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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이야기 9] 유대인의 격언 / '돈의 가치'

지식창고지기 2010. 8. 5. 01:51

[탈무드 이야기 9]

유대인의 격언 / '돈의 가치'

 

 

두툼한 돈지갑이 반드시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빈지갑이 좋은 것도 아니다. 텅비어 있는 것인데도 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빈 돈지갑이다.

 

물건이 가득 들어 있는 주머니는 무겁다. 그러나 비어 있는 주머니가 더 무겁다는 속담도 있다. 유태인들 사회에는 돈(금전)에 관한 속담이나 격언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 해도 헤아일 수 없을 정도이다.

 

돈, 돈, 돈, 돈이 없이는 우리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돈, 돈, 돈, 성서는 우리에게 빛을 주고 돈은 우리에게 따뜻함을 안겨준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중대사가 있는데, 그 첫째가 돈, 둘째도 돈, 셋째 또한 돈이다. 돈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돈이란 어떠한 더러움도 씻어내 주는 비누와 같다.

 

돈의 힘은 막강하다. 돈 앞에는 욕설도 잠잠해 진다. 돈은 가벼운 것이다. 아무리 무거운 돈지갑이라도 이것을 무겁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유태인들은 마음이 흡족해 있을 때에는 '아이, 이, 이'하고 소리치며, 고통에 빠져 있을 때에는 '오이, 오이, 오이'하고 외친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많을 때는 언제나 '아이, 이, 이'라고만 외친다는 말은 아니다. 또 반대로 돈이 없을 때는 언제나 '오이, 오이, 오이'라고 외친다.

 

어쨋든 유태인에 있어 돈은 위대한 것이다. 인격자인양 돈이 인생을 더럽혔다고 비난하지는 말자. 돈보다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훨씬 위에 자리잡고 있다. 돈 때문에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잃을 수는 없지 않은가?

 

돈은 벌기는 쉽다. 하지만 돈을 쓰기는 더 어렵다. 어는 누구이든 자기 나름대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돈을 옳게 쓰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있겠는가?

 

돈의 주인은 인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돈을 불가사의한 마력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물건들을 써 본 뒤에는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돈은 스스로 만들어 보지 않고는 그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없다.

 

'쓸수 있는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바르게 쓰는 법까지 알고 있으면 더욱 좋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돈이 우리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표현하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이 돈보다 우월하다는 감정을 지닐 수가 있겠는가?

 

'돈은 모든 것들을 소유할 수 있다. 값지고 알찬 취미 말고는...'이라든가' 어진 사람에게 있어서의 돈은 미녀에게 아름다운 옷을 안겨주는 정도밖에는 소용이 없다'라는 속담도 있다.

 

유태인들은 돈을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여긴다. 그것은 모든 책임을 돈에게 떠맡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돈을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는 만능의 것도 아니다. 돈이 좋게 되고 나쁘게 되고는 돈을 소유한 인간에게 달려 있다. 여기에서 내가 자주 되풀이하는 것이지만, 유태인들은 중용 즉 생활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특히 이중에서도 돈에 대한 균형 감각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돈을 벌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을 벌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많은 나라 사람들은 돈을 말할 때 동그라미 모양으로 나타낸다. 유태인의 속담 가운데에도 이와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은화는 둥글기 때문에 이쪽으로 저쪽으로도 구할 수 있다'와 같은 것이다.

 

우리들은 매일 이러한 은화를 쫓아다니며 바쁘게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평생 동안 이 밖에도 쫓아다녀야 할 것이 더 많다

 

돈은 기회를 만들어 준다.

 

유태인들은 돈을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으로비평하지도 않는다. 돈이 있으면 인생살이에 다양한 것을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이름을 얻게 된 것이 그것이다. 유태인들이 이름과 성을 갖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이다. 그 이전에는 아무개의 아들 누구라든가 가수, 거울집, 꼬마등으로 사는 곳이나 직업 그리고 외견상 특징을 따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이후부터 오스트리아의 요셉 2세에 이어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와 프러시아 정부가 잇달아 유태인을 통치하기 위해 유태인 등록장부를 만들면서 이들에게 성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고 마음대로 이름과 성을 가질 수는 없었다.

 

이들을 지배한 지배국들은 유태인들을 약탈하기 위해 좋은 이름은 비싼 값에, 나쁜 이름은 싼 값으로 붙여 장미(로젠탈), 철(아이젠버그)와 같은 이름을 붙여 주었다. 반대로 싼값의 이름에는 늑대와 같은 동물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아예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이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지방 궁둥이와 같은 천박한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이름을 고쳐 이런 종류의 이름은 없다.

 

이 세상 어느 나라이고 이름을 돈으로 사서 붙이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돈이 우리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바르고, 부자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미드라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어떤 두 사람이 찾아와 서로 다른 말들을 했다고 가정하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이고 한 사람은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 때 당신은 과연 어느 편의 말을 진실한 말로 믿을 것인가?

 

답변은 이렇다. 부자라고 해서 언제나 거짓말만 할 수는 없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올바르게 살아간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이와 반대의 답변도 물론 가능하다.

 

돈이라 악함도 저주도 아니며, 인간을 축복하는 것이다. '부자와 현자 가운데 어느쪽이 더 위대할까'하고 랍비의 제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랍비에게 물었다.

 

[그거야 현자가 더 위대하겠지.]

 

랍비가 대답하자, 제자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왜 부자집에는 현자고 학자고 모두 출입하는데, 현자의 집에는 부자들은 찾아들지 않을까요?]

 

랍비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현자나 학자는 현명하므로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부자는 단지 돈만 가지고 있을 뿐 현자로부터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지.]

 

돈이란 결코 모든 것을 좋게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들을 썩게 하지도 않는다. 돈이란 도구의 일종이다. 모든 것을 좋게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들을 썩게 하지도 않는다.

 

돈이란 도구의 일종이다. 그러므로 돈이 인간 생활에서의 모든 것들을 밝헤 또는 빛을 내게 한다는 생각이나 혹은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돈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목적일 수는 없다. 진실로 인간다운 것은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을 지배하는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성서>의 창세기편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지배하게 하는 동시에 보다 좋은 대상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 이 지상을 인간에게 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돈이란 어쨋든 사람보다는 아래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잊고 있다. 반면에 돈을 천시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이 또한 옳지 않다. 돈이란 그 쓰기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그 밖에 다른 문제는 없다.

 

우리는 돈을 소홀하게 여기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돈은 추악한 것이다 하여 관심조차 없는 체 돈을 소홀하게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돈을 두려워하는 행위일 뿐이다.

 

돈이란 인정없는 주인이기도 하지만, 반면 유익한 심부름꾼일 수도 있다.

 

많은 민족들이 나라를 세우고 그들의 역사를 창조해 가고 있는 동안에 유태인들은 어둠 속에서 끊임없는 박해를 받아 왔다.

유태인은 유태인들만이 살 수 있는 제한된 지역으로 밀려났고, 땅을 가지는거나 물건을 만들어 파는 것조차 법률에 저촉되어 금지당했다. 게다가 살고 있는 지역으로부터도 언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조국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면 자기들이 살고 있는 땅의 나무, 돌, 시냇물 같은 것들을 가깝게 느낄 수가 있으리라. 하지만 오늘날의 유태인들도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정말로 오랜 슬픔의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어 과연 무엇이 힘이 되고, 무엇이 그들을 지탱하게 해 주는 기둥이 되겠는가? 그것은 돈뿐이다.

 

특히 유태인들은 기독교 사회에서처럼 돈을 천시하거나 돈이 죄를 낳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돈은 쓰기에 따라서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돈 그 자치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오히려 돈은 우리에게 갖가지의 온갖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돌처럼 굳어진 마음은 황금망치로만 풀 수 있다. 돈이 가지고 있는 막강한 힘에 대한 속담이다.인정하기에 마음 아픈 일이지만 우리 인간 생할에서 돈의 힘이란 실로 막강한 것이다.

 

'돈은 닫혀 있는 모든 문을 열수 있다'라고도 한다. 가정에 돈이 넉넉하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가정에 넉넉한 돈이 있으면 평화로움이 깃든다'고 한다. 사실이다.

 

집안에 여유있는 돈이 있으면 가정의 화평이 보장될 가능성이 크며, 돈이 없는 가정에서 불편함과 잦은 불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고 마찬가지이다.

 

<유태인의 율령집(1565년 출간)>에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부유함을 원하고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국부론>보다도 앞선 기록이다. 유태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돈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살아온 만큼 돈은 인간 생활의 최대 문제의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유태인들은 길가에서 듣는 랍비의 설교 한마디보다는 단돈 10달러의 돈을 더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특별히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돈에 대한 걱정을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파는 것은 상술이 아니다. 진정한 상술이란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물건을 그것이 필요치 않은 사람에게 파는 것이다.

 

엽총이 필요한 에스키모에게 자기의 엽총을 파는 것은 상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한 행위는 누구이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상술이란 당신에게도 없는 제빙기를 그것이 전혀 필요하지도 않은 에스키모에게 팔아 먹는 것이다. 그리고 물건을 사들인 상대편도 자기의 구매 행위에 만족감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

 

장사의 도리는 매우 철저한 것이다. 유태인들은 특히 중세부터 오랜기간 동안을 압박 속에 살아온 탓으로 정당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유태인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중개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철저한 장사꾼으로 길들여져 갔다. 지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애써 팔고 나서는 곧 똑같은 물건을 찾아 헤맨다는 웃지못할 이야기도있다. 대부분의 유능한 장사꾼들은 모두 이런 방법에 의해 단련되어졌다.

 

부자를 칭송하는 사람은 그 부자보다는 돈을 칭송하는 것이다.

 

인간이 권력자를 공경하는 것은 그 권력자가 자신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권력 자치에 대한 공경일 뿐이다. 어느날 랍비를 찾아온 두 사람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그 지역에서 손꼽는 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몹시 가난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좀 일찍 도착한 부자가 먼저 랍비의 방에 들어간 뒤 한 시간만에 나왔다.

 

그 다음 가난한 사람이 들어가 그는 5분만에 랍비의 방을 나왔다. 가난한 사람이 항의하였다.

 

[부자와의 상담은 한 시간이고, 왜 나와는 단 5분에 끝나야 합니까? 이래도 공평하다고 할 수 있나요.]

 

랍비는 자상한 얼굴에 웃음을 띠며 대답하였다.

 

[오해를 푸시오. 당신은 자기 스스로 가난하다는 사실을 곧 알았지만, 부자는 자기의 마음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1시간이나 걸렸기 때문이오.]

 

필요한 돈을 빌리는 것은 마치 가려운 곳을 긁는 것과 같다. 우리가 피부병에 걸려 무엇이 몹시 가렵다. 이때 손으로 긁어 가려움을 없앤다고 하여 근본적으로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시적인 변통은 될지 몰라도 병은 더 도지게 된다.

 

손으로 긁으면 물론 잠시 동안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빚을 지는 것도 이와 같다 하여 여기에 대한 경계의 격언이다. 모든 것의 근본부터 치유해야만 옳은 것이다. 많은 것을 가진 부자에게는 자식은 없고 상속인만이 있다.

 

돈이란 오랜 세월 동안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져 왔기 때문에 찬 느낌을 받게 된다. 한 여름에 동전에 손을 대어보면 역시 차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이 귀한 금전을 손에 움켜쥐어 거기에 따뜻한 온기를 넣어준다.

 

부자들은 돈을 대부분 궤짝이나 은행에 모아 두기 때문에 사람과의 접촉이 없어 금속만의 싸늘함을 늘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돈이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 따라 따뜻하게도 할 수 있고 본래의 차디찬 대로 만들 수도 있다. 이 모두가 사람에 달려 있다.

 

부자들은 항상 돈 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금전의 싸늘함이 자신이나 자기 가족들에게 전해져 피와 마음까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음을 모른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많은 부자는 자식이 있어도, 그는 진정한 의미의 자식이 아니라 오직 재산을 물려받는 상속인에 그칠 수 밖에 없다.

 

돈이란 선인에게는 좋은 것을, 악인에게는 나쁜 것을 안겨 준다. 유태인들은 기독교의 교인들처럼 인간의 몸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주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몸이란 모든 욕망의 원천이므로 인간의 육체에는 죄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이와 반대로 사람의 몸은 맑은 정신이 담긴 그릇이므로 이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여 육체 자체가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돈에 대한 유태인들의 생각도 이와 같다. 돈 그 자체에서는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이고 생겨나지않는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돈은 악의 원천이고 죄악의 하나라고 생각하여 왔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유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돈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 못한 탓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육체나 돈이 인간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아 그것이 우리 인간을 지배한다고 여긴 탓으로 돈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재물이 많으면 그만큼 걱정거리도 늘어나지만, 재물이 전혀 없으면 걱정거리가 더 많다.

 

기독교에서는 흔히 돈을 비롯한 물질들을 비천한 것으로 여겨 소홀히 한다. 카톨릭의 신부는 검은 옷에다 흰 칼라를 달아 입어 청빈을 표시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에서는 큰 재물을 소유하는 것을 죄악으로 보고 있지만, 로마의 법왕청은 청빈보다는 재물이 적지 않은 우리들과 같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에서는 재물을 멀리하고 있는가? 기독교에서는 청빈이 미덕이며, 돈이나 여자 관계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자랑이 될 수가 있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물질의 풍요와 쾌락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풍요와 쾌락에 빠지면 자기 스스로가 그 물질에 지배를 받는다는 생각에서이다. 하지만 유태인들은 항상 지나쳐서는 안된다는 율법에 따라 스스로 규율을 지키고 있으며, 그 믿음에 따라 어떠한 풍요나 쾌락도 무서워하지 않는다.자신들의 율법을 지키며 스스로 규ㅇ을 확립하므로 어떠한 부나 쾌락도 쉽게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닷가에서 발을 굳건하게 딛고 서 있으면 흔들림이 없지만, 불안정하게 서 있으면 파도에 발을 빼앗기고'고 <탈무드>는 적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물과 여자의 유혹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인생의 풍요와 즐거움을 잃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모두 스스로 자기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돈이란 옷이 우리에게 베푸는 역할 밖에는 해 주지 못한다.

 

돈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만능의 것이라면 의복도 또한 만능이다. 돈이 많이 있다고 해도, 그 돈으로 인간의 본질을 바꾸어 놓을 순느 없다. 이것은 마치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고 있어도 옷 속의 묻힌 인간까지 변화시킬 수 없는 거와 같다.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다름아닌 그 사람 자신뿐이다. 하지만 돈이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다. 몬에 잘 맞는 좋은 옷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풍요로운 물질만을 숭배하고 따라서는 안된다. 이러한 사람이 우습게 보이는 것은 물질만을 따라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숭배물에 가깝게 하고 싶어하며, 또 그것에 쉽게 물들어 간다.

 

그러므로 물질에 빠진 사람은 그 자신마저도 물질이 되고 만다. 우리 인간이 옷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은 돈이나 물질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반대의 경우가 된다면 인간은 한낱 옷걸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가난함은 수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명예로움도 아니다.

 

유태인 사회에는 청빈에 대한 관념이 기독교나 동양처럼 강력하지가 않다. 그들은 돈을 선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지만 '돈은 우리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 생활에서는 돈의 힘으로 많은 것들을 실현시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난은 문학 속에서는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가정에서는 고통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가난함을 설교를 통해 들으면 한없이 맑고 깨끗한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의 우리 생활에서는 비참할 뿐이나, 유태교에서는 가난함을 찬양하는 설교같은건 아예 없다.

 

우리는 돈에 굴복하여 찬양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그렇다고 돈을 추하게 여겨서도 안된다. 유태인들은 기독교인들이 금전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돈은 추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오히려 우리 인간 생활에 필요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어쨋든 돈은 우리에게 유용한 것이므로 가능하다면 많이 가지는 것이 좋다. 그 뒤에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도 돈을 소유한 사람의 지혜에 달려 있다. 돈이 없는 가난함을 청빈으로 찬양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가난한 사람에게서 돈을 차용하는 것은 마치 추녀에게 키스하는 것과 같다.

 

유태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가난함 속에 살아왔으므로 서로간 돈을 융통해 썼다. 그 때문에 돈을 빌려 주고 꾸는 것에 관련된 속담이 특히 많다.

 

이러한 속담에 특별한 설명을 덧붙일 것은 없다. 그러나 돈을 차용하는 행위에 관련된 속담에는 빌려주는 법과 빌리는 법을 말하기에 앞서 남에게 돈을 빌리는 그 자체를 훈계하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유태인들이 돈을 천대시했거나 돈을 남에게 빌려주고 그 댓가로 금리를 받는 일을 죄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자주 유태인과 기독교인들이 돈과 여자를 대하는 태도를 비교해 보지만, 결론은 돈이고 여자이고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아주 유용한 것이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유태인들은 인간에게 유용한 것이라면 악하지도 죄악도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중세 유럽에서 유태인들에게만은 돈을 빌려주는 일이 많았던 사실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을 수 없는 기독교인들과의 교제가 막혔기 때문이었다. 돈을 융통해주거나 차용하는 일이 결코 도덕 생활에 어긋나는 행위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것이 유쾌한 일도 아니다.

 

'친구를 원수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을 빌려주는 일이다.' 이 속담은 유태인 사회의 전형적인 것이다.

 

매춘부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녀는 비가 온다고 말한다.

 

매춘부란 직업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직업'으로알려져 있다. 성서에도 매춘부가 등장하며, 실제로 중세 유태인들의 생활 지역에는 매춘부의 직업을 가진 여자가 많았다. 지금의 유태인은 모두 열심히 살아온 보람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되어 유태인 매춘부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가령 매춘부의 얼굴에다 대고 침을 뱉았을 경우 그 여자가 '어머나 비가 오네요!' 하고 딴청을 부린다는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매춘부란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고 가리지 않는사람이 어디 매춘부뿐이겠는가? 좀 우스운 예를 들어보면, 가령 누구에게 1000원을 주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면 '비가 오는군'하고 대답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1000원이 아니라 돈의 액수가 몇 천만원, 몇 억원이라면 아마 그 결과는 바뀌지 않을까?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에는 증인을 세우고, 적선할 때는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하라. <탈무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랍비가 자기 친구로부터 돈을 빌릴 형편이 되었다. 그러나 친구는 차용증서는 물론 증인까지 입회시키라는 것이었다. 랍비는 친구의 우정이 의심스러워 물었다.

 

[자네는 나를 믿지 못한단 말이군, 나는 율법 연구의 권위자가 아닌가?]

 

[바로 그 점이 걱정일세, 자네는 율법 연구에만 몰두하여 마음이 율법에만 차 있으므로 남에게 진 빚같은 건 잊어버릴 테니까.]

 

어떤 랍비가 큰길에서 거지에게 돈을 주어 적선하자 다른 랍비가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적선하려면 차라리 안 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또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적선하는 사람은 모세보다도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