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초,한楚,漢 ( BC221~206 ) - 유방과 항우의 패권다툼 - 1

지식창고지기 2009. 6. 1. 09:23

유방과 항우의 패권다툼 - 1


홍문에서의 회합이후 항우는 40만 대군을 이글고 함양으로 들이닥쳐 진왕 자영을 비롯한

황자들을 모두 죽이고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모두 몰수 하였다.

뿐만아니라 시황제가 인장된 여산릉을 파헤쳐 진귀한 보물들을 모조리 약탈하고, 아방궁에

불을 질렀다.

이 불은 함양의 거리를 3개월동안이나 다 태웠다 한다.

이로써 시황제의 혈통은 완전히 단절된다.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한지 불과 15년만의 일이었다.


한편, 진을 평정한 사실을 회왕에 보고하자

“원래 약속대로 하라”라는 회왕의 명이 있었다.

원래의 약속이란, 관중에 먼저 들어간 자를 관중의 왕으로 삼는다는 것으로써 항우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그리하여 범증과 이 문제를 놓고 논의 한끝에, 파(巴)와 촉(蜀), 그리고 한중(漢中)을

붙여주어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하였다.

파와 촉은 넓기는 하지만 변방지역이었다.

또한 유방을 변방으로 내몰고 자신이 관중의 왕이되면 이는 제후들로부터 비난받을것이

확실하였으므로, 자신도 관중의 왕이 되지 않고, 멸망당한 진의 장수들에게 맡겼다.

항우는 장한(章邯)을 옹왕(雍王)으로, 사마흔(司馬欣)을 새왕(塞王)으로 ,

동예를 적왕(翟王)으로세워 관중의 땅을 3등분하여 유방을 견제케 하였으며, 전국각지에

제후들을 분봉하였다.


 

항우가 임명한 제후왕 명단

 

논공행상을 끝낸 항우는 관중에서 얻은 금은보화, 비단, 미녀들을 가득싣고 금의환향

하였다.

팽성(彭城)을 도읍으로 삼고, 서초(西楚)라 하고는 스스로를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하였다.


한편 파(巴)와 촉(蜀), 한중(漢中)의 왕이된 유방은 항우의 이같은 인사에 불만이 많았다.

뿐만아니라 진나라 출신의 장수들을 주변에 포진시켜 자신을 가두어 놓은것부터...

유방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올라서 항우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소하가 만류하였다.

한순간의 분노로 인하여 대의를 그르칠순 없었으므로, 유방은 소하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는 소하를 승상으로 삼고 한중으로 떠났다.


한중으로 가는길을 좁고 험난한 길이었기에, 임시로 길을 만들어 건너야만 했는데,

장량을 길을 건너자 이 길을 모두 불살라 한중을 고립무원의 땅으로 만들었다.

이는 유방이 다시 동쪽으로 진출하여 중원의 패권을 다툴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제후들과 항우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계책이었다.


허나 그해 8월 한신(韓信)에게 옛길을 통해 병사를 진출시켜 옹왕(雍王) 장한을 무찌르고,

새왕(塞王) 사마흔과 책왕(翟王) 동예등을 아울러 눈깜짝할 사이에 관중의 넓은 영토를

모두 차지 하였다.

이소식은 항우를 매우 격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허나 유방을 치기전에 제나라의 전영(田榮)을 먼저 쳐야했다.

조나라가 제나라와 연합하여 배반할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장량으로부터 한통의 편지가 항우에게로 날아왔다.

이편지의 내용은 제나라와 조나라가 연합하여 초를 멸망시키자는 내용의 밀서였는데,

유방이 이 밀서를 빼앗아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장량의 계책이었는데, 이는 항우가 제나라 정벌을 간사이에 항우를 공략할

생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