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궁녀는 소녀처럼 기뻐하며 화가의 목에 팔을 감아 매달렸다.
“아이 좋아라!” 하면서 얼굴을 화가의 가슴에 묻고 비벼댔다. 애정의 피가 끓어오른 화가도 가슴이 뛰었다. 봉황새든 무엇이든 새가 되어 먼 바다를 건너가기 전에 궁녀와 사랑을 나누는 게 우선 아닌가 싶어, 화가는 파고드는 궁녀를 힘껏 안았다. 최후의 궁중 금침에서 첫날밤, 첫날밤을 보내는
운명 점, 배꼽 밑에 그 점이 독버섯인양 깔깔거려도
22)화가가 다시 촛불을 밝히고 그림붓 들자마자
“이 밤이 새기 전에 어서 어서 봉황새 한 쌍을 그려요.” 행복한 기대 속에서 궁녀가 채근하였다. “가만 있자, 바다를 건너 신라까지 날아가려면 봉황새의 날개 힘으론 어려울 것 같은데……” “어머나, 그럼 어떡해요?” “다른 새를 그립시다. 북해에 살던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변해 생긴, 길이가 삼천리나 되며 날개를 한번 치면 9만리를 날아간다고 하는 그 붕(鵬)새가 됩시다. 붕새면 북명(北溟)까지도 단숨에 날수 있으니까 말이오.” “붕새면 우리가 그 새로 변하지 않고 이 인간의 몸으로 그냥 타고 가도 되겠군요.”
궁녀는 새로 변하는 것이 불안하기도 했던 참이었다.
23)바로 그 때, 대궐 안이 만세소리가 나며 소란스러워졌다.
“대궐 안 오동나무에 봉황새가 와 앉은 것을 폐하께서 직접 보셨다고 합니다.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징조라고 갑자기 경축행사 준비를 하랍시는 분부이옵니다.” 나인이 침실문 밖에서 궁녀에게 알리는 소식이었다. 화가는 그리던 화필을 툭 떨어뜨리고 당황해했다. “또 낙필 하셨네요.……”
침착히 말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 다 위기감을 느꼈다.
24)“봉황새고 붕새고, 오늘 밤엔 못 그리겠소.
내일 밤에 다시 와서 그리겠으니 하루만 더 참고 기다려주시오.” “예, 그럼 내일 밤엔 꼭 오셔요.” 화가는 떨어졌던 붓을 들어서 얼른 봉황새 한 마리를 그렸다. 그와 동시에 봉황새로 변한 화가는 화다닥, 다시 오동나무 가지 위에 올라앉아서 소리 높이 울었다. 정원 저편에 있는 대궐에서 황제가 또다시 봉황을 발견하고 화색이 만면하여 감격에 감격을 하였다. 이제는 진짜 궁녀의 간부가 된 화가의 화신을 향하여 코가 땅에 닿도록 거듭거듭 절을 했다.
봉황새, 상서로운 새로다. 길조, 길조이니라.
25)깨고 보니 옥중에서 꾼 하룻밤 일장춘몽이었다.
봉황새가 되어서 그리운 궁녀를 만나고, 다시 인간 몸으로 궁녀의 나체를 애무하면서 문제의 배꼽 밑 무점까지 똑바로 보았고, 신라로 가는 사랑의 망명까지 약속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에 불과한 것. 그래도 아무리 그렇더라도 ‘꿈에서라도 궁녀의 사랑을 얻었고, 문제의 배꼽 밑의 점까지 내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으리.’하고서 화가는 체념하였다.
살아날 방법으로서의 꿈, 그 꿈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26)“폐하의 어젯밤 꿈을 그려 맞히면 출옥시켜주신단다.”
재상이 옥중 화가에게 황제의 주문을 전했다. 그 말을 전하면서 전옥이 안절부절못하였다. “아무리 그림재주가 비상해도 폐하께서 꾸신 꿈까지 알아서 그릴 수야 있겠느냐. 그러나 상서로운 봉황새가 궁중에 나타나서 나라에 큰 잔치가 있으니까, 머지 않아 대사령이 내릴지도 모른다. 그 때나 기다려 보시오.” 죽을 날만 기다리던 화가는 전옥의 조롱 겸 위로 겸의 말을 듣고 번뜩 생각이 떠올랐다. 황제가 자기 꿈을 알아서 그림으로 그려 바치면 살려준다고 했다니, 그것이다. 바로 봉황새다.
지난밤 괴상한 꿈이 떠오른 것이었다.
27)화가는 궁녀침전 오동나무에 앉은 봉황새를 그렸고
그림을 받아본 황제는 또다시 놀랐다. 자기가 꿈에 본 봉황새모습과 똑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궁녀와 화가의 관계에 대한 질투가 다 풀리지는 않았지만, 황제는 궁녀와 제상에게 한 약속이라 화가를 석방하였다. 그러면서 연신 중얼거렸다. “과연 신통력을 가진 화가로다.” 이 소식에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궁녀 이슬이 가장 반가워했지만,
다시는 만나지 못할 예감에 떨며 앓아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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