봉쇄망을 뚫고, 지방군벌과 싸우면서 11개 성을 통과하고 18개 산맥을 넘고 17개의 강을 건너 1만 2천 킬로미터의 대장정을 해낸 것이다. 주력부대인 제1방면군은 8만여 명에 불과했다. 나중에 2방면군 4방면군이 합류하여 홍군은 약 3만 명이 되었다. 장정 이전의 강서 소비에트 시기 군사력의 약 1/10 정도로 준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넘어 장정을 완수한 병사들은 최정예부대로서 이후 항일투쟁과 공산혁명의 중심부대가 되었다. 모택동은 장정을 마감하면서 (장정은 선언서 이며 선전대이며, 파종기였다....11개 성에 많은 씨를 뿌렸고 머지않아 싹이 나와 잎이 자라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서, 앞으로 틀림없이 수확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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