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98. 오뚜기 정치인생 - 등소평의 집권 (1980년)

지식창고지기 2010. 4. 27. 09:38

98. 오뚜기 정치인생 - 등소평의 집권 (1980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1979년 / 박정희, 피격 사망
  1980년 / 광주민주화항쟁 발발
  1983년 / KAL기 소련기에 피격, 미얀마 아응산 묘소 폭발사건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실권자는 등소평이다. 그는 작은 거인 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오뚜기라고 이컬어지기도한다. 그것은 그의 삶과 정치역경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의 키는 150cm 남짓된다. 키가 작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하늘이 무너지면 키가 큰사람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게 된다) 라는 농담으로 받아 넘겼다고 한다. 


  등소평은 1904년 사천성 광한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주였으며, 생모는 일찍죽고 계모 아래서 태어났다. 신문화 운동과 5, 4운동이후 중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유럽으로유학을 떠날 무렵 등소평도 1920년 16세의 나이로 그 무리에 가담한다. 나중에 영원한 동지가 되는 주은래도 그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만났다. 프랑스의 생활은 고된 노동과 학습 그리고 공산ㄴ당 조직이라는 힘겨운 과업의 연속이었다. 그는 고무공장, 자동차공장 등에서도 일했다. 프랑스에서도 공산주의의 이념은 퍼져 있었으며 주은래는 이미 1921년에 프랑스에서 중국인의 공산주의 소모임을 만들었다. 1922년 유럽 중국소년 공산당이 설립되었고 등소평도 여기에 가입했다. 1924년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주은래가 중국으로 돌아간 후 등소평은 주은래의 뒤를이어 공산당 파리지부의 중요한 일을 맡게 되었다. 


  그는 귀국하여 20년대 말부터 모택동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30년대 초 모택동이 밀려났을 때 등소?도 모택동의 지지자로 여겨져 그의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것이 그가 맛본 최초의 정치적 패배였다. 그러나 장정 도중의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의 노선이 인정받게 되어 그도 모택동과 함께 다시 핵심요직에 들어갔다. 


  제2차 국공합작 이후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하는 항일운동의 전선에서 활동했으며, 마지막 국공 내전시 황하 주변지역의 작전에 참가, 여러차례 전투를 치렀다. 그의 나이 45세 때인 1949년 북경에서 중화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그는 중앙인민정부 의원회 및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52년에서 54년까지 국가계획위원회 위원, 54년에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으로 사회주의 건설 초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삼람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이시기에 모택동, 유소기 등을 이어 중국 공산당의 서열 6위에 있었다. 


  50년대 중반부터 전개되었던 경제개발계획에서 대약진운동, 인민공사설립 등의 사회주의 경제정책이 실패로 판명되자 등소평과 유소기, 주은래 등은 좀더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고자 했다. 유소기와 등소평은 인민공사와 같은 집단경제체제에 대한 신념을 잃었으며, 이때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는 그의 유명한 발언이 나오게 된다. 즉, 국민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체제면 어느 것이든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모택동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들의 주장을 자본주의적이라고 비판했고 문화대혁명의 미친 바람속에서 유소기와 등소평의 실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은 66년 가을 이후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68년 10월 2년 만에 열린 중앙전회에서 국가주석 유소기는 당내의 직위와 아울러 당원자격마저 박탈당했다. 그는 제국주의, 수정주의, 반 혁명주의로 나가고자 하는 반역자이며 노동자의 적으로 매도되었고, 69년 폐렴으로 감옥에서 죽었다. 


  등소평은 유소기만큼 중죄로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홍위병들이 발행했던 소책자에 거론된 그의 죄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당의 총서기로써 월권행위가 있었고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은 모택동의 권위를 깍아내렸으며, 농업정책에서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 의 주장을 했다....) 또한 서양의 부르주아 계급의 눌이인 브리지게임을 했다는 것도 비판의 주요한 항목이었다. 그의 아들은 북경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죄상을 밝히려고 했던 홍위병들이 그에게 아버지의 죄목을 자백하기를 강요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않자 그를 3층 옥상에서 집어던져 하반신이 마비되는 폐인이 되고 말았다. 


  등소평은 2년여 동안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으며, 69년경 감금된 곳에서 그의 아내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화동지방의 강서시에가서 재교육을 받으라는 통고를 받았다. 그들은 남창 교외의 한 보병군사학교의 교장관사로 쓰이던 2층 석회석 벽돌건물에 거처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3년을 보냈다. 그의 나이 65세였다. 그들의 생활은 3년 내내 규칙적이고 단졸운 것이었다. 아침에는 트랙터 공장에서 일했고, 점심때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은 후 방송을 듣고 신문을 보았으며, 오후에는 마당의 채소밭을 가꾸었다. 노모는 바느질을 했다. 


  71년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목되엇던 임표가 반란을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비행기 착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표가 죽은 후 등소평은 1973년 중앙에 복귀했다. 


  73년이후 등소평의 위치는 강하되어 75년 에는 당부주석, 인민해방군 총 참모장에 임명되었고 75년 이래 생산활동을 향상시키는 경제정책을 적극 추천했다. 그의 정책은 생산성을 향상시키기이해 노동하는 만큼 보상이 돌아가게하고 선진기술을 받아들이는 것등이었다. 그러나 1976년 그의 유력한 후원자였던 주은래가 죽으면서 그는 또 시련을 겪게된다. 주은래는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친분이 있었고 등소평은 그를 스스럼없이 '영원한 형님' 으로 부를 정도였다. 그런 주은래가 죽자 이른바 4인방이라고 불리는 그의 반대파들은 등소평에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1976년 4월 5일, 이날은 죽은 자들의 면복을 비는 중국 전통의 청명절이었다. 주

은래의 죽음을 추도하는 인파가 인만혁명기념비 주변에 모였고 주은래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화환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러나 당국은 화환을 치워버렸다. 이것은 군중들을 분노케했다. 군중은 경찰차를 전복시켜 불을 질렀고 경찰 전망대를 불질렀다. 천안문 광장의 군중은 강제해산 되었으며, 등소평은 4인방에 의해 천안문 광장에서의 반혁명적 폭력을 선동한 혐의로 모든 직책을 박탈당했다. 


  76년 9월 모택동은 마침내 숨을 거두었고 화봉국이 주석에 취임했다. 그는 광주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국가주석에 취임한 화봉국은 4인방들이 그의 지위를 노리고 있는 것을 알고 국방부장섬검영의 옹호아래 4인방을 체포했다. 4인방이 제거된 뒤 76년 10월 등소평은 화봉국에게 편지를 보내 그에 대한 지지를 표하면서 전면에나서 일할 수 있게 되기를 간청했다. 등소평은 1977년 7월 당부주석, 총참모장 및 국무원 부총리의 지위로 복귀했다. 이것은 그가 화봉국에 이어 당 서열의 2인자의 위치에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등소평과 화봉국의 노선은 달랐다. 화봉국은 문화대혁명의 전통을 개승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등소평은 대외개방을하고 적극적으로 경제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8년 11월 3중 전회 준비대회에서 등소평은 사상해방, 실사구시, 일치단결 전진이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그는 화봉극의 노선이 잘못되었음을 자아비판하도록 요구했다. 


  76년의 천안문 사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과시켰고, 12월 3중 전회에서는 팽덕회, 유소기 등이 복권되었다. 이는 등소평이 확고한 기반을 마련했음을 의미한다. 80년 9월 마침내 화봉국은 사임했다. 4인방은 재판정에서 피고의 위치가 되었다. 11월 호요방이 국가주석이 되었고, 등소평은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 주석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실질적으로 중국의 최고 지도자 였다. 그는 외국의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시련을 당했을 때의 그의 생각에대한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내가 치명타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낙관주의자라서 절망을 하지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정치란 넓은 바다 속의 파도와 같아서 사람들은 파도위에 있을 때도 있으나 때로는 파도밑에 깔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