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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삼민주의 토대를 세운 손문(孫文)

지식창고지기 2011. 8. 22. 05:44

중국의 삼민주의 토대를 세운 손문(孫文)

 

 

孫文(손문: 1866~1925) - 혁명에의 길

 

전제왕정은 2천년만에 무너지고 중국은 새로운 시대로 돌입하는 길목에 섰다. 이러한 역사적 변동에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사건과 인물은 1911년의 신해혁명과 손문이었다.

 

 손문의 자는 中山(중산)이며, 1866년 廣R東(광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홍콩과 하와이에서 서양의학 등의 신식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한동안 의사로 활동하다 1894년 북경으로 올라가 정치혁신을 주장했다. 물론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때 그는 興中會(흥중회)라는 혁명단체를 결성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중국과 해외에서는 각종의 혁명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성립됐다. 특히 1904년 러시아에 대한 저항운동이 확산되면서 혁명기운은 더욱 무르익어 갔다. 이미 일본으로 건너와 활동하던 손문은 혁명운동의 구심점이 될만한 조직을 결성하기로

작정하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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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1905년 유학생등 1백여명이 모여 東京(동경)에서 中國同盟會(중국동맹회)를 조직하고 손문을 대표로 뽑았다. 그리고 동맹회의 기관지로 「民報(민보)」를 발간하기 시작했으며, 그 창간호에서 손문은 혁명의 기본전력으로 三民主義(삼민주의)를 제시했다. 삼민주의란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요약한 개념으로서, 외세를 몰아내고 중국의 자주주권을 확립하는 것을, 전체정치를 붕괴시키고 국민대표의 운영에 의한 정치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平均地權(평균지권)을 축으로 경제적 평등을 촉구하는 것을 각각 목표로 삼았다. 이들 3자는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삼민주의를 통해 손문은 결국 중국혁명의 기본방향을 제시했던 셈이다.

 

 이제 혁명은 조직과 이념을 갖추었고, 그 중심인물은 손문이었다. 바로 이 무렵 武昌(무창)에서 군사봉기가 거의 우발적으로 발생했고, 그 여파는 곧 전국으로 파급되어 마침내 청조가 타도됐다. 그가 신해혁명직후 혁명정보의 대통총으로 선출 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혁명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혁명세력과 기득세력이 타협하여 공화정의 지도자로 추대한 袁世凱(원세개)(1859-1916)가 帝政(제정)복귀 구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중국혁명의 험준한 길을 극적으로 예시했다. 원세개의 돌연한 죽음으로 공화정은 유지됐지만, 여전히 혁명의 길은 요원해 보였다.

 

 손문은 1918년 국민당을 조직하고 혁명의 완성을 위해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다시 결단을 내려 공산당과 국민당이 합작하는 이른바 제1차 국공합작을 1924년 성사시켰다. 물론 손문은 확대 개조된 국민당의 총수로 선출됐다.

 

 불행하게도 혁명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손문은 1925년 3월 12일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이 있은지 얼마 후 國共(국공)은 분열하게 되고, 이후 항일전 기간중 일시 국.공이 합작하지만 끝내 완전한 통합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결국 국.공간의 치열한 내전을 거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하기에 이르렀지만, 손문과 신해혁명없이 그러한 역사발전이 불가능했던 것은 물론이다. 

 

 

쑨원(孫文(손문)1866∼1925)-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초명(初名)은 디샹[帝象]. 자는 이셴[逸仙], 호는 르신[日新]·중산[中山]. 중국혁명의 선도자로 1911~12년 중화민국 초대 임시총통을 지냈고, 1923~25년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1. 초기 생애

 

 쑨원은 중국 남부 지방인 광둥 성 샹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879년 노동자로 하와이에 건너갔던 맏형 쑨메이[孫眉]가 그를 하와이로 데려갔다. 그곳의 영국계 미션 스쿨에서 3년, 미국 학교인 오아후대학에서 2년 동안 공부하면서 서구의 문물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의 형이 그가 그리스도교에 열중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1883년 고향마을로 돌아왔고, 다음해 가을 홍콩에 있는 미션계 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885년 그는 퀸스 칼리지로 전학했고 부모가 정해준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와 딸 둘을 얻었다. 1884(또는 1885년) 한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하와이로 다시 한번 여행을 다녀온 뒤 1886년 광저우[廣州]의 박제의원(博濟醫院) 부속의학교에 입학했다가 홍콩에 있는 서의서원(西醫書院:홍콩대학교 의학부의 전신)으로 전학하여 1892년에 졸업했다.

 

 쑨원은 전통적인 정치수업을 받은 적은 없지만 야망이 있었고 당시의 중국이 처한 상황에 대해 괴로워하고 있었다. 보수적인 청 정부의 지도 아래 전통적인 방식에만 집착해왔던 중국은 기술적으로 앞선 선진국들로부터 수모를 받고 있었다. 그는 정계에 입문하기 위해 1894년 북부로 갔다. 그리고 당시 청의 북양대신(北洋大臣)이며 직례성(直隷省) 총독이었던 이홍장(李鴻章)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자신의 정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홍장으로부터 받은 회답은 농업과 양잠을 함께 추진하는 농업개혁안에 대한 형식적인 지지뿐이었다. 이같은 미미한 지지를 배경으로 삼아 1894년 10월 하와이로 건너가 흥중회(興中會)를 결성했는데, 이것은 훗날 쑨원이 이끌게 되는 비밀 혁명결사의 전신이다. 구성원은 전적으로 광둥 출신들이었고 사무원·농민·장인(匠人) 등 주로 사회 하층계급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2. 망명 시기

 

 청일전쟁(1894~95)에서 청이 패하고 그뒤에 위기가 계속되는 틈을 이용하여 쑨원은 1895년 홍콩으로 가서 자신이 태어난 광둥 성의 성도 광저우에서의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16년에 걸친 해외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896년 쑨원은 런던 주재 중국공사관에 13일 동안 억류되었는데 그당시 상황은 분명하지 않다. 그가 공사관 직원으로 일하던 고향사람을 우연히 알게 되어 변장을 하고 공사관으로 그 사람을 만나러 갔다가 신원이 노출되어 붙잡힌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공사관 측은 그를 중국으로 압송시킬 계획이었으나, 이를 알아차린 그가 중국공사관에 근무하는 영국인 직원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공사관측의 의도를 전(前) 홍콩 서의서원 원장이었던 제임스 캔틀리에게 알리게 했다.

 

 그결과 영국 외무성이 개입하여 그는 억류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 사태는 여론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그의 정치역정에 큰 힘이 되었다. 그후 8개월 동안 대영박물관에서 독서로 소일하던 쑨원은 그뒤 캐나다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갔다. 1897년 7월 일본에 도착하여, 그의 런던 사건을 잘 알고 그의 정치활동을 돕겠다고 나선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의 영접을 받았다. 미야자키는 오쿠마 시게노부[大重信],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등의 많은 영향력있는 일본인들에게 쑨원을 소개시켰고, 쑨원은 후에 이들 가운데 몇몇 인사로부터 정치적·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1900년의 혼란한 사회상황 속에서 쑨원은 홍콩 총독 헨리 블레이크와 홍콩 지역의 영향력 있는 중국인을 끌어들여 비밀작전을 진행했다. 그들의 목적은 이홍장을 설득시켜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쑨원은 이홍장의 부하직원이 보낸 초청장에 응하여 홍콩으로 갔지만 함정을 두려워하여 상륙하지는 않았다. 그대신 미야자키 도텐과 2명의 다른 일본인 동료를 회의에 참석시켰으나 소득은 없었다.

 

 이보다 앞서 쑨원은 광둥의 비적들 및 비밀결사들과 접촉을 가졌다. 이 세력들은 1900년 10월 후이저우[惠州]에서 봉기했다. 12일간 지속된 이 봉기는 쑨원 자신이 1895년부터 1911년 사이에 일어났다고 주장한 10회의 봉기 중 2번째였다.

 

3. 중국혁명동맹회의 결성

 

 1903년은 쑨원의 정치경력에서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해이다. 이때부터 중국 내의 가장 권위 있고 영향력 있는 세력인 지식인 계급이 대거 그의 운동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은 다음의 2가지 요인에 크게 힘입었다. 첫째, 청조의 쇠퇴가 꾸준히 계속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량치차오[梁啓超]의 강력한 선전활동 덕택이었다.

 량치차오는 1898년 일본으로 도피한 개혁운동가로서 일본에서 중국어 신문을 발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량치차오는 청조의 체제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 중국의 통치자인 서태후(西太后)를 끊임없이 공격하여 그 체제에 손상을 입혔고 혁명만이 유일한 논리적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그결과 중국의 해외유학생 사이에서 쑨원의 주가는 꾸준히 오르게 되었다.

 

 1904년에는 유럽 내의 여러 지역에 혁명조직을 심어놓을 수 있었고, 1905년에는 도쿄[東京] 소재의 동맹회(쑨원의 흥중회, 황싱[黃興]·쑹자오런[宋敎仁] 등의 화흥회, 장빙린[章炳麟] 등의 광복회가 한데 뭉쳐 결성한 혁명단체)의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뒤 3년 동안 이 단체는 기관지인 <민바오(民報)>를 통해 효과적인 선전활동을 펼 수 있었다.

 

 쑨원은 정치적 환경이 좋아지는 만큼 그 이상의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동맹회는 그 조직이 매우 느슨하여, 그에게는 개개 구성원에 대한 감독권이 없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와 다른 혁명동지들이 벌인 반란이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다. 동맹회원들은 절망에 빠졌고 외부의 기탁금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더욱이 청 정부가 취한 압력조치의 여파로 외국정부들이 점점 더 그를 기피하게 되었다.

 

 1907년 일본정부는 그에게 상당액의 돈을 내놓으면서 일본을 떠나줄 것을 요청했다. 1년 뒤 그가 혁명모의를 했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도 그는 완전히 추방당했다. 홍콩과 그밖의 여러 지역들도 마찬가지로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쑨원은 1909~10년 유럽과 미국을 순방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1910년 6월 아시아로 잠깐 돌아와 여러 혁명동지들과 여러 차례 회합을 가지고 광저우를 무력으로 탈취하려는 대규모 봉기를 모의했다.

 

 1910년 12월 다시 서구로 여행을 떠났는데 이번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더 많은 돈을 모금했다. 그러나 광저우에서 일어난 4·27봉기(중국 역법에 따라 3·29혁명으로 알려져 있음)는 이전의 봉기와 마찬가지로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리하여 혁명이 성공할 가능성은 점점 더 멀어져가는 듯했다.

 

 그러나 청 정부가 그의 혁명에 도움을 주는 국면이 도래했다. 자구책이긴 했으나 청 정부는 1901년 이래로 개혁을 실시해왔다. 그뒤 몇 년 동안에 청 정부는 군대를 개편하고, 학교제도를 신설했으며, 전통 유교경전 학습에 바탕을 둔 과거제도를 폐지했다. 또 많은 정부기관을 재조직했고 각 지방과 수도에 의회를 구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받은 계급은 변화의 속도가 느린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 결과 청 정부는 위기상황을 수습할 능력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었다.

 

4. 신해혁명의 발생

 

 1911년에 청 정부는 간선철도를 모두 국유화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는데, 이것이 각 지방의 철도 관계 사업자들을 격분시켰다. 쓰촨 성[四川省]에서 무장폭동이 일어났고, 청 정부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하여 더 많은 폭동을 불러일으켰다. 1911년 10월 우한[武漢]의 혁명군이(당시 중국은 각 지방에서 혁명군이 기세를 떨치고 있었음) 또다른 반란을 시도했는데, 여러 가지 협조가 미흡했음에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게 성(省) 정부를 전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성공을 계기로 다른 성들에서도 성 정부에 대한 전복이 계속되었다. 쑨원은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 시에서 신문을 통해 우한 혁명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1911년 12월 상하이로 돌아와 난징[南京]에서 열린 대의원 회의에서 임시총통으로 선출되었다. 자신의 정부가 취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조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있던 북양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와 협상을 맺었다. 1912년 2월 12일 황제는 폐위되었다. 그 다음날 쑨원은 임시총통직을 사임했고, 2월 14일 위안스카이가 총통에 취임했다.

 

5. 후기의 투쟁 과정

 

 1912년 9월 위안스카이는 쑨원을 전국 철도 감독에 임명했다. 1913년 3월 동맹회를 재편하여 국민당을 만들고 또 그 당수로 활약했던 쑹자오런[宋敎仁]이 위안스카이의 사주를 받은 자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분기점으로 하여 쑨원과 위안스카이의 협조체제는 붕괴되었다. 이로 인해 제2차 혁명전선이 형성되었고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반기를 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 혁명이 실패하자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도피했다.

 

 일본에서 쑨원은 추후 중국에 대한 광대한 조차권(租借權)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여 일본의 도움을 얻어내려 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또한 혁명동지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하라고 강요함으로써 많은 혁명가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게다가 1914년 11월 전처와 이혼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비서인 쑹칭링[宋慶齡]과 결혼함으로써 크게 비난을 받았다.

 

 내부의 저항과 외부의 압력이 한데 어우러져 위안스카이는 1916년 좌절 속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 다음해 쑨원은 상하이에서 광둥으로 가서, 국무원 총리인 돤치루이[段祺瑞:1865~1936]에 대항하는 운동을 펼쳤다. 그해 7월 쑨원은 광둥 정부의 총통으로 선출되었으나, 1918년 중반 그 직책을 사임하고 다시 상하이로 가게 되었다. 그 이유는 광둥 지방의 군벌(軍閥)인 루룽팅[陸榮廷]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앞서 루룽팅은 쑨원의 군대가 광둥 지역 밖에 주둔하는 조건으로 쑨원이 20개 대대(大隊)의 작전권을 갖는데 동의했다. 쑨원은 이 조건을 받아들여 천중밍[陳炯明]을 이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그 군대를 푸젠 성[福建省]에 파견했다. 천중밍을 설득하여 루룽팅과 싸우게 함으로써 그는 총통직에 복직하여 16개월 동안 버틸 수 있었으나, 그뒤 천중밍이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상하이로 도피했다. 상하이에서 장시[江西]와 윈난[雲南]의 군대를 불러들여 이 군대의 힘으로 다시 광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23년 2월 새로운 체제의 총통으로 취임했다.

 

 한편 쑨원의 정치무대에 새로운 변수가 생겨났다. 서구와 일본으로부터 원조를 얻어내는데 실패하자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일으켜 집권하게 된 소비에트 정부에 점점 더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소련의 외교관인 아돌프 요페가 1922, 1923년 2차례에 걸쳐 상하이로 그를 찾아왔다. 1923년의 방문에서 쑨원과 요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쑨원-요페 선언).

 

 그 내용은 공산체제는 중국에 적합하지 않으며, 소련은 중국에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함과 동시에 외몽골 이남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의사가 없다는 등의 것이었다. 한편 소련의 권유로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1923년 10월 코민테른의 대표인 미하일 보로딘이 광둥을 방문하며 곧 쑨원의 신임을 얻었다.

 

 1924년초 쑨원은 소비에트 공산당의 조직을 모델로 하여, 상명하달식(上命下達式)의 기강이 엄격한 조직으로 국민당을 개편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은 전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3명의 공산당원을 선임했고 군관학교(쑨원은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장제스[蔣介石]를 임명했음)의 설립을 승인했다. 국민당 재건노력은 쑨원이 그의 정치철학인 삼민주의(三民主義)에 대한 강연내용에도 이미 언급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조치를 통해 국민당은 조직이 훨씬 강화되었지만, 1925년 3월 쑨원이 베이징에서 암으로 사망했을 때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도 만만하지 않았다. 그의 사체(死體)는 1929년까지 베이징 근처의 비윈 사[碧雲寺]에 매장되지 않은 채 안치되어 있다가, 그뒤 난징으로 옮겨져 중산링[中山陵]에 매장되었다.

 

6. 이념

 

 쑨원의 정치이념은 중국혁명의 이념적 토대가 된 삼민주의로 요약된다. 삼민주의는 민족주의(民族主義)·민권주의(民權主義)·민생주의(民生主義)의 3원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3원칙은 하나로 연결되어 통일된 사상체계를 형성한다. 쑨원은 "삼민주의는 구국주의(救國主義)이다"라고 말했으며, 나아가 "중국의 국제적 지위의 평등, 정치적 지위의 평등, 경제적 지위의 평등을 촉지하여 중국을 영원한 세계의 독립국가로서 생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에 민족·민권·민생주의의 일반적 특색이 나타나 있다.

 

 첫번째 원칙인 민족주의(民族主義)는 국족주의(國族主義)라고도 한다. 중국에는 가족과 종족의 단체가 있을 뿐 국가적 민족으로는 통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외국의 식민지가 되어 빈약한 나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을 망국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제창하고 민족정신을 중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두번째 원칙인 민권주의(民權主義), 즉 '국민의 권리'는 '민주주의'라고도 하는데, 쑨원은 선거·발의권·국민투표·소환권 등과 같은 수단을 통해 중국 인민들에게 자신의 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민권주의가 달성될 수 있다고 했다.

 

 세번째 원칙인 민생주의(民生主義), 즉 종종 '사회주의'로 통하는 '인민의 생활권'은 이 3원칙 가운데 가장 의미가 모호하다. 그러나 쑨원은 올바른 과세제도를 통한 토지 소유의 균등사상을 염두에 두고 민생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