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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 쑹칭링(宋慶齡)

지식창고지기 2011. 8. 22. 05:43

중국 근대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 쑹칭링(宋慶齡)

 

 

쑹칭링(宋慶齡(송경령): 1893~1981)

 송경령(宋慶齡: 1893~1981)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요 지도자 중의 한사람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명예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중국 근대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이자 탁월한 정치가, 사회운동가이다.

 

 송경령의 본관은 광동성 문창(文昌: 지금은 해남성(海南省)에 속함)이며, 자신은 1893년 1월 27일 상해의 기업가 집안이자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최근에는 송경령과 그녀의 언니 송애령(宋靄齡), 장개석(蔣介石)의 아내인 동생 송미령(宋美齡)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송가황조(宋家皇朝)>가 우리 나라에서 공연되어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기도 하였다.

 

 손문(孫文)의 친구이자 혁명동지인 그녀의 아버지 송가수(宋嘉樹)는 그녀를 계몽시킨 첫 번째 스승이다.

 송가수는 손문의 혁명을 추종하여 먼저 자기 가정의 모든 봉건주의 잔재를 없애고 세 딸을 민주, 평등, 선진적 생활 환경 속에서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하였다. 송애령과 송미령은 어릴 때 총명하고 대담하여 송가수는 그녀들이 5세가 되자 중서여숙(中西女塾)에 입학시켜 그곳에서 기숙하게 하였다.

 

 송경령도 언니나 동생에 못지 않게 총명하였지만 그녀들 만큼 대담하고 발랄하지는 못하다고 생각하였든지 7세 때 중서여숙에 입학시켰다. 송가수 부부는 송애령이 13세가 되었을 때 그녀를 혼자 미국에 유학 보냈다. 송애령은 중국 근대사상 최초로 미국에서 유학한 여성이 되었다.

 

 1908년 송가수 부부는 송경령과 송미령을 함께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따라서 송경령은 15세 때 미국으로 유학가서 서구식 현대교육을 받으면서 민주주의의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송경령은 성격이 침착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서 자매들 중에서 가장 조용한 편이었다. 또 독립심이 강하고 진보적이면서 이상적인 사상을 가졌으나 거만하지 않았다. 이후에 그녀는 자매들과 정치적이 입장이 달라서 자주 분란을 일으켰는데, 송애령과 송미령이 공동 보조를 취한 반면 송경령은 언제나 홀로 고군분투하였다.

 

 1913년 송경령은 미국 조지아주 메이컨시 위슬리여자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가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4년 손문의 비서를 역임하면서 그해 중화혁명당에 가입하였다.

 

 1915년 10월 25일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동경(東京)에서 손문과 결혼한 후, 손문을 따라서 원세개(袁世凱) 타도, 헌법 수호, 서남군벌 토벌 등 일련의 공화제 수호를 위한 정치투쟁에 참가하였다.

 

 1922년 6월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몸을 던져 손문을 위험에서 구해냄으로써 혁명사업에 대한 열정과 탁월한 헌신 정신을 발휘하였으며, 그후에는 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25년 3월 12일 손문이 북경에서 서거한 후 그의 유지를 받들어 '러시아와의 연합', '공산당과의 연합', '노동자 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정책을 견지하면서, 손문의 사상과 혁명사업을 왜곡한 국민당 우파와 과감히 맞섰다. 1926년 1월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공산당과 긴밀히 협조하여 중앙집행위원에 당선되었다. 장개석과 국민당이 '4.12 정변'을 일으켰을 때는 모택동(毛澤東), 임조함(林祖涵), 등인달(鄧寅達) 등과 연명으로 <장개석 토벌 전보(討蔣通電)>를 발표하였다. '7.15 왕정위(王精衛)의 반란' 전야에 <손중산의 혁명 원칙과 정책 위반에 대한 항의 성명(爲抗議違反孫中山的革命原則和政策的聲明)>을 발표하고 국민당 우파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1927년 '8.1 남창봉기' 때에는 혁명위원회 7인 주석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후 비밀리에 소련을 거쳐 독일, 프랑스, 벨기에 등의 세계 사회주의 대국과 자본주의 대국을 순방하였다.

 

 이때 그녀는 마르크스사상을 연구하면서 유럽으로 망명한 중국혁명가들과 함께 중국혁명의 핵심 문제인 토지와 농민 문제 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자신의 사상을 비약적으로 성숙시켰다. 이 시기에 국제 반제국주의와 평화수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이후, 1927년과 1929년에 국제 반제국주의 동맹대회에서 명예주석으로 선출, 세계 반파쇼위원회 주요 지도자 중의 한사람이 되었다.

 

 1931년 중국으로 돌아가 국민당과 그 정부의 모든 직무를 거부하고 사회복지사업에 종사하면서 항일구국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국민당 정부의 대일 타협과 대내 반공탄압 정책을 비판하였다.

 

 1932년 말 노신(魯迅), 채원배(蔡元培) 등과 '중국민권보장동맹(中國民權保障同盟)'을 조직, 주석에 취임하여 국민당 우파에 대한 투쟁활동과 민주권리를 쟁취하는 혁명가들에 대한 원조 활동을 벌였다.

 

 1933년 상해에서 개최된 극동 반전대회(反戰大會)에서 극동 반제반전동맹(遠東反帝反戰同盟) 중국분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이 시기에 일련의 성명과 정론을 발표하여 중국공산당과 신민주주의혁명 옹호를 선포하고, 전국민들에게 반일반제 민족혁명전쟁으로 진정한 중국인민정부를 건설하자고 호소하였다.

 

 그후 애국인사들과 연합하여 <중국인민 대일작전 기본강령(中國人民對日作戰基本綱領)>을 발표하고, 중화민족 무장자위 위원회를 설립하여, 전국의 항일구국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중국에서 항일전쟁이 시작된 후 1938년에는 홍콩에서 '보위중국동맹(保衛中國同盟)'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경애화교연합총회(瓊崖華僑聯合總會) 명예회장을 역임하면서, 항일투쟁에 필요한 의약품과 각종 물자를 지원하였다.

 

 1945년 9월 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그녀는 미국인들에게 미국 정부의 장개석 내전 지원 중지를 호소하였다. 또 보위중국동맹회를 '중국복리기금회'로 개편하여 여성과 아동의 복지사업에 종사하였다.

 

 1948년 초에는 중국국민혁명위원회 명예주석을 역임하였다.

 

 1949년 9월 21부터 30일까지 북경에서 개최된 전국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여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국위원회 상무위원에 당선되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는 국가 부주석(1959년 4월 7일 당선, 1965년 1월 재선),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1954년 9월 당선, 1975년 1월 재선, 1978년 2월 삼선), 전국정협 부주석 등과 전국부녀연합회 명예주석, 중국인민보위아동 전국위원회 주석, 중국복리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정치협상회의 제1기 회의에서 발언하던 해에 세계평화이사회 이사에 당선되었다. 1951년 '국제평화 강화' 스탈린상을 수상하였다. 1952년 아시아 태평양지역 평화연락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1981년 5월 14일 송경령은 지병이던 관상 동맥경화증과 만성 임파성 백혈병이 악화되었다. 5월 15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은 송경령을 중국공산당 정식당원으로 받아들였다.

 

 1981년 5월 16일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서는 그녀에게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 칭호를 수여하였다. 1981년 5월 29일 20시 18분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신중국을 위해 분투하자(爲新中國奮鬪)>(1952), <송경령선집(宋慶齡選集)>(196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