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97. 문화대혁명의 후예들 - 4인방 체제의 등장 (1973~1976)

지식창고지기 2010. 4. 27. 09:37

97. 문화대혁명의 후예들 - 4인방 체제의 등장 (1973~1976)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73년 / 6, 23 평화통일외교정책 발표. 김대중 피랍 사건
  1974년 / 긴급조치 1, 2, 3, 4, 호 선포. 육영수 여사 피격
  1975년 / 유신헌법 찬반투표 실시 (찬성 73. 11%)

 

  문화 대혁명을 거치면서 모택동의 혁명동지이자 유력한 당간부였던 유소기와 등소평은 실각하여, 유소기는 감옥에서 폐렴으로 죽었으며 등소평은 강서의 한 시골 트랙터 공장으로 쫓겨갔다. 모택동의 우상숭배는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홍위병의 광란은 2년여 만에 진정되었고 그들은 하방에 의해 다시 시골로 내려갔다. 69년에 중국공산당 9전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선출된 중앙위원 279명중 그전부터 중앙위원이었던 사람은 고작 53명에 지나지 않았다. 문혁기간 중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이 당대회에서 임표가 모택동의 후계자로 정식 지명되고 모주석 바로 다음 직위인 부주석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문혁기간중 등장한 문혁파가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들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나 임표가 모반사건에 이은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루 잠시 중국의 권력을 장악했던 4인방 그룹들이다.


  임표의 모반사건이란 당 부주석이었던 임표가 모택동을 암살하고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다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고 하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많은 의문점을 안고있다. 정부는 임표가 사건이 발각되자 헬리콥터로 국외탈출을 시도했으나 사막에 추락하여 그의 가족과 함께 사망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임표는 비행기를 타지 않았으며 체포되어 북경으로 끌려갔다는 소문도 심심치않게 나돌았다. 모택동은 임표를 후계자로 정하기는 했지만 그의 세력이 커지고 군대를 장악해나가게 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그를 제거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임표가 반란사건을 일으킬 필요는 별로 없었다. 그는 모택동에게 충실하게 따르기만 하면 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표는 2인자의 지위를 넘어서서 모택동과 어깨를 겨눌 정도로 성장했고 모택동은 그것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2인자 임표가 제거되자 문혁파인 4인방이 급부상하여 주요관직을 장악햇다. 4인방이란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강청, 4명을 가리킨다. 73년 대회에서 당 부주석에 선출된 왕홍문은 문화 혁명기에 활발한 조직할동을 전개했던 사람이다. 장춘교는 대약진운동의 이론가로써 활약햇던 인물로며, 붓대하나로 중국을 휘어잡아서 일명 '붓대'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평론가 요문원은 그의 문장실력으로 문화대혁명의 불을 지핀 사람이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예술단원 출신으로 1930년대 모택동과 결혼한 강청이다. 


  73년 공산당 전국대회를 계기로 문혁세대들은 급속하게 공산당 조직의 중심부로 스며들었다. 그들이 가장 취약한 곳은 군사부문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메꾸기 위해 민병을 그들의 세력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당의 실질적인 운영경험이 없기 때문에 임표시대 추방되었던 당의 원로들이 복귀하계 되었고 그들은 원로중심인 주은래 주변에 모이게 된다. 이들의 복귀는 문화대혁명에의해 성장한 새로운 세력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76년 혁명 1세대이자 당의 핵심인 주은래가 죽었다. 등소평은 76년 4월 주은래를 추모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인 군중들을 배후조종했다는 죄목으로 다시 공산당으로부터 추방된다. 4인방과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이어서 공산당의 살아있는 신화였던 모택동도 죽게되자 이제 중국공산당은 바로  이 4인방에 의해 장악되었다. 물론 모택동은 그의 후계자로 화봉국이라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지명했다. 


  4인방으로서도 세력기반을 갖추고 있지않는  화봉국의 등장이 그들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아직 4인방은 당의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택동의 죽음은 인민들이나 당간부들로 하여금 당에 대한 비판 및 4인방에 대한 반발을 거세게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가 사라진 공백기를 틈타 권력투쟁이 표면화되었던 것이다.


  화봉국은 이와 같은 분위기를 틈타 모택동이 죽은지 채 한달이 되기도 전에 4인방을 전격 체포했으며, 4인방체제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4인방의 급격한 몰락은 그들이 오직 모택동이라는 개인의 힘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당내에 탄탄한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4인방의 몰락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정도까지 그들의 기반이 취약한 것일줄을 몰랐던 것이다.


  4인방의 몰락으로 몰아간 세력은 화봉국을 중심으로 한 비4인방 문혁파, 섭검영, 이선념 등의 실무관료, 그리고 군인 그룹들이다. 그러나 화봉국도 확고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화봉국은 그의 체제를 갖추어 나가기 위해 4인방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정치적 단결과 경제건설을 강조하는 한편 4인방의 체제하에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구제했다. 이때 등소평도 화봉국을 전면적으로 지지한다는 편지를 보냈고 그는 곧 중앙관직에 다시 복귀했다. 그러나 등소평은 중앙에 복귀하여 화봉국과 권력투쟁을 전개한 끝에 결국 그를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했다. 


  4인방의몰락은 문화혁명을 통해 등장했던 문혁파의 모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문화혁명에 의해 추방되었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문화혁명에 의해 추방되었던 옛 관료들이 다시 복귀하는 것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