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불가 이해
중국불교는 언제부터 그 걸음마를 시작했을까. 인도에서 불교를 개창했던 석존께서 입멸한 뒤 얀 오백 년쯤 경과했을 무렵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었습니다. 중국 불교 전파와 수용의 역사적 전개를 시대 구분 하는 데는 사상과 신앙에 중점을 두거나 교단사에 중심을 두기도 하며, 혹은 유교, 도교, 불교라는 3교의 교섭을 중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불교가 중국의 사회와 민중 속에 살아있는 종교로서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하는 점에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근본 정신에 비추어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 바꾸어 말해서 불교는 인도와 다른 중국의 고유한 사상이나 신앙과 어떻게 접촉하고 교류하며 융합했는가, 그리하여 중국인의 정신적인 양식으로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활용되며, 시대와 사회에 공헌할 수 있었는가 하는 안목으로 중국 불교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중국 불교사의 시대 구분에 대한 여러 선학들의 연구를 살펴보면, 첫째 5기서 둘째 3기설 셋째 2기설이 있는데 5기설이 압도적으로 많이 믿어지고 있습니다.
제1기를 전한부터 동진 초에 이르는 전래와 번역 시대. 제 2기를 동진 초부터 남북 조에 이르는 연구 시대. 제 3기를 수당의 건설 시대 제4기를 오 대부터 명나라 말기에 이르는 계승 시대. 제 5기를 청나라 이후 쇠퇴기로 보고 있습니다.
먼저 불교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된 과정을 보기 이전에 어떻게 불교가 전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현재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전파되어 잇는 불교는 북전 불교와 남전 불교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석존에 의해 개창된 불교는 시대의 경과에 따라 단순히 인도 지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점차 중앙 아시아. 중국. 한국. 일본 등의 북방 지역으로 전파되었는데 이것을 북전 불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북전 불교는 언제 누가 중국에 전래한 것일까요? 불교가 언제 중국에 전해졌는가 하는 문제는 실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중국이라는 광대한 지역과 긴 역사가 기록의 눈을 가리게 되었다고도 생각합니다. 아니 불교가 전해졌던 그 시점에서는 기록에만 그칠 정도로 주목 받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더구나 불교는 중국 고유의 종교가 아니고 외래 종교입니다, 불교의 자극을 받아 형성된 도고 교단과 우열을 가리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서 불교의 전래 역사가 유구하다는 것을 가지고 권위를 세울 필요성도 생겼을 것입니다. 또 유교에 대항하는 의식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째든 무엇인가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래의 연대가 소급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에 대해서 교토대학의 하네다 교수가 말한 것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말하자면 박트리아 왕국의 그리스 인에 대한 교화 활도잉 증명되었다. 시리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등으로 포교사를 파견했다는 일도 아마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B.C1세기에 박트리아와 그디아나에서 불교가 신봉되고 있었다는 생각도 이상할 게 없다, 기원 전후 무렵에는 불교가 파미르를 넘어, 타림 분지로부터 중국에 전래되었다고 보오다 전혀 억측은 아닐 것이다. 다만 페르시아 본토의 형편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조로아스터교 내지 그것과 비슷한 신앙이 지배적이었던 중앙아시아에서 불교는 그렇게 교세가 강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동서문화의 교류> 이와나미 강좌 중-
전래돼 불교의 성격과 수용상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먼저 불교를 개창한 성자 석존의 가르침으로서 중국인에게 전해진 불교는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그의 생생한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석존이 입멸하고 난 뒤 원래의 석존의 가르침은 개개인에 따라 적절하게 교설된 내용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사람들에게 활용될 수가 있었습니다만 교범의 공인을 기록화하여 언어 표현에 사로잡혀 유연성과 탄력성을 결여하게 되고, 결국은 사람들에게 자유자재로 활용되는 성격을 상실되게 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인격적인 분위기와 인격적인 대응이 결여된 불교였습니다. 그리고 석존이 입멸한지 500년이 지난 뒤 인도의 불교는 세부적으로 변화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세부적이고 복잡 다양한 불교들이 전도승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중국에 한꺼번에 전래가 되게 됩니다. 결국 다양한 불교가 성립하기까지 역사적인 모든 일들이 나중에는 중국불교의 특색을 나타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에 전해질 때에는 이미 유교와 도교가 성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무심결에 인도의 경전을 번역하는 단계에서 유교의 영향을 받기도 하며 처음의 불교는 민간적인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민간인들에게 전래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민간 사회에 유행했던 허무사상과 민속신앙인 도교의 신선화와 장생불로 어느 정도 주술이나 기도를 허용하는 불교로 발전하게 됩니다.
제1기설-한.위.진에서의 불교수용과 그 전개
후한시대의 숭불과 배경에는 후한의 왕실 출신자인 초나라국왕 영의 숭불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영은 사문이 중국인인지 서역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공양을 하였고 무슨 목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황제, 노자 그리고 붓다를 신으로 모시고 받들었습니다. 그리고 영이 황제, 노자, 붓다를 모두 신으로 받아들였는데도 명제가 전혀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때에 이미 외래불교에 대한 신앙을 공인한 것이라고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의 자리 즉 왕족을 시작해서 귀족들의 서방 탐방이 잦아들면서 귀족들이 서역에 대해서 취미도 가지게 되고 불교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게 됩니다. 한 예로 "황제께서는 붓다나 노자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습니다만 그 행하는 바는 오로지 하고 싶은 대로 행하며 살생을 누누이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욕심을 적게 가지고, 교만을 버리며, 살아있는 것을 사랑하고. 살생은 싫어하는 붓다나 나조의 근본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붓다나 노자의 은총을 입는 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입니다." 양해의 글 속에서와 같이 석존의 수행이나 교단의 규정에 대한 약간의 지식은 이미 한인 사회에 불교가 수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후한시대의 불교는 중국 여러 곳에서 일어났지만 특히 낙양과 건강을 중심으로 크게 성행하였습니다. 낙양에는 이미 서방의 여러 민족들이 거쳐가는 묵는 중심지이기 때문에 불교가 성행하였고, 그보다 조금 먼 건강에는 이 2사람의 역할이 컸습니다. 먼저 지겸 이라는 인물인데 지겸은 <요본생사경주>를 찬술하고 그 주석은 전진의 도안이 칭찬한 듯이 불교의 이해를 돕는데 유용하게 쓰여졌다고 합니다. 또 지겸은 유마힐경2권 대명도경6권대아미타경2권 등 많은 경전을 번역했습니다.
제2기설- 화북 호족국가에 불교 형성
화북 호족 국가 시절에 가장 큰 인물로서 손꼽으라면 이 인물 불도징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석륵의 군사고 문으로서 구자국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계빈국에서 불교를 배우고, 후에 불교를 보급시키기 위해 중국에 들어온 전도승이었습니다. 그는 지계가 견고하고 욕심이 없는 출가자였기 때문에 만명에 가까운 문도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또 지방을 순방하며 많은 불교사원을 건립하여 승려들을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석도안과 구마라즙이 있습니다. 먼저 석도안은 증일아함경이라는 서문이 있는데 이것을 �역할때 도안의 나이가 73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법하와 함께 교정을 담당하며 번역에 협력하고 있었던 점은 분명 불교사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제3기설 이민족 지배하의 불교
이민족 지배하 전에 불교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자면 강남 한족국가를 설명 할 수 있습니다.
제4기설-수당의 국가통일과 불교
수당의 시기 때는 불교의 전성기라고도 불 수 있습니다.수의 남북 통일로 전통인 유고적인 덕치주의의 실현을 이상으로 삼고, 권학행례의 칙소를 발표했으며 치국입신은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위에 국자학을 태학으로 개편하여 72명의 학생을 정원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교를 주축으로 삼았으며, 유교와 도교는 부차적인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우선 수나라의 남북 통일과 수나라 왕조의 불교부흥에 대한 상황고 그 특색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고조는 북주를 계승하여 연호를 개황으로 고치고 , 윤 3월에는 5악에 불교 사원을 각기 하나 식 설치하였다. 7월에는 양양 수군 강릉 진양의 네 군데에도 관사를 설치하여 불교의 부흥에 착수했습니다. 이 산들을 불교화하려고 했던 것은,문제가 불교적인 사상에 입각하여 나라를 다스리려는 정책을 표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죽위와 동시에 관사를 설치하였으며, 곧 구각를 위하여 불교의 법요식을 거행하게 했습니다. 또 45개주에 대흥 국사를 설치하고, 담연의 주청에 따라 1천명을 득도 시켰으며, 승관을 임명하는 등 일련의 부흥 사업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턴으로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양견)의 불교 신앙은 단순히 국가의 통일 정책을 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583년에는 정월, 5월, 9월의 6재일에 살생을 금지한다는 소칙을 발표하고, 585년에는 연흥사,. 광명사, 정영사 등을 창건하였으며, 스스로 법경에게서 보살게를 받고 보살 황제라고 자칭했습니다. 역대 왕조의 불교 보호 아래서 번영했던 남조 불교는, 삼보의 노복으로 불리면 사신공양으로 유명한 양무제의 불교 신봉에 의해 극성기를 누립니다. 수나라 왕자고 취한 불교정책의 특색은 건국 초창기에 45개주에 대흥국사를 설치한 일을 우선적으로 거론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그 기능이나 기구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치의 중심지인 45개주에 동일한 명칭의 절을 세웠던 것은. 그의 중앙집권을 목적으로 하고 있던 정책과 관계가 깊습니다. 아마도 종교정책으로서 당나라 왕조에 설치되었던 각주의 관사조직은.
문제의 이러한 의도를 계승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나라의 흥세도 결국엔 극한 호화로운
- 관제사찰: 수나라와 당나라의 불교가 국가 불교적인 성격을 지닌 일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각 주에 관제사찰을 설치한 일에서 잘 나타납니다. 각 주에 동일한 절 이름을 가진 사원을 설치하여, 불교를 국가의 중앙집권 기구 속에서 통일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이처럼 이들 관제사찰들은 모두 수나라와 당나라의 국가통제 정책과 관계가 깊습니다.
-대흥국사: 문제는 개황연간에 수도와 각 주의 간제사찰을 중심으로 불교행사를 부흥시키고, 인수 원년 이래 3회에 걸쳐 왕실에 소장하고 있는 사리를 각 주에 나누어주어 사리탑을 세우고 있습니다. 또 장안의 대흥선사나 각 주에 대흥국사를 설치한 일도 북주 무제의 폐불 이후의 불교부흥정책 일환으로도 보입니다.
-내도량: 한 주에 한 곳에 설치된 관제사찰과 도관이 국가적인 성격을 지닌다면 내도량은 황제와 그 일가의 사적인 불당과 도관의 성격을 지니며, 궁중 안의 종교적인 범회를 거행하는 도량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내도량은 수나라 왕조때, 복등전에 불상과 경전을 안치했던 것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내도량의 성격은 황제와 황실의 사적인 기원이나 구복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항상 임할 수 없었던 성밖의 관제사찰이나 기타 다른 곳에서 행해지는 불교신앙과 행사를 직접 궁중 안의 눈 앞에서 자행하게 할 수 있는 점과, 또 덕이 높은 승려를 선발하여 궁중으로 초빙한다는 의도가 강하기 담겨져 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승관: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한문 문화권 불교국가에서는 불교계나 승려들을 통제하고 관장하는 승려를 국가에서 임명합니다. 이는 불교가 국가나 왕조의 강력한 비오 아래 융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반면에, 국가권력의 직접적인 지배를 피하여 관리와 승려의 중간에 하나의 완충지대를 설치했다는 의미도 지닙니다., 그러나 인도불교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매우 특이한 모습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교단의 통제기관인 승관제도는 왕조에 다라 사문통. 승통. 소현통이란 이름으로 바뀌며, 북조시대에는 중앙과 지방에도 증설됩니다.
조금 전의 내용이 수당시대의 기관과 제도였다면 이번에는 수당시대의 여러 중국불교에 대해서 아주 간략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원래는 이때의 불교 학파 하나하나가 지극히 중요하지만 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간략하게 소개만 해드리고 궁금하신 분들은 질문은 가급적 피해주시고 개인적으로 조사해 주시길 바랍니다. 각 종파가 지닌 특색을 표면에 드러내어서 5개의 중요사상과 학파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수나라시대의 장안불교: 열반학파, 지론학파, 섭론학파, 강남불교
-인도불교의 추구와 새로 전래된 불교: 삼론교학 , 유가불교(그림현장삼장),밀교(선무외와 금강지 그림)
-사상을 추구하는 불교: 천태종,화엄교학
-수행과 믿음의 불교: 선(5가의분파 그림), 정토교, 삼계교
-율종의 성립과 보살계: 율종, 보살계
제5기설-당말과 오대의 불교
당나라 말기 불교의 쇠퇴를 재촉했던 사건은 불교도태 명령에서 시작하는 무제의 폐불 철퇴였다, 도교신자였던 무제는 842년에 우선 승니의 정리에 착수하고, 궁궐내부에서의 행사는 도교를 한정시켰다. 845년 3월 3일 이 기간에 폐진 사찰은 4만4천여 곳 환속 승니는 26만여 명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이처럼 무종의 폐불은 수년간에 걸쳐 불교의 고세를 격감 시겼습니다. 마지막에는 거의 자멸돼 각 주에 한군데의 사찰만이 남이 있는 듯 북위나 북주의 폐불보다 훨씬 정치적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무종의 사망으로 즉위한 선제가 불교중흥에 착수하는데 이듬해 860년경부터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폭동이 일어나고 전매제였던 서금을 밀매하던 사람인 황소가 산동에서 거병하는 등 난이 일어나 다섯 왕조로 분하게 된다. 이러 난세를 통하여 불교는 쇠망하였으며 불전은 흐터지게 된다. 그러나 무종의 페불에 의해 불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예로 원진의 <행력초>에 의해서도 불교가 여전히 커다란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잇습니다. 오대의 역대왕조도 황제의 탄생일이나 국기에는 백관들로 하여금 사원을 찾아가게 하여
이와 같이 중국에서 전래되고 민간인들에게 믿어지고 도교와 유교와 병행하며 융합되는 불교의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중국의 그 유창한 역사 속에 불교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는 것에는 위에 언급했던 윗사람의 정책효과와 뛰어난 인물들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때 당시의 민간인들의 심리 속에서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또 그 불교를 생활 속에서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세적인 것을 중시하는 중국 교유의 사상. 문화. 습속 중에 인과응보를 설하는 불교가 수용되기 위해서는 심원한 불교철학보다는 사회의 일반 대중에게 수용되기 쉬운 신비와 기적, 그리고 현세적인 행복을 설하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이처럼 수당나라시대의 번역된 경전을 보면은 대중들에게 다가서기 위해서 현세이익적인 측면에서 탈피하여 5역 4중죄를 지어하기 위한 신앙의식과 규칙이 시행하고 갖가지 에참이 만들어지면서 현세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사리신앙이나 시왕신앙처럼 민간인들에 의해서 일어난 불교행사가 있는데 이는 불교행사 자체가 오락적인 의미를 겸하여 민중의 의식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불교의 철학적인 측면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중국 고유사상과의 융합이란 차원에서 유교의 효윤리와 불교의 결합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유교의 인의예지신의 5상과 5계의 배를 합니다 <부모은중경>이란 책에서 나타납니다.
이처럼 대중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불교의 형태는 곧 예술과 문화로도 나타나게 됩니다. 그 중 하나로 석굴불교를 들 수 있습니다. 중국불교의 특색 가운데 하나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석굴사원이 있습니다. 부위로부터 수당오대송나라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조성되어서 그 25개 석굴이 조성되는 내용은 중국의 불교사. 예술사의 흐름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석굴외에도 사원건축으로 수도나 성내에서 민간인들이 계속 볼 수 있게끔 조성해놓기도 했습니다. 그 규모나 화려함이 극히 뛰어나 대중들의 눈을 혹하게 만들기고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교예술은 그 시대의 뛰어난 인물화가나 조각가 들에 의해서 교예의 전성기를 이루기도 합니다. 민중들에게는 불교용품이 전해지고 불교를 보호하거나 교화하기 위해서 음곡을 붙여서 읊조리게 끔 불교음악도 만들었습니다.
국립 안동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중국문화의 이해 발표 수업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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