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Cafe/주영숙·난정뜨락

화가와 궁녀 1~14

지식창고지기 2010. 12. 14. 12:56

화가와 궁녀


1)눈에 넣더라도 도무지 안 아플 이슬,

얼굴이며 몸매뿐만 아니라 침선과 가무에도 뛰어나서 시시때때 이 몸 황홀경에 빠뜨리는 저것, 저토록 예쁜 것을 아아 어이 할꼬. 미인박명이라, 세월이 가다보면 절로 죽는 것은 뒷문제치고 언젠가는 늙어질 저것을 어이 할 것인고.…… 당나라 황제는 몇날 며칠 궁리하다가 나라에서 제일가는 화가를 불러들였다.   

얼굴만 그리지 말고 몸 전체를 그려라.


2)황제는 특별히 특별 분부 내렸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궁녀 가운데서 황제가 특별히 총애하는 그녀 이슬은 화가 앞에 조용히 앉았다. 그런데 일이 났다. 큰일이 났다. 천하일색 여인을 지척에 두고 붓을 들었던 화가는 때때로 괜스레 허공만 휘적거리다가

멍하니 모델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지었으니.

 

3)아늘아늘 붓끝을 감아 도는 물빛 미소

붙잡을 수 없어서 그릴 수가 없어서 화가, 화가는 울고만 싶었다. 울어버리려다가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표현에 대한 고민이었어도 나중엔 그것이  혼을 사루는, 사루고 사루어도 재 한줌 남기지 않을 

황홀한 매력이라고 알아버려 당황해했다.


4)아리땁게 그리려는 예술에의 욕망보다는

오히려 그녀 매력에 빠져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화가는, 그러나 황제가 총애하는 궁녀에게 감히 자기 뜻을 고백할 순 없었다. 그랬지만

기척도 소리도 없이 운명이 움직였다.


5)그녀를 그리워하는 화가의 날갯짓소리

어느새 그녀 귀에 들어박혔다. 놀라운 재주, 아름다운 얼굴, 그 모습의 날갯짓.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속으로만 화가를 안았다. 안고 뒹굴었다.

추호도 바랄 수 없는 순간적인 밀회로서


6)‘내가 만일 황족이라면 말할 수도 있으리라’

화가는 꿈꾸어서도 안 될 신세한탄을 했다. ‘내가 만일 여염집 아낙이라면……’ 황제의 존재는 까마득히 잊은 채로 그녀도 화가에게 엉뚱한 공상을 걸었다. 화가는 애달파하는 그녀 눈길에 온몸 신경이 흐늘흐늘해져 기어이 마비되고 있었다. “아차!”

맥 풀린 화가 손에서 그림붓이 떨어졌다.


7)“어머나!” 놀라면서도 웃음 짓는 궁녀 이슬, 

그림붓이 떨어진 건 황홀함 속에 다가온 실수, 사모하는 감정의 결과라, 기쁘기도 하였다. “그림을 더럽혀서 황송합니다.”라고 화가는 궁녀에게 사과했다. 엷은 비단치마 화폭에 뜬금없는 물방울무늬, 화가는 어찌할 바 몰랐고 궁녀가 상냥하게 위로하였다.

“옥에도 티가 있는 법, 옥이 더한층 빛나 보이죠.”


8)“그러나 폐하께서 나무라실까 두렵습니다.”

“나중에 실제의 이 치마에 화폭의 낙점과 똑같은 점을 칠해 두겠어요. 그럼 똑 같이 그리래서 얼룩까지 그렸다고 둘러대면 되지요.” “황송합니다. 안 그래도 두 번 다시 이만큼 그릴 자신이 없사와 걱정했는데, 그토록 배려해주시니 한결 마음 놓입니다.”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그녀의 그 말이 너무 고마웠지만, 화가는 혹시나 싶어 얼룩을 물로 문질러 희미한 흔적만 남겨두었다. 

어쩌면 복점일지도 모른다고 자위하면서.


9)완성된 궁녀초상화를 받아본 황제는

“과연 훌륭한 그림이로다. 그려진 인물도 미인이지만, 명화가의 솜씨 아니고는 못 그릴 명화로고.”하면서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는 둥, 오래오래 그림 감상에 빠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이 게슴츠레해지는 성싶더니 안색이 노래지는 거였다. 그가 총애하는 궁녀 이슬의 배꼽 밑 엷은 비단치마 속에서 비치는 불그스레한 점. 지운다고 지웠어도 불그스레하게 남은 흔적, 공교롭게도 궁녀의 배꼽 아래 위치. 문제는 낙필 얼룩의 위치였다.

이 이런, 배꼽 밑에 점까지 그리다니, 이럴 수가     


10)다른 이는 몰라야 될 비밀, 비밀이 아니던가.

‘점이 있는 건 이슬 당사자와 과인만 알아야 되거늘, 그 누구도 노터치, 노터치이거늘, 고이연지고! 모델 배꼽 밑의 점까지 알게 될 제는 그만한 죽을죄를 범했으렷다.’ 황제는 부들부들 떨었다, 폭발일보직전이다.

마침내 필화(筆禍)가 났다, 화가도 궁녀도 미처 몰랐던.


11)질투도 못 참고 분노도 못 삭이고  

‘그러나 그런 추문을 폭로해서 화가를 벌함도 누워 침 뱉기, 창피, 창피, 이런 창피가 어디 있을꼬. 그런 실수 책하여 저것을 쫓아내기에는 미모가 너무 아까워, 아이고 아까워라.’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황제는 이윽고 화가만을 아무런 죄명도 없이 옥에 잡아넣었다. 대경실색한 사람은 화가보다도 궁녀였다. 궁녀가 황제에게 석방을 요구했으나 낙필의 얼룩도 거짓이라면서 믿지 않는 거였다. “차라리 뚜렷한 낙필흔적이라면 내 믿겠다. 그런데 그 점이 희미하지 않느냐? 네 벌거벗은 몸을 보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너는 그 점이 얇은 비단치마 위로 드러날 지경으로, 너는 속곳을 입지 않았다는 말이더냐?” “아 아니옵니다.” 황제에게 말이 안 통한 궁녀는 제상에게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황제의 오해를 풀어달라고 했다.

화가를 구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12)재상이 확인하고 황제에게 해명하였다.

“그놈의 재주가 그리 좋고 인품이 고결하다면, 어젯밤에 내가 꾼 꿈의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 바쳐보도록 하오. 그것이 맞으면 용서하리다.” 도저히 오해를 풀 수가 없던 황제가 내놓은 시험이었다.

결국은 사형에 처하겠다는 핑계에 다름 아니리라.


13)화가는 꿈속에서 봉황새가 되었는데,

그리운 궁녀를 만나보려는 일념으로 자기를 날아다니는 새로 그린 거였다. ‘비록 오해로 빚어졌지만 당신과의 사랑이 인연되어 죽게 되어 행복하다는, 그 한 마디를 알리고야 죽어도 죽으리라.’ 봉황새가 된 화가는 감옥을 빠져나가 높은 담을 날아 넘고 훨훨 날아 더더욱 높은 대궐 담을 넘었다. 그리고 울었다. 궁녀의 침실 창문 앞에 오동나무, 오동나무 가지에 앉아 울었다. 생시의 사람으로라면 맘껏 울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더더욱,

처량히 짝을 부르는 새소리로 울었다.

 

14)밝은 달밤 잠 못 이루던 궁녀 이슬,

화가가 자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는 것을 슬퍼하던 그녀는 꿈인 듯 생시인 듯 봉황새 우는 소리 들었다. 잠옷 바람으로 정원에 나간 그녀, 그녀는 보았다. 오동나무에서 봉황새 한 마리 후드득 내리는 모습, 생각수록 가슴 미어지던 그님이 뛰어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둘은 부딪힐 듯이 다가섰고, 다가서자마자 손을 맞잡고 환희의 떨림으로 서로를 확인하였다.

“당신이, 당신이 오셨군요. 어서 들어오셔요. 어서어서.”

'Blog·Cafe > 주영숙·난정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가와 궁녀 21~27  (0) 2010.12.14
화가와 궁녀 15~20  (0) 2010.12.14
이백과 두보의 시문학 비교  (0) 2010.12.13
문인화의 현대적 의미와 '왕유'  (0) 2010.12.13
竹里館(죽리관) - 왕유  (0) 2010.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