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항일 통일전선 - 서안사건과 제2차 국공합작(1936~37년)
그 때 우리나라에서는 -
1934년 / 진단학회 설립
1935년 / 최초 발성영화 (춘향전) 단성사에서 개봉
대장정을 마무리한 공산당은 1년여의 휴식시간을 가지면서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항일투쟁에 나섰다. 또한 1936년 국민당 정부에 대해 국공간의 대립을 중단하고 항일투쟁에 일치하여 나서자는 제안을 했다. 중국 내의 여론도 더 이상 국내의 세력다툼에 힘을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분위기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그의 공산당 탄압에 대한 입장을 바꾸지 않았고 공비토벌 작전은 계속되었다. 심지어 장개석은 외국기자에게 중국(국민당)에 있어서 (일본은 피부병이고 공산당은 심장병이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전세를 바꾸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서안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장학량인데, 그는 만주 지방의 실력자로 일본의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밀려나 북경을 근거로 국민당군에 합류하고 있었다. 장학량의 군대는 장개석의 남경정부의 지시로 공비토벌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장학량은 같은 중국인들끼리의 싸움을 중지하고 모두 항일투쟁에 나서자는 공산당의 주장을 더 옳다고 보고 있었다. 1936년 장학량군과 홍군 사이에는 비밀협정이 맺어져 적대적인 싸움이 중지되었다.
그해 12월 장개석은 싸움을 독려하기 위해 서안에 주둔하고 있는 장학량 부대를 찾아갔다. 그러나 장학량은 서안에 찾아온 장개석을 감금했다. 장개석은 잠을 자다가 장학량군에 의해 공격받았는데 다급하게 도망치면서 그의 의치까지 빼놓고 달아날 정도였다. 장학량은 장개석을 감금한 다음 8가지의 요구조건을 제시한 글을 전국에 공표했다.
(...동북지방을 잃은 지 5년, 국가의 주권은 쇠퇴했고 영토는 축소되었다. ...최근 국제정세가 바뀌어 몇몇 세력들이 짜고 우리 국가와 민족을 희생시키려 하고 있다. 이 중요한 때 중앙의 지도자는 마땅히 군대와 인민들을 북돋아 거국적인 항전에 나서게 해야 하는데... 장개석 위원장은 소인배들에게 둘러싸여 민중의 지지기반을 잃고 국정을 바로잡지 못한 죄는 크다. ...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장개석 원수에게 최후의 권고를 하고 그 안전을 보장하면서(감금된 상태) 반성을 촉구하기로 했다. 서북의 군과 민은 일치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남경정부를 개편하고 각당 각파를 참여시켜 구국의 책임을 질 것
2. 모든 내전을 정지할 것
3. 상해에서 체포된 애국적 지도자를 즉시 석방할 것
4. 전국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
5. 민중의 애국운동을 개방할 것
6. 민주으이 집회, 결사 등 모든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손문의 유언을 확실히 실행할 것
8. 구국회의를 즉시 소집할 것
발기인 장학량, 양호성)
결국 장개석은 공산당의 주은래와 담판을 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12월 25일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져 8개항을 지키기로 약속했다. 장개석은 이 약속을 문서화하자는 주은래의 말에 (말한 이상 성실히 지킬 것이며, 행한 이상 결과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문서화하는 데는 끝까지 거부했다.
1937년 3월 국민당은 대회를 열어 서안사건 이후의 정책변화에 대한 문제를 논의했다. 이 대회 앞으로 공산당은 다음과 같은 3개항목의 제안서를 보내왔다.
1. 내란을 중지하고 국력을 집중하여 외적에 대항할 것
2.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와 정치범을 석방할 것
3. 각당 각파의 대표자회의에 의한 공동구국의 실시
국민당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결국 그 골격을 수용하기로 결정하면서. 아울러
1. 홍군의 해체
2. 소비에트 정부 해체
3. 적화전선 중지
4. 계급투쟁 중지
5. 삼민주의 복종을 내세웠다.
마침내 장개석은 공산당을 합법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항일투쟁에서의 단결을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제 2차 국공합작이 완결되었다. 장개석은 그렇게 오랫동안 뿌리뽑으려고 노력했던 공산당과 다시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 되고 있었고, 이에 공동 대처해야 한다는 공산당의 주장이 국민들로부터 명분을 얻었기 때문이다. 특히 37년 7월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본격화 되면서 국공합작에 의한 항일전선은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 섬서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홍군부대를 국민혁명군 제 8로군으로 개편했으며, 다음해 1월에는 양자강 하류의 공산당 분견대를 신 4군으로 재편했다.
'역사의 숨결 > 역사(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88. 두 자매의 다른 길 - 송경령과 송미령 (0) | 2010.04.25 |
---|---|
87. 피에 굶주린 지옥의 병사들 - 중일전쟁과 남경대학살(1937년) (0) | 2010.04.25 |
85. 18개의 산맥과 17개의 강을 넘다. - 홍군의 대장정 (1934~1936) (0) | 2010.04.25 |
84. 일본의 대륙침략 -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등장(1931년) (0) | 2010.04.25 |
83. 혁명 근거지 정강산 - 홍군의 형성(1928년) (0) | 2010.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