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90. 대륙의 실패를 거울삼아 - 장개석의 대만 통치 시작 (1949년)

지식창고지기 2010. 4. 25. 16:49

90. 대륙의 실패를 거울삼아 - 장개석의 대만 통치 시작 (1949년)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43년 / 카이로 선언. 한국의 독립 결의
  1945년 /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됨
  1945년 / 8, 15 해방. 신의주 반공 학생 의거

 

  대만이 청대 이후 중국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다가 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의 체결에 따라 일본으로 넘어가자 대만인들은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일본은 이 저항을 강력하게 무너뜨렸다.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대만은 일본의 대재벌인 미쓰이, 미쓰비시 등의 독점자본에 의해 경제적으로 착취당했다. 일본의 통치에 대한 대만인들의 저항 역시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신해혁명에 고무되어 일어났던 무장 항일봉기, 5, 4 운동의 영향을 받은 신민회 등의 의회설치 운동이 있었고 국민혁명의 시기에는 대만 공산당, 대만 농민 조합이 결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항일운동은 철저히 탄압당했으며 일본은 일본어 보급 등을 통해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때에는 20여만 명의 대만인들이 징집되어 동남아시아 전선 등지로 끌려갔으며,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일제 치하 조선과 흡사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일본 패망 이후 대만을 다시 중국영토로 회복시킨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45년 일본은 물러갔고 대만은 중국 국민당 정부 아래 속하게 된다. 국민당 지배하의 대만 역시 중국 본토와 마찬가지로 국민당의 부채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 미국의 문서에 의하면 대만에 파견된 신임 장관은 오만한 수행원을 거느리고 섬에 도착했는데, 이들은 대만에서 주로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47년 2월 27일 정부의 전매품인 담배를 몰래 팔던 한 노파가 단속반에게 폭행을 당하자 주변 사람들이 이에 항의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경찰은 항의하는 군중에게 총질을 했다. 그 다음날 28일 이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장관 집무실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경찰은 또다시 이 시위에 기관총을 난사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른바 '2, 28사건'이다. 사건은 확대되었다. 대만의 유력인사들은 대만의 자치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32개항의 요구안을 제시했다. 


  신임장관이었던 진의는 반발이 거세어지자 그들과 타협하는 듯 하면서 시간을 번 다음 본토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국민당 정부는 3월 8일 2천여 명의 군인을 파견했으며 이후에도 군대를 계속 증파했다. 3월 9일부터 섬 전체에서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졌다. 국민당의 결창과 군인은 행인을 약탈하고 총질을 했으며 총에맞은 부상병을 치료하던 간호원에게까지 총탄을 퍼부었다. 숨거나 도망가려는 자는 무조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약 3만 명 정도가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49년 대만 전지역에 계엄령이 내려졌으며, 그 계엄령은 87년에 가서야 해제되었다. 49년 12월 10일 장개석은 공산당에 패해 국민당의 50만 군대와 함께 대만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중국본토로부토 이주해온 국민당에 의해 '중화민국'의 이름으로 국가체제를 갖추게 된다. 


  냉전체제의 세계질서 속에서 대만은 미국의 소중한 우방이었다. 미국은 1950년 6월 대만 해협에 미 7함대를 배치하여 대만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많은 원조를 했다. 미국은 1970년대 중국과 화해하고 중국의 유엔 가입 및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인정하게 될 때까지 대만과 장개석 정부를 중국으로 인정했다. 대만은 세계적으로 반공투쟁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대만은 냉전체제 아래 미국을 등에 업고 국제적인 지위를 누렸지만 국내에서는 국민당이 계엄령 상태 아래 철저한 장개석의 1인 독재체재를 유지했다. 단, 본토에서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관리들의 부패 등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벌을 했다. 그의 권력은 대만에서도 절대적이었다. 국민당 이외의 당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의회가 있었지만 국민당에 의한 1당제의 절름발이 의회였다. 오래 전에 중국본토에서 이주해와 대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 중심의 독립된 국가를 만들기를 원했으나 국민당은 그것을 허용치 않았으며, 대만 독립운동가들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국민당 1당, 그리고 장개석 1인의 독재체제 아래 대만은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1960년대에 섬유나 가전제품 등 노동집약적인 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수출지향형의 공업화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현재 대만은 아시아 신흥공업국을 가리키는 이른바 '4마리 용' 중 가장 안정된 경제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의 외환 보유고를 자랑하기도 한다. 중국대륙과의 경제수준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졌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대만의 지위는 계속 낮아졌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과 중국의 수교였다. 현재 국민당 지배의 대만을 하나의 국가체제로 인정하는 나라는 30여 국을 넘지 못한다. 우리 나라도 1992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했고, 이로인해 국내의 많은 화교들이 눈물을 삼켜야 했다. 중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다른 나라와 국교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만은 세계의 많은 나라와 교역을 계속하고 있으며 50만에 가까운 정규군대 및 현대적인 장비로 무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75년 장개석은 마침내 눈을 감고, 그의 아들 장경국이 대만의 총통이 되어 대를 이어 통치를 하게 되었다. 그 장경국도 죽은 뒤 현재는 최초로 대만 출신이 이등휘가 대만을 통치하고 있으며, 일당 독재체제에 대한 민주화 시위에 따라 점차 대만인들의 정치적인 발언권도 강화되어 가는 추세이며 야당의 존재도 인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