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89. 약진하는 홍군, 무너지는 국민당 -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1949년)

지식창고지기 2010. 4. 25. 16:49

89. 약진하는 홍군, 무너지는 국민당 -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1949년)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49년 / 창시개명 강요. 중국 중경에 광복군총사령부 성립
  1942년 / 조선어학회 사건

 

  전쟁 이전까지 국공합작에 의해 항일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던 공산당과 국민당은 겉으로는 일본군과 싸움에 온힘을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안으로는 일본 패망 이후 중국에서의 패권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개입 등으로 일본과의 전쟁이 점차 유리하게 전개되어가자 전쟁 이후의 중국에 대한 여러 가지 설계가 양세력들에 의해 검토되고 있었다. 장개석이 구상하고 있었던 전쟁 이후의 새로운 중국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중국 고유의 도덕과 기능의 회복
  2. 국민의 건국신념과 결의의 격려
  3. 중국 전성기인 한나라, 당나라 규모와 기백 수준으로의 부흥


  즉 유교적인 도덕윤리를 회복하여 국력을 강화하여 세계적인 국가로 다시 한번 성장하자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삼민주의를 이념으로 하여 국민당이 중심이 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에 비해 모택동은 전쟁 이후 새로운 국가형태를 연합정부론으로 정리하고 있다. (중국은 각 당파와 무소속의 대표자를 단결시켜 민주적인 임시 연합정부를 성립시키고 민주적 개혁을 실행하며, 당면 위기를 극복하여 전 중국의 항일세력을 통일, 일본 침략자들을 물리쳐야 한다. 그후 폭넓은 민주적 기반 위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연합적인 성격의 민주정부를 만들어 해방 이후 중국 전인민들을 이끌어 중국을 하나의 독립된 자유, 민주, 통일 국가로 건설해야 한다)


  2차대전의 전세가 일본 쪽에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전개되는 마지막 사건은 소련의 극동전선의 개입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은 1945년 4월 얄타회담에서 일소중립조약을 깨고 8월부터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통보했다. 8월 9일 소련군은 극동의 500킬로미터 전선에 걸쳐 일본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약 150만명이다. 소련군은 8월 중 하얼빈, 여순, 대련 등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만주의 괴뢰정부 만주국도 끝을 맺었다. 


  일본은 두 번의 원자폭탄 투하에 굴복하여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이제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최후의 한판이 남아 있었다. 중국인들은 오랜 전쟁 끝에 찾아온 평화가 깨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1945년 8월 말 모택동은 장개석의 초청을 받아 중경으로 가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평화교섭을 위한 회담을 했다. 이 회담에는 미국대사가 함께 했다. 미국은 당연히 국민당 정부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만일 소련의 도움이 없다면 공산당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겉으로는 공산당과 평화회담을 하면서도 은밀히 공산당에 대한 마지막 타격을 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본이 항복했을 1945년 당시 전력에서는 국민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모택동과 만난 후 얼마 되지 않은 그해 10월 국민당 정부는 약 200여만에 가까운 군대를 동원하여 공산당의 거점인 해방구를 공격했다. 물론 미국은 국민당을 지원했다. 중국 내에서는 미국의 내정 간섭에 대한 반대여론이 일어났다. 1946년 1월 미국특사 마셜의 조정에 의해 국, 공 양당의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각 세력들이 참여하는 정치협상회의가 중경에서 열렸다. 

  국민당은 정치협상회의의 결정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전쟁을 중지하자는 합의를 하고도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결국 정치협상은 만주지방에서 두 세력이 충돌하면서 깨지고 만다. 국민당은 소련군의 철수와 함께 만주의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고, 그 지역에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공산당이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무력충돌로 번지게 된 것이었다.


  두 세력의 싸움은 누가 더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느냐에 있었다. 그 점에서 공산당은 국민당보다 앞서 있었다. 실제적인 군사력은 약하지만 공산당의 정책은 중국인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해방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토지개혁은 인민들을 공사당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1946년 6월 200만에 가까운 국민당군이 화북과 화중의 대규모 홍군 근거지를 공격했다. 홍군은 화중지방, 양자강 하류 등의 거점에서 밀려났다. 국민당군은 47년 3월 대장정 이후 심장부였던 연안을 점령했다. 공산당의 홍군은 국민당의 공격대상이 되는 도시거점을 지키는 데 주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군대를 빼돌려 국민당군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택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공산당의 근거지가 점령당했지만 공산당 군사력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 등을 공격하여 국민당 군대의 보급선을 끊었다. 또한 연안을 내주는 대신 좀더 풍요한 지역인 산서지역을 장악했다. 홍군의 발표에 의하면 국민당군이 승리를 거듭하고 있었던 46년 - 47년 사이 국민당군 70만 명을 무력화시켰다. 국민당은 표면적으로는 이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패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는 중에도 두 세력 사이에는 평화협상이 계속되었으나 어느 쪽도 진정으로 상대방을 대화의 상대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장개석은 남경에서 47년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총통인 자신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헌법을 채택했다. 공산당도 역시 47년 2월 당중앙위원회에서 국민당 정부를 전복한다는 정책을 결정했다. 3월에는 중경, 남경, 상해, 북경 등지에 남아있던 공산당 대표단이 철수했다. 협상은 끝이 났고, 싸우는 일만 남게 되었다. 


  초반에는 국민당의 군사적 우위에서 시작했으나 1년이 지난 47년 경에 이르면 전세는 공산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국민당 정부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부의 부패, 그리고 생존에 허덕이는 국민들의 고통을 외면함으로써 이미 민심을 잃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물가폭등에 대한 도시 노동자들의 항의시위가 계속되었고 농촌에서는 납세거부 시위가 돛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장악한 해방구에서는 토지개혁이 이루어져 농민들이 자기 땅을 가질 수 있었고 부패한 관리들에게 착취당하는 일은 없었다. 자유주의자들도 공산당 편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특정지역을 점령하거나 방어하지 않고도 국민당군을 붕괴시키고자 하는 공산당의 계획은 성공하고 있었다. 


  1947년 홍군은 전세가 유리해진 것으로 판단하고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46년에 국민당군 400만에 대해 100만에 그쳤던 공산당 군대가 200만으로 증가했다. 


  국민당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는 엄청난 물가상승 등 경제가 붕괴되고 있었다. 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화폐를 월급으로 받지 않으려고 아우성을 칠 정도였다. 실업자도 늘어났다. 궁지에 몰리기 시작한 장개석은 1949년 남경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공산당과의 평화교섭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 답으로 공산당은 8개항의 평화안을 제시했다. 장개석을 포함한 장개석을 포함한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적 원칙에 따른 군대 재편성, 관료자본 몰수, 토지개혁등을 요구한 것이다. 장개석은 이미 대세가 기운 것으로 판단, 49년 봄부터 정부의 금괴와 정예부대를 대만으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전 3년 만인 49년 1월 공산당은 국민당의 정예부대를 격파하고 북경에 입성했다. 4월에는 국민당 정부가 있던 남경을 점령했다. 남경 국민당 정부는 광동과 중경, 다시 성도로 옮겼다가 49년 12월 미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대만으로 철수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공산당 창당 이후 겨우 30년이 지났을 뿐이었다. 수도는 북경, 주석에는 모택동이 선출되었다. 30년에 걸친 긴 내전에서 최후의 승자는 공산당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