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99. 천안문광장을 메운 자유의 함성 - 천안문 사건 발발 (1989년)

지식창고지기 2010. 4. 27. 09:39

99. 천안문광장을 메운 자유의 함성 - 천안문 사건 발발 (198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86년 / 서울 제10회 아시안 게임 개최
  1987년 / 6월항쟁. 6, 25선언 공표
  1988년 / 서울 제24회 서울올림픽개최, 국회청문회

 

  1989년 6월 4일 오전 1시 40분, 약 10만에 가까운 인민해방군은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들이 밤을 세우고 있는 천안문 광장을 습격했다. 인민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바로 겨누고 사격했으며 광장은 순식간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이로써 약 50여 일간에 걸친 중국인민들의 요구는 막을 내렸다.


  다음날 중국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중국 내 언론의 보도를 통제하면서 (6월 4일 천안문 광장에서는 한사람의 사망자도 없었다. 학생들은 해산했고 총에 맞거나 전차에 치인 학생은 없다. 폭도들이 소란을 피운 곳은 다른 곳이다. 폭도들은 군으로부터 총을 탈취하여 국가를 전복시키려 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사망자는 300여 명이다. 희생자의 절반은 군인이며 절반은 폭도 및 질 나쁜 구경꾼들이다) 라고 발표했다.


  4일 한밤중의 대살육전이 끝나고 날이 밝아지자 4일 오전 계엄부대 사령부는 (수도에서 어제 저녁 중대한 반혁명 동란이 발생했다. 폭도들은 광기의 상태로 해방군 장병들을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군용차를 불질러 바리케이트를 ?으며 해방군 장졍을 연행하는 등 중화인민공화국을 전복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뒤엎으려고 획책했다) 라고 하면서 천안문의 학살을 정당화했고, 천안문 시위대들을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폭도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천안문 광장에서 죽음을 간신히 피한 한 학생은 홍콩으로 탈출하여 기자들에게 그날밤의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많은 동료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전차에 깔려 갈기갈기 찢겨졌다. 군대는 짖겨진 시체를 삽으로 모아 포대기에 넣어 불태웠다)


  이날 사건의 희생자는 중국 당국의 발표, 대만 그리고 외국언론에 따라 각각 다르다. 정확한 보도로 정평이 있는 영국 BBC 방송이 6월 7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사망자만 7천여 명 (그중 군인이 1천여명) 에 이르렀다. 당연히 부상자는 수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다. 천안문 광장에서 몸을 피한 시위대 지도부들, 특히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대표들에 수배령이 내려졌으며 잡히면 총살당했다. 이것이 89년 봄 중국에서 전개되었던 민주화 운동의 비극적인 촤후를 장식하는 천안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어떤면에서 10여년 전인 1976년 주은래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위집회와 비슷했다. 두 사건 모두에 관련된 사람은 등소평이다. 1976년에는 시위대를 배후조정한 협의로 실각했지만, 1989년 사건 때 그는 중국 최고지도자로서 시위대를 무력진압하는 위치였다.


  학생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무엇을 요구했는가? 북경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고 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여 어떤 때는 1백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였던 천안문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는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지냈던 호요방의 죽음이었다. 그는 4월 15일에 죽었는데, 그때부터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천안문 광장의 약 50여일 일간에 걸친 긴 시위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호요방의 죽음은 하나의 죽음은 하나의 계기였을 뿐,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주의 중국의 체제에서 비롯된다. 중국은 모택동이 죽고 등소평이 실권을 장악한 이후 10여년간 개혁과 개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 및 개방정책은 완고한 사회주의 체제에 묶여 있던 중국을 커다란 혼란 속에 빠뜨렸다. 1980년대 중반에 인민공사가 해체되면서 개인농, 즉 사유제하의 농민이 생겨났으며 생산량도 향상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농산물의 생산량이 무한히 증가할 수는 없었다. 중국정부는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농산물 수매가격을 약 30% 가량 전체적으로 인상했고 이로인해 중국정부의 재정상태가 악화되었다.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화폐를 발행하게 되고 그것은 바로 물가상승, 즉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했으나 이 돈은 일부기업과 당 간부수중에서 놀아나게되어 경제에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아떻든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중국경제는 상품시장 및 시장경제가 발달했다. 당연히 배금주의적인 풍토가 만연하게 되었으며, 이런 변화에서 당간부들이나 몇몇사람들은 엄청난 재산을 모으게 되어 심각한 소득 불평등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1988년 중국공산당 13기 삼중전회에서는 긴축경제정책이 채택되었다. 개혁과 개방은 중국경제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고 이제다시 긴축경제정책을 펴게되자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주 불투명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당간부들은 특권신분층으로 지위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개방정책에 의해 새로 세워지는 회사들은 당간부와 결탁할 수밖에 없고, 당간부들은 권력뿐 아니라 개인의 부도 증대시켰다. 고위 당간부들의 자식들은 그 부모를 이어 요직을 차지했다. 


  대학생들은 부패한 당간부에 의한 국가경영으로 인민들만 고통을 받고 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천안문 민주화 시위가 있기 전부터 이미 일부 지식인들로부터 공산당의 통치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과 개선요구는 공산당 중앙정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으며, 그 결말이 천안문의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천안문 민주화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던 호요방의 죽음은 1989년 4월 15일 이었다. 호요방은 당면의 과제를 놓고 당시 중앙당 간부들이었던 조자양, 이붕, 양상곤, 등과 격력한 토론을 벌리다 졸도하여 그대로 죽고 말았다. 하생들은 (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않고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었다) 라고 애석해했다.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 지칭한 것은 등소평이다. 그의 장례식을 계기로 북경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중앙당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들의 집회장소는 중국의 상징인 천안문 광장이었다. 그들은 호요방의 재평가, 면예회복과 언론보도의 자유, 그리고 제반민주화 조치를 요구했다. 

  학생들의 움직임을 보고받은 등소평은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니라 동란이다) 라고하면서 강력한 진압을 명령하였다. 이를 이어받아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는 이 학생운동은 비합법 조직의 계획적인 음모에 의한 동란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비판, 학생들을 더욱 자극했다. 


  시위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났다. 중국을 공식방문하고 있던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천안문 광장에 있는 인민영웅기념비에 헌화하기로 예정이 잡혀있던 5월 17일에는 1백만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이 헌화계획을 취소하게 된다. 시위대의 행위에 동정적이었던 총서기 조자양은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를 방문하여 눈물을 글썽이며 학생들의 시위가 정당하다고 위로했다. 그는 실권자인 등소평에 대항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중앙에 의해 조자양은 연금상태에 들어가 실각되고 이붕 수상은 시위대에 대한 강경진압을 명령했다. 5월 20일 북경의 중요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군대는 시위대를 포위했고 포위된 상태에서도 북경 중앙미술학생들은 민주의 여신상을 만들어 천안문 광장에 세웠다. 그러나 민주의 여신상은 군인들에 의해 넘어뜨려졌으며 수많은 학생들이 희생되고, 민주를 부르짖던 시위운동은 엄청난 희생자를 낸 채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