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피에 굶주린 지옥의 병사들 - 중일전쟁과 남경대학살(1937년)
그 때 우리나라에서는 -
1936년/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 일장기 말소사건
1937년/ 백백교 사건
일본의 침략은 노구교 사건이후 노골화되었다. 1937년 어느날 몇발의 총성이 일본 노구교 근처에서 야간연습을 하고 있던 일본군 근처에서 울렸다. 발포가 어느 쪽에서 이루어졌는지 불분명하지만 일본은 이 총격을 일본에 대한 중국의 도발행위로 간주했다. 일본군은 즉각 보복공격을 퍼부었으며 일본정부는 중국에게 사죄 및 발포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만일 이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협박까지 서슴치 않았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이 조건을 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노구교 사건 이후 몇차례의 충돌이 있었지만 현지에서는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내각회의에서 이 사건을 중국이 계획적으로 일본에 무력 대항한 것으로 단정하고 중대결정을 했다는 발표를 했다. 그 중대결정이라는 것은 곧 전쟁이었다.
일본 내의 군대들이 속속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8월 13일에는 상해로 전쟁이 확대되었다. 1937년 8월 15일 일본의 고노에 내각 정부는 (지나군(중국군)의 폭력을 응징하여 남경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할 때에 이르렀다)고 발표하여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른바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중, 일 양국의 군대는 치열한 전투를 계속했으며 11월에 일본군은 중국의 중요거점인 남경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중일전쟁이 시작된지 6개월여 만인 12월 13일 마침내 남경은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5만여 명의 일본군이 장악한 남경에서는 이때부터 약 2개월 동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잔인한 학살과 강간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스러운 온갖 잔학행위가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일본군에 의해 자행되었다. 일본인의 만행은 거기에 가담했던 일본군인, 그것을 목격한 일본인 종군기자, 외국인 기자들에 의한 생생한 증언으로 밝혀졌다. 그것은 차마 인간의 탈을 쓰고는 할 수 없는 잔혹한 짓이었다.
죽음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중국인의 증언이다.
( ... 부두에 도착하자 날이 어두워졌다. 일본군은 우리를 20명씩 한데 묶었다. 묶고 나면 바로 기관총으로 쏴 갈겼다. 나는 앞에있어서 다른사람을 따라 강으로 뛰어들었다. 총소리가 계속 귀를 때렸다. 기관총 소리가 멈추고 일본군은 한 사람씩 총검으로 찔렀다. 죽지 않고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총검질이 끝나자 시체들을 불로 태웠다)
(아시아 신문)의 한 기자는 그가 목격했던 것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부두에는 시커멓게 탄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일본군은 시체를 한 구씩 강물에 내던지고 있었다. 신음소리, 시뻘건 피, 경련하는 손발...)
(넓은 강 위엔 온통 시체였다. 강변에도 시체가 높이 쌓여 끝이 안 보였다. 시체 중에는 군인은 물론 일반 백성, 어린아이까지 있었다. 시체는 강물을 따라 하류로 흘러내려갔다)
(중화문을 지키던 일본군이 한 여자를 강간한 후 중국인들에게도 똑같은 짓을 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어기면 당장 총살이었다. 때마침 성 안으로 한 스님이 들어오려고 했다. 일본군은 스님에게 여자를 강간하라고 했다. 스님은 합장하고 염불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스님을 못난 놈이라 비웃으며 칼로 스님의 성기를 잘라버렸다)
이 뿐만 아니라 시아버지에게 며느리를 강간하게 하고 아들에게 어머니를 강간하게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이 자행되었다.
몇십년 뒤 이 학살에 가담했던 일본군인의 일기가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그 일기는 (요즘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죄없는 중국인들을 산 채로 매장하거나 장작불에 밀어넣어 몽둥이로 때리거나 혹은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라고 쓰고 있다.
미국의 (뉴욕 타임)지 기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남경 점령은 일본군에게 있어서 정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이 군사적 승리는 야만적 잔혹행위, 포로들의 대량학살, 강탈, 강간 및 양민학살로 일본민족의 명예에 오점을 남겼다)
나중에 국제극동군사재판 판결에 따르며, 살해된 사람만도 비전투원 1만 2천 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 등이고 근교로 피난간 시민 5만여 명 등 합계 13만여 명이 2개월 동안 살해되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최소한의 것이고 실제로는 30여만 명이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물론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중국의 유명한 작가의 한 사람인 임어당은 이 전쟁의 참사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후 오늘에 이르러 처음으로, 병사들이 웃는 얼굴로 어린아이를 공중으로 던졌다가 떨어져내려오는 어린아이를 날카로운 총검의 끝으로 받아내고는 그것을 스포츠라 부르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눈을 가리운 포로가 참호 옆에서 총검술 등과 같은 훈련의 표적으로 사용되었다)
일본군의 만행은 남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점령한 곳은 어디에서든 계속되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인간의 피에 굶주린 아귀들이었다.
일본군은 38년 5월에는 서주를 점령했으며 10월에는 무한, 광주등을 점령했다. 남경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을 피해 이미 무한으로 옮겼다가 다시 중경으로 피해 있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내에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려 했던 일본의 의도는 38년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빗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은 계속 승리했지만, 중국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45년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기까지 힘겨운 전투를 계속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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