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신라왕 석탈해는 러시아 캄차카반도 출신?

지식창고지기 2011. 1. 21. 13:13

신라왕 석탈해는 러시아 캄차카반도 출신?

오마이뉴스 | 입력 2011.01.21 12:05 | 수정 2011.01.21 12:28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만주와 더불어 고대 한민족의 생활근거지였던 한반도는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이유 때문에, 역사 속의 한반도가 대륙의 끄트머리로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유라시아대륙. 붉은 별표 부분은 본문에서 언급될 캄차카반도.

ⓒ 구글 위성지도

하지만, 이런 인식은 지극히 대륙 중심적인 것이다. 한반도는 유라시아대륙과 태평양이 만나는 접점이다. 대륙 위주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대륙과 해양을 함께 시야에 넣을 경우, 한반도는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허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이곳은 다양한 지역으로부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끄트머리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곳이다.

한반도가 그런 곳이었다는 증거의 하나로서 신라왕 석탈해의 출생신화를 들 수 있다. 그의 출신국이 어디인지를 조사해보면, 다양한 출신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한반도라는 허브에 몰려들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MBC 드라마 < 김수로 > 에 등장한 석탈해(이필모 분).

ⓒ MBC

석탈해, 그는 사실 버려진 게 아니다

신라 제4대 임금인 석탈해(재위 57~80년)는 토착 한민족이 아니었다. 그는 이방인 출신이었다. 그의 출생신화가 < 삼국사기 >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편, < 삼국유사 > '탈해왕' 편, < 가락국기 > 에 소개돼 있다.

이에 따르면, 석탈해는 자기 나라에서 왕후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난생(卵生) 즉 알에서 출생했다는 이유로 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상자에 실린 채 한반도 동남부에 표착했다.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난생은 혼외정사로 인한 출생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알이 버림을 받는 경우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 사유로 한반도에 흘러들어온 그가 해안가에 표착했을 때에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따라왔기에,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를 떼어낸 석(昔)자를 성씨로 삼게 됐다고 < 삼국사기 > 와 < 삼국유사 > 는 말하고 있다. 이것이 기록상으로 보이는 월성(경주) 석씨의 기원이다.

신화에서는 석탈해가 상자에 실린 채로 한반도 해안에 표착했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는 상당한 규모의 세력을 갖고 한반도에 도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 해안에 출현한 뒤에 김수로의 왕권에 도전했다가 패배하고 나서 가야 군함 500척의 추격을 받고 신라 해안으로 도주했다는 < 가락국기 > 기록을 볼 때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가야 임금 김수로가 석탈해를 쫓기 위해 500척의 함선을 동원했다면, 석탈해 역시 상당 규모의 선박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본래 왕후의 아들로서 신분상으로 고위층이었으므로, 그 정도 세력을 거느리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 자기 나라에서 그만한 세력을 이끌고 왔기에, 신라 왕실의 환영을 받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출신국 명칭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 가락국기 > 에서는 완하국(琓夏國)이라 했고, < 삼국사기 > 에서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이라 했으며, < 삼국유사 > 에서는 용성국(龍城國)이라 했다.

사료마다 명칭이 다 다르지만, 이 명칭들은 실상은 동일한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 삼국유사 > 에서는, 용성국은 정명국·완하국·화하국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이런 점을 보면, 석탈해의 출신국이 주변 세계에 여러 가지 명칭으로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20세기 이전의 중국인들이 조선왕조를 조선·한국·고려 같은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 것과 똑같은 일이다.







새로 둔갑한 석탈해(왼쪽)와 김수로가 대결을 벌이는 장면으로서 < 가락국기 > 신화를 형상화한 것이다. 사진은 국립김해박물관 맞은편의 벽화.

ⓒ 김종성

석탈해의 출신국은 어디에 위치했을까?

그럼, 완하국·다파나국·용성국·정명국·화하국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외부 세계에 알려진 석탈해의 출신국은 어디에 위치했을까? 이에 관해 < 삼국사기 > 에서는 "그 나라는 왜국 동북쪽으로 1천 리에 있었다"고 했다.

지도상으로 볼 때, '왜국 동북쪽 1천리'에 해당하는 곳은 캄차카반도(현재 러시아땅)뿐이다. 물론 일본열도와 캄차카반도 사이의 거리가 문자 그대로 1천 리는 아니다. 고대인들은 막연히 먼 곳을 가리킬 때에 백이나, 천이니 만이니 하는 숫자들을 그저 습관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1천리 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일본열도 동북쪽으로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은 캄차카반도뿐이라는 사실이다.

흥미롭게도, 석탈해와 캄차카반도의 관련성을 제기한 연구결과가 있다. 역사인류학자인 김화경(남자)의 논문 '석탈해 신화의 연구'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캄차카반도의 카멘스코예라는 해변 마을에 전해지는 신화와 한반도에 전해지는 석탈해 신화의 유사성을 제기했다. 논문에 소개된 캄차카반도의 신화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해안가에서 어로작업을 하며 생활하는 미티는 남편인 쿠이키나쿠(큰까마귀)가 집을 비운 사이에 정부(情夫)인 바크팀티란(까치인人)을 불러들여 밀회를 즐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티와 바크팀티란이 은밀한 만남을 즐기고 있는 사이에 쿠이키나쿠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미티가 나오지 않자, 이를 이상히 여긴 쿠이키나쿠는 불을 지펴 침실로 연기가 들어가도록 했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외간남자인 바크팀티란이 숨을 헐떡거리며 침실에서 뛰쳐나왔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미티는 두 개의 알을 임신했고 그것이 두 명의 인간으로 바뀌었다. 쿠이키나쿠의 집에서 바크팀티란의 두 아이를 양육하던 미티는 쿠이키나쿠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두 아이를 가방에 집어넣고는 그 집을 떠나버렸다."

알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점이나 까치가 등장하는 점이 석탈해 신화와 유사하다는 것이 김화경의 주장이다. 유사한 신화가 한반도와 캄차카반도에 존재하는 점을 볼 때 석탈해 집단이 캄차카반도에서 한반도 동해안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근거 외에도, 캄차카반도의 신화 속에는 석탈해 신화와 유사한 측면이 많다. 혼외정사로 인한 '알의 임신'에 의해 태어난 아이가 출생지를 떠난 이야기가 두 신화에 모두 존재하는 점도 그렇고, 두 신화 모두 해양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경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소재 '석탈해왕 탄강 유허'. 석탈해가 신라에 처음 출현한 유적이라 하여, 1845년에 석씨 문중에서 조선정부의 지원을 받아 건립한 곳이다.

ⓒ 문화재 지리정보 서비스

신라왕 석탈해, 캄차카반도 출신 가능성에 무게

물론 유사한 신화가 두 지역에 존재한다는 점만으로, 석탈해가 캄차카반도에서 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 삼국사기 > 에서 석탈해가 왜국 동북쪽에서 왔다고 했고 일본열도 동북쪽인 캄차카반도에 석탈해 신화와 유사한 신화가 있다는 사실은, 신라왕 석탈해가 캄차카반도 출신일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는 것이다.

이런 추정에 힘을 실어주는 근거로서, 일찍이 청동기 시대부터 시베리아 동북쪽 해안에서 한반도 해안에 이르는 해로를 왕래하면서 암각화(바위그림)를 남긴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들이 남긴 문화적 흔적인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나 울주 천전리 암각화 같은 것이 그 증거로서 제시되고 있다.

이는 고대로부터 유라시아대륙 동북쪽의 해양이 활발히 이용됐고 이 해양에서 해류를 따라 문화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열도보다 훨씬 북쪽에 사는 사람들과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문화적 교류를 했다는 사실을 보면, 석탈해가 캄차카반도에서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게 그리 이상한 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유목민들이 서북쪽의 몽골초원을 거쳐 한반도나 만주에 도래해서 한민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허황옥(가야 초대 왕후)을 비롯한 일단의 인도인들이 해로를 통해 한반도 동남부에 정착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다양한 지역으로부터 다양한 고대인들이 한반도로 몰려들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알래스카와 마주보는 캄차카반도에서도 사람들이 도래하여 한민족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은, 고대 한반도가 여러 지역 사람들의 집결지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육로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해로를 통해서도 사람들이 한반도로 몰려들었다는 것은 한반도가 그저 유라시아대륙의 '끄트머리'에 불과하지 않고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허브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반도가 그 같은 허브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발해 멸망 이후 한민족의 영토가 한반도로 축소됐다는 것으로 인해 스스로를 질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륙이 끝나는 곳에 산다는 사실로 인해 절망을 느끼기보다는, 해양이 시작하는 곳에 산다는 사실로 인해 희망을 느껴야 할 것이다.

[☞ 오마이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