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초,한楚,漢 ( BC221~206 ) - 역발산기개세 - 항우와 유방의 등장

지식창고지기 2009. 6. 1. 09:22

역발산기개세 -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의 등장

(力拔山氣蓋世)


진승과 오광의 농민봉기를 기폭제로, 전국각지에서 일어난 진(秦)왕조 타도의 물결은

마침내 항우(項羽) 와 유방(劉邦)의 숨막히는 각축전으로 집약되었다.


항우는 지금의 감소성 숙천현(宿遷縣)출신으로 이름은 적(籍)이고 자는 우(羽)이다.

항씨 집안은 대대로 초나라 장군을 지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항(項)을 봉읍지로

받았으므로 항씨가 되었다.


항우는 일찍이 숙부 항량(項梁)에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항양의 부친은 바로 초나라의

맹장 항연이었다.

그는 진의 장군 왕전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자살하였으므로, 항량과 항우는 진나라에

대하여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항우는 키가 8척이나 되며, 재능과 체력이 뛰어났다.

그는 어린시절 학문과 검술을 도통 제대로 배우려 하지 않았다.

숙부인 항량인 크게 실망하여 꾸짖자 항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문은 성과 이름을 쓸수 있을정도면 되고, 검술은 한사람의 적과 대항하는 것뿐입니다.

이런것들은 대장부가 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만인의 적을 상대해 싸울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항량은 항우의 이같은 기백을 기특히 여겨 그후로 병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후 진시황이 순행을 하던도중 회계를 지날 때 그 거창한 행렬을 바라보고 있던 항우는

“저놈의 자리를 내가 대신하겠다.”라고 말했다.

항우의 나이 22세였다.

그후 진승과 오광의 봉기소식을 접하자 항우또한 숙부 항량과 함께 거사를 도모, 회계군수

은통(殷通)을 죽이고 그의 인수(印綬)를 빼앗아 자신의 몸에 찼다.

인수(印綬)는 관리의 신분증명서와 같은것인데, 군수의 인수를 몸에 찼다는 것은 자신이 곧

군수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항량은 거사의 목적을 회계의 백성들에게 고한 후 회계의 장관이 되었고,

항우는 그 부장(副將)이 되어 군사를 모았다.

그러자 한순간에 무려 8천이나 되는 장병이 모여들었다.

항량이 항연의 아들이라는 것 만으로도 초나라 사람들의 신망을 받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항량과 항우가 진으로 향하자 군사를 이끌고 가담하는자가 끊임없이 모여들어

항량의 군사는 어느새 10만의 대군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진승이 진나라의 군대에 패하여 죽은후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의 새로운 구심점

으로 등장하였는데, 이즈음 범증(范增)이라는 지혜로운 노인이 항량을 찾아왔다.

그는 항량에게 봉기한 장수들이 항량의 휘하로 들어오는 이유를 초나라의 장수를

지낸혈통으로 당연히 초의 왕족을 왕족으로 세우리라 믿기때문이라 진언하고, 이런 범증의

간언을 받아들인 항량은 진나라에서 객사한 회왕의 손자인 심(心)을 옹립하여 조부와

똑같은 회왕(懷王)이라 칭하였다.


이윽고 항량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동아(東阿:산동성)에서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였고, 더 전진하여 정도(定陶)에서 다시 진의 군대를 쳐부수었다.

연이은 승리에 빠진 항량은 진의 군대를 깔보고 교만해졌고, 그를 염려한 송의(宋義)가

이를 간언하였으나, 항량은 듣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그 사이 진나라는 관중(關中)의 전군대를 차례로 투입하여 장군 장한(章邯)의

군대를 보강하여 항량의 허를찔러 정도를 공략하여, 이 전투에서 항량은 전사하고 군사들은

태반이 죽임을 당했다.

진의 장한은 이 승세를 몰아 황하를 건너 조나라군을 거록(鉅鹿:하북성)에서 포위하였다.

이에 회왕은 정도의 패전소식을 접하자 송의를 상장으로 삼고, 항우를 차장, 범증을

말장으로 임명하고 그들로 하여금 조나라 지방을 평정케 했다.


한편 초의 회왕은 함양(진나라 수도)을 함락시켜 진을 평정하는데 적임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되자, 난폭하고 직선적인 항우보다는 나이가 지긋하고 온후한 유방이

적당하다는 대신들의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항우를 제외하고 유방을 선발할 수는 없었으므로, 회왕은 여러 제후와 장수들에게

“맨먼저 관중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평정하는 자를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 는 명을 내렸다.

회왕의 이런 계획은 항우가 조나라를 구원하러 가야하는 틈을타 유방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한 것이었다.


한편 유방((劉邦)은 귀족출신인 항우와는 달리 농민의 아들 출신으로서 패(沛)출신 이었다.

나면서부터 콧날이 높고 용의 얼굴을 닮았으며, 왼쪽 다리에는 72개의 사마귀가 있었다고 한다.

사람을 아끼고 활달하였으며, 큰 도량이 있어 만사에 대범하였다.

그또한 함양에서 부역에 종사할 때 시황제의 위풍당당한 행렬을 보고는

“대장부로 태어나서 한번쯤 저렇게 되어야 하는데.”라며 탄식하였다.

그후 당대의 유명한 관상가인 여공(呂公)은 유방의 비상한 관상을 보고는 여식을 아내로

맡게해 달라하여 자신의 딸을 유방에게 주었다.

이 여인이 바로 후일 황제의 부인이되는 여후(呂后)이다.


유방은 지장관리의 직책을 가진자 였는데, 여산릉의 공사에 동원되는 인부들의 통솔을

맡아 여산으로 떠나는 도중 이탈자가 속출하였다.

그리하여 상황을 보니 여산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도망쳐 버릴테고, 패로 돌아간다해도

죽음만이 기다릴 것이기에, 유방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당신들 모두 도망가시오, 나또한 이대로 도망가리다.”

유방이 인부들을 해산시키자, 그중 수십명은 유방을 따랐다.

유방은 점점 모여드는 사람들을 모아 패현의 장관을 죽이고 추대되어, 패공(沛公)이라

불려졌다.

그는 조참(曹參)과 소하(蕭何)등을 등용하고 군사를 모으니 그 수가 3,000명에 이르렀다.


유방이 3천의 고을 사람으로 군사를 일으킨 반면 항우는 정병 8천으로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 타도의 기치를 올린 것이다.


한편 조나라를 구원하러간 송의의 군대는 안양(安陽-하남성과 하북성의 경계지)까지

진격하여 그곳에서 40여일이나 머무른채 대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항우는 오금이 쑤셔 견딜 수 가 없었다.

너무 오래 지체하자 유방이 한중으로 들어가 한중왕이 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참다못한 항우는 마침내 송의의 장막으로 들어가 송의를 목베고 스스로

상장군이되어 전군에 3일분만의 식량을 휴대하게끔하고, 배와 취사용 도구들을 모두

부수게 하였다.

이렇게 전군의 사기를 고취시켜 9차례에 걸친 맹공격으로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여

그 장수 왕리(王離)를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항복한 진의 군사들을 모두 생매장 시켰다.

또한 연이어 진의 군대를 격파한 항우는 함양을 향하여 진군하였는데, 그가 함곡관에

도달했을때에는 벌써 유방의 군대가 이미 한중에 입성한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유방이 이미 관중에 들어가 함양을 함락시키고, 진왕 자영(子?) 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항우는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항우는 단숨에 함곡관을 쳐부수려 하였으나, 함곡관을 지키던 군사와 유방을 흠모하던

백성들의 거센 저항으로 쉬이 함락시킬 수 없었다.

그러자 항우는 경포를 시켜 먼저 사잇길로 쳐들어가 함곡관아래에 잇는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마침내 함곡관을 깨뜨릴 수 있었다.


함곡관을 함락시킨 항우는 회수의 서쪽까지 군대를 진격시켜 홍문(鴻門)에서 유방의 군대와

대치하게 되는데, 이때 항우의 군사는 40만의 정병, 유방의 군사는 10만이었으나, 유방의

군사는 그마저도 정병이라 볼 수도 없었다.

또한 항우의 참모인 범증은 유방의 큰 뜻을 짐작하고는 한시라도 빨리 유방을 죽여 장래의

화근을 없애자고 항우에게 간곡히 진언하였다.


한편 유방으로서는 지금의 항우와 맞서기에는 너무나도 불리하였기에 장량(張良)의 간언을

받아들여 백여기의 군사만을 데리고 항우의 본거지인 홍문으로 향하여,

항우에게 사죄하였다.


유방은 자신을 항우의 신하라 일컬었으며,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신이 장군과 더불어 힘을 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할 때 장군께서는 하복에서 격전을 벌이시고,

신은 하남에서 싸움을 벌였습니다. 뜻밖에도 신이 먼저 관중에 들어가 진나라의 항복을

받았으나, 이것은 모두 장군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이 모든 것을 장군께 드리기 위해 군대를 파상으로 물리고 장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군께오서는 소인배의 말을 들으시고 신을 의심하신다 하오니, 신은 천하백성들이

장군을 의심할까 두렵습니다.” 라고 사죄하였다.

항우는 이내 유방을 머물게 하고는 잔치를 벌였다.(鴻門之宴)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범증은 자주 항우에게 눈짓을 보내어

“유방을 죽일기회는 바로 이때이니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라고 재촉하였으나,

항우는 끝내 듣지 않았다.

그러자 초조해진 범증은 연회장 밖으로 나와 항우의 사촌동생인 항장(項莊)을 불러내어

유방을 죽이라 명하였다.

항장은 연회장안으로 들어가 칼춤을 추는 시늉을 하며, 기회를 보아 유방을 죽이려 하였다.

이에 위급함을 느낀 장량은 급히 장수인 번쾌를 불러 유방을 호위케 하였다.


한편, 유방이 장량과 번쾌의 도움에 힘입어 파상으로 무사히 도망쳤다는 소식을 접한

범증은 장량이 바친 옥두를 받자마자 칼을 빼어 산산조각을 내버리고는 탄식하였다.

“유방을 지금 죽이지 못한일은 통탄이도다. 소인배와는 일을 함께 도모하지 못하겠구나.

장차 항왕의 천하를 빼앗는자는 반드시 유방일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유방의 포로가 될 것이다.”

이 홍문지연이 유방과 항우의 운명을 갈라놓은 사건인 셈이었다.(기원전 206)

홍문지연 鴻門之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