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우위성
설교 이는 명백히 세상이 가장 크게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설교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전
제 조건, 배경, 보편적 이치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오늘날 설교에 대해 반동을 일으키는
원인은 , 교회 밖의 세상에 유행하는 보통의 사상에 의한 이유가 있고, 대 설교 꾼으로 소
개된 자들이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반감을 가짐 이었습니다.
일반적 사상들이 교회에 영향을 주었고, 언어와 설교, 교회와 기독교 인들 의 사고 방식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여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심 상실, 진리에 대한 신앙의 감소가 일
어 났습니다. 대중 설교가 의 질 낮아짐 과 직업주의로 탈바꿈 됨, 또 설교 내용과 행위에
대한 그릇된 개념. 한 예로 설교를 연설로 지칭케 된 경우가 그것입니다.
또한 예배 의식과 예배를 동일 시하는 가운데, 영성의 충만함 대신 세속적 대화와 담화와
설화 등 이 자리하게 된 흥미 본위의 요소 첨가가 원인 입니다. 대신 상담 등에 무게를 더
실어 버리며 강단의 자리가 한쪽으로 밀려 났습니다. 복음서 나 우리 주님의 생애와 목회
사역에서 전도와 가르침의 우위성은 명백합니다.
말씀 증거의 우선권은 단번에 주어진(행6장 참고) 교회와 지도자들과 권위 하는 자리에 있
는 사람들의 첫째 임무입니다. 조감 적 인 안목으로 교회사를 보면, 교회사상 쇠퇴기에 빠
진 시대는 언제나 말씀 전하는 것이 감퇴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 개혁이나 부흥의
여명은 말씀 전함을 새롭게 하는 것이요, 참된 말씀 전파의 부흥은 언제나 교회 역사상 위
대한 부흥 운동을 가져 왔습니다.
대치 할 수 없는 말씀 증거
하나님의 진노와 병든 사람에게 우선적 인 것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 모든 사람이 진리
를 아는데 이르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 의 사신'에 의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해 받지
못하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알게 함이 교회와 목사의 고유한(peculiar) 임무
입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곳은 교회 뿐 이요 , 이를 알게 함은 오직 설교자뿐입니다.
육체적 심리 치료가 사람을 선하게 할 수 없고 , 이는 교회의 일차적 목표가 아닙니다.
상담 심리학 등 ,거짓 평안을 주는 마취, 각성, 수면제와 같은 성격의 것들이 영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회 복음적 설교와 제도적 교회는 교회가 텅텅 비게 함에 책임을 져
야 마땅합니다. 복음 없는 도덕심 과 윤리 강론은 절대로 쓸모없습니다. 기독교 내에 개
혁과 부흥, 참된 말씀 전파가 일어날 때에 진정 이들의 관심이 성취되었습니다.
개별적인 문제들과 고통을 앉고 있음에 상담과 대화를 대안으로 제시하나, 설교를 최 우선
으로 놓아야 해결되고, 설교자는 시간 또한 절약 할 수 있습니다. 설교는 언제나 맨 앞에
서야 하고, 어떤 것에도 자리를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복음 설교는 설교자와 대화하도록
이끌어주고, 설교자에겐 사람들의 특정한 조건을 해결해 주는 기회를 베풀어 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진리의 지식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저 겉으로 나타난 증상
들을 완화 시키고 그때 그때의 문제에 대한 미봉책을 씀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선교 동체로서 전교회가 복음과 복음 진리, 복음의 말씀에 대한 증인의 신분임을
포착해야 합니다. 전도와 함께, 예배당에서 함께 회집 됨은 성령의 임재에 의해 주님이 함
께 하심 (마 18장20절) 속에 예배에 있는 권세로 무 의식 중에 서로 서로 도움 받게 되기
에 회집은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설교자에 의해 더욱 더
고조되는 동인이 있습니다.
설교의 내용과 전달 행위
설교하는 일은 교회와 목회자의 최상의 임무입니다. 참된 말씀 증거가 있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 이에 귀 기울일 것입니다. 진정한 설교 이려면, 설교 단에 선 사람은 , 하나님의 메
시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사신이어야 합니다.
설교는 전인을 다루는 것이고, 듣는 이가 감복하게 되어 이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
기를 다루시고 계시며, 자기에게 말씀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준다.'
설교 형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먼저 선언하고, 하나님의 사심과 능력과 영원에 대한 선언,
율법 등으로 회개를 촉발케 하고, 하나님의 세상과 사람에 대한 전체 관계와 유일하신 구
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는 성도들을 견고히 세워주는 교
훈이어야 합니다.
설교의 형식
설교는 신학이나 신학의 어떤 국면을 강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전
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임무는 복음을 학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닌, 복음을 설교하고,
전하고 , 직접 듣는 이에게 전해 주는 , 들이대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설교는 수필
과 달리 반복이 좋으며, 교리와 주제를 내포한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설교를 강해 식으로 해야 함은 중요하고 본질적 인 것 입니다. 이치를 포착한 후, 상세하고
질서있게 풀어가야 합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설교자가 전하려는 특정 이지의 핵심을 찌르
게 유도되어져야 합니다. 절정에 치닫게 하여 전하는 목표를 적용케 해야 하는데, 설교자
가 먼저 적용해 나왔어야 합니다. 한편의 설교는 그 자체로 진리여야 하고, 온전한 전체
여야 합니다.
적절한 형식에 맞추는 일은 고역이나 가장 놀랍고 영광스러운 작업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준비 해야 하고, 완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 행위
참된 설교에는, 전인적 품격이 수반되며, 권위로서 청중을 압도하고 진행해 나가는 지각력
이 요구 됩니다. 언제고 성령의 능력과 지배 아래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또한 진지함이 요
구되는데, 설교자는 항상 강단에 나타나는 순간에도 거기에서 행하는 일에 심각함의 인상을
창조하고 풍겨야 합니다. 또한 열심, 열정 감으로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에 자기 스스로
붙잡힘을 당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합니다.
'너희는 내 증인이 되리라' 명 하심에 전 인격을 동원시켰다는 뜨거운 인상을 필연적으로
유발되어야 합니다. 설교 시 청중을 향한 연민의 요소를 결핍한다면, 단순히 지적이거나
논증적 이어서는 안됩니다. 정염(pathos)과 감격의 요소는 사활 적으로 중대한 것으로 단순
히 감상적인 것이 아닌, 기쁨에 찬 큰 감격이지, 감정에 호소하는 것(emotionalism)이 아닙
니다.
참된 설교에는 설교 내용과 설교를 전하는 행위가 많은 비율로 결합되어 이루어 집니다. 같
은 설교 내용 이라도 전하는 행위에서 성령의 함께 하심과 그리하지 않음은 명확합니다. 설
교자는 빛(내용) 과 열(행위)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설교의 주요 목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존전에 있다는 생각을 주는 것입니다.
제임스 헨리 돈웰에 의하면 설교는, 연구 , 훈련, 기도, 성령의 감동의 필연적 열매로, 믿음
의 성실함 뿐 아니라, 끊임없는 천적 인애하심을 힘입어 선포되는 , 은혜와 신적 능력에 속
한 신비 입니다.
설교자
복음을 전함은 모든 그리스도 인들에게 소명 주어졌으나, 전파함(Herald)은 몇몇 사람들 만
이 메시지를 전하도록 별도로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진정한 소명은 언제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 그들의 타락을 뼈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하며, 어떤 메시지를 말하고 구원의 길을 알려 주어야 겠다는 소원을 포함하게 됩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경건한 자라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지적한 바,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
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딤후 2장24절), 말의 재능이 있
고, 정확해야 합니다. 사실 설교하는 일이란 가르쳐 만드는 것이기 보다, 설교자는 낳는 것
입니다. 설교자의 기교는 전체로 볼 때 사소한 것이요,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
영혼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앎으로, 하나님의 백성 안에 계신 성령께서 설교토록 (전하
도록) 역사하십니다.
회중
지식인 이나 비 지식인, 공장 노동자와 경영주, 전문가와 비 전문가 그 누구든, 우리는 모
든 죄와 타락과 절망에서 하나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면에서
하나 입니다. 모든 청중을 공통 분모에 이르게 해 주는 것은 설교자 의 치명적으로 중대한
임무 입니다. 자족하는 바리새인 에게 그의 궁핍이 세리의 그것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할지
라도, 똑같이 궁핍이 큼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기의 지식과 이해력을 뽐내는 자들에게, 지
식을 자랑하는 죄가 있음을 알려줘야 하고, 그 지식을 자랑하는 죄란 가장 큰 죄악 중 하나
라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설교 전달에는 한계 있는 탄력성이 요구되며, 방법은 메시지와 일치하며 조화 되어야 합니
다. 모든 일은 하나님 아래 있어야 하며, 주를 경외함과 두려움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메시
지가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도록.. 현대적 사고 방식에서 진정한 난제는 성령과 그
의 능력을 일어버리고 , 일치됨 없고, 조화됨 없는 방법의 정당화를 구하여, 현대의 심리학 상 이
론을 받아들이는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메시지의 성격
설교자는 청중의 상태와 위치를 평가해야 합니다. 주의 할 것은 사람들을 너무 단순한 수준
으로 생각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회중 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
가를 확신할 만한 형태의 설교를 듣지 못하게 가려질 수 있기에 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증거를 싫어하고 , 그것을 기뻐하지도 즐거워하지도 않고 마땅히 얻을 수 있을 만큼
원치 않는다면, 이들이 정말 그리스도인 인가 ? 의문을 제기함이 합당합니다.
모든 개혁 시대나, 부흥 운동 시대의 특징은 날마다 설교(강론)가 전해졌고, 예배에 참석하
라 강권 받기보다, 청중은 설교 듣기를 갈망했습니다. 예배 참석에 가치 있음을 알게 해야
합니다. 참석으로 진정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고, 청중은 진리
의 지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생각할 것이기에 입니다.
설교 단이 회중 석을 평가하되 권위를 가지고 해야 하니, 오늘날 교회에서 최대로 필요한
것은 설교자에게 이 정당한 권위를 회복시켜주는 것입니다. 학위 나열에 의한, 지식, 교양적
인 권위 문제가 아닌 영적 권위의 문제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 하십시오. 그리고 만일에
대비 하십시오.
설교자 의 준비
설교자 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문제를 관망하고, 특별한 문제에 까지 내
려가기 전에 전체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고, 분명하고, 옳아야 합니다. 아침 시간을
귀히 보냄으로 지켜야 하니, 설교자는 사람의 생명을 위해 싸워야 하기에 입니다. 기도는
설교자의 생활에 절대 적으로 중차대 합니다. 기도할 수 있는 체제와 상태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 역시 중요합니다. 설교자는 무시로 기도해야 하며, 매일 정규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전체를 조직 적으로 읽는, 독서를 위한 시간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독서는 균형이 유지되어야 하고, 설교 아이디어를 위한 독서가 아닌, 마음의 휴식을 위해
필요합니다. 음악 청취 역시 그러합니다. 설교자는 자신을 여러 국면과 체험을 통한 생애
의 다양성을 알고 , 진리와 영감의 풍성한 자유 함을 잡음으로 무기력하고 컬컬한 시기에
의지할 무엇을 가져야 합니다.
설교 준비
설교가 본연의 위치를 가질 때, 심방의 가치가 주어집니다. 설교자의 강단의 기도는 중요하
며, 설교자의 방식에 의해 이런 일이 아주 크게 결정됩니다. 설교에 있어서 메시지는 언제
나 성경에서 직접 나오는 것이지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형식화 한 것에서 나오지 않기에, 신
학을 강론함은 진리에 대해 이론적인 태도와 지나치게 지적인 자세를 산출할 경향이 있기에
바람직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자유로운 인도 하심을 예측함은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을(요3장8절) 예측하기 어려
움 보다 더 합니다. 오늘 날 어느 교파들에 있어서의 위험은 과도한 사유화로, 현실에서
지나치게 이지적 이 되어 신앙의 기초인 사실성과의 접촉을 잃어 버렸음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음을 확신합니다.
성경을 차근 차근하게 본문을 파헤치는 강해 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더불어 실제 설교 준비
에서 황금률은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설교 본문을 문맥에서 찾아야 하고 본
문에 정직해야 하며, 구절 구절 정확한 이해를 위해 결정짓는 영적 의미를 간파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맨 처음 배워야 할 일은, 본문과 이야기 하는 것이니, 본문이 설교자에게, 설교자
가 본문에게 말해야 합니다. 사실상 해당 본문이나 진술의 주요 메시지, 주요 핵심, 요점을
얻으려 함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본문의 주요 핵심에 확실히 도달해야 하는 것보다 더 중
요한 것은 없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를 듣고 무슨 의미인지 본문에게 물어 보십시오.
설교의 조직
본문의 주요 메시지와 요점을 발견한 후, 그 본문의 실제적 배경과 적용 가운데 주요 메시
지를 진술해야 하니, 본문의 원 배경과 그것이 어디에 적용되었던 것인가를 보여줘야 합니
다. 이단자들은 잘못 해석한 진술에 근거한 사상을 취해서 성경의 다른 부분으로 점검해
봄 없이 그것 하나로 일관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성경 유사 대구를 살핌에 의한 진술의 미
묘함을 밝힌 후 청중 과의 관계성을 보임이 설교의 서론이며, 제목, 흐름, 주제 등으로 유도
하는 방법 입니다. 하지만 방법의 노예가 될 이유는 없고, 상황 진술로 족합니다.
다음은 명제, 대지 , 소제목, 통상 서론 과 대지 셋, 소 제목은 본문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
온 것이어야 하며,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대지의 수를 늘려 기교를 부리거나 명석
한 척 하려는 모든 유혹을 피하며, 진리를 이해하기 쉽게 해야 하며, 메시지를 얻고 난 후
적절한 형식 구성은 , 대지 들이 절정과 결론적 적용에 이르도록 하였는지 살펴야 합니다. 순
서 있고 , 조리가 서고 , 자유로움이 또한 요구 됩니다.
골조 공사가 건축에 중요하듯, 교리와 형식은 중요하나,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며 적절한 마
무리가 필요합니다. 인용에서는 각주가 요구되며, 보다 더 인용에 대한 필연성이 있어야 합
니다. 그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행해지고 있음과 이들에게 실제
적 도움을 주고자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화, 웅변, 유머
설교 개용 와 뼈대 만으로 부족하며, 요점이 정리 되어야 하며, 주요 대지와 여러 개의 항
목과 세목을 자세히 정리해야 합니다. 준비는 간명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전할 말을 세목들로 자세히 구분하여 놓음으로, 면밀한 준비는 불필요 하다는 망상에서 벋
어남이 요구됩니다.
물론 가슴이 기독교 인 다운 기쁨으로 가득 차고 , 주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넘치고 , 어떤
어려움이나 걸리는 것이 없이 말함은 금상첨화이나, 부흥회와 평상 생활의 차이 또한 무
시해서는 안됩니다. 영적인 것에서 심리적인 것으로 번져가는 영적 불황으로 치달을 수 도
있기에 입니다.
설교 준비를 할 수 있는 한 잘 해 놓는 것이 결코 성령을 불신하는 ,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81편의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10절)함을 여자적으로 받아
준비 없이 기다림은 영적이고 유능한 사람이나 , 쓸모없는 설교자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설교함에는 회중과 설교자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과 인격성과 심령과 마음의 상호 작용을 수
반합니다. 하기에 설교문을 그저 낭독함은 해악 입니다. 설교는 이론적 , 학적인 강의가 아
닌 주고 받음의 요소가 있는 살아있는 접촉입니다. 성령의 감동에 개방적 이어야 함은 두말
할 나위 없습니다. 성령께서 설교자를 사로잡아 인도할 때 설교자는 끌려가도록 그대로 놓
아두셔야 합니다.
예화 사용에 있어서는 , 예화 사용과 성경의 한 부분을 영 화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안다는 것을 전제 합니다. 픽션이나 세속이야기로 예화를 들기 보다는 구약의 사건을 예로
드는 것이 좋고, 예화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고, 자주 사용함은 회중 들의 음욕을 조장하
는 결과가 됩니다. 예화와 예증은 진리를 밝혀 줌을 목적함으로 족합니다. 사리에 적절치
않은 예화 사용은 진리의 타당성 마저 의심하게 만듭니다.
상상의 경우는 그리스도를 위해 문화의 모든 양태를 석권하는 것을 믿는다면 상상을 경멸할
이유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것은 합당치 않으니, 우리는 진리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
이지, 우리의 상상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에 입니다. 설교자는 언제나 밝혀져야 하는
것보다 밝혀주는 상상력 이나 일화 자체에 기쁨을 가질 때 ,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
순간 그만 멈춰야 합니다.
웅변 또는 설득력에 있어 설교 가는 웅변적이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설교자의 마음
에 저절로 보여지는 진리와 생각의 장엄함 때문 웅변을 통한 설득력이 쏟아져 나올 때 , 이
는 참된 설교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몸종으로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입니다.
설교에 유머를 사용할 수 없다 할 수 없으나, 설교 사역의 성질과 취급하는 진리의 형식 때
문에 그리 큰 위치를 차지함은 아닙니다. 설교의 길이는 너무 기계적 이거나 고정적이
어서는 안됩니다. 설교자 자신의 문제에 따라서 시간은 상대적 이기에 입니다. 설교자는
설교 함에, 기계적 습관으로 나오거나, 단순한 자기 의로 나오는 사람의 감정보다, 부활하신
주님의 명을 더 귀히 여김으로 , 우리의 최우선 관심이 진리와 이에 대한 사람의 필요를 채
워야 합니다. 시간의 차원에 매이도록 청중을 방치해서 안되고, 정말 시간의 멍에와 이 세
상 만의 삶에서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 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노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면 다양한 문제나 다른 어떤 국면에서
든 길을 잃어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금기 사항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의 진리 말씀 강론을 듣기 위해 나와야 하기에 ,
어떤 특정한 주제나 문제보다 이점이 우리의 심중의 최상층에 자리해야 합니다. 청중들로
하여금 설교 내용을 결정짓지 못하게 하고 주제 중심으로 나아가려는 주지주의에 빠지지 않
게 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미디어에 의한 의사 소통 좋으나, 도구나 시간에 매임은 참된 예배에 적절치 못하니, ' 성령
의 하나되게 하신 것'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임' ' 내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이
는 곳에 나도 그 가운데 있으리니'라는 말씀 같이 , 말씀 증거가 청중들의 간절한 마음을
채워주어 , 교회에 자의로 정규적으로 참여하여, 회중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에 동참함이 적
절합니다.
설교자는 직업 주의를 피해야 하며, 지식의 과시 또한 피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가장 큰
시험은 교만의 시험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설교 내용과 설교 행위 안에 논증의 위치 입니
다. 논쟁과 변증 학으로 교회가 세워짐이 아니니, 자아를 버리고, 하나님 존전에서 적극적
인 진리를 전함 가운데, 진리의 영광과 위대성에 몰두함이 올바른 상태 입니다.
결심의 요청
목사는 찬송 인도자를 그리스도인 인지를 확실하게 하고서 임명해야 하며 성가대원 역시 그
러합니다. 첫째 조건은 목소리가 아니라 , 그리스도인의 태도, 진리에 대한 사랑, 진리를
노래하는데 대한 기쁨이어야 합니다. 예배에 있어서 , 예배당 의 건축 양식, 예배 의식, 성
가, 음악 등에 강조점을 두고 , 기울이는 관심 만큼, 영적으로 빈약해지기 쉽습니다.
프로그램이 상황을 좌우하여 설교는 유흥의 일부라 여겨지면 안됩니다. 음악은 제자리를 지
키게 해야 하니 음악은 수종 드는 것이요, 종이지 , 어떤 의미에서든 음악이 무엇을 좌우하
고 조정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심리적 분위기 조성과 영적 분위기 는 같지 않습니다.
설교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진리를 나타내야 함은 명백하나, 헌신의 요청 등 의지에 대한
과다한 압력이나 직접적 강압은 위험합니다. 진리를 이지가 포착하고 이해 했을 때 감정이
일어나고 감동되어 순종케 되어야 합니다. 말씀 증거나 결정의 요청이 우리의 사고에서 분
리되지 않아야 합니다. 죄인들이 처음부터 결심과 회심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고, 성령께
서 전도자의 교묘한 역사로 조정되시는 분이 아니며, 청중에게 피상적 인 죄의식을 산출할
수 있기에 입니다. 단순히 헌신의 요청에 응함이 구원 선에 승선한 것이 아닙니다.
호소력은 진리 그 자체와 메시지 속에 있고, 호소는 설교 전체를 통하여 설교자가 행하는
모든 것 속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찬송을 부른 뒤의 특별한 호소와 다로 떼어 하는 호소
는 성령께서 그렇게 하도록 강력하게 설교자를 내리 누를 때에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께 맡기는 것과 성령의 실수 없는 역사에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함정과 낭만
설교는 단순한 진리의 진술이나, 여러 가지 진리의 나열이 아닌 그 이상 입니다. 설교를
반복해야 한다 할지라도 새로운 정황에 적합하게 전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할 설교
를 알 때에 어떠한 육신적 조건에 처할 찌라도 바른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다른 사람의 설교를 쪽 전해야 겠거든 , 필요 없는 것은 삭제해 버릴 줄 알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서 그 설교 원작자에게 은혜를 입은 것을 사람
들에게 밝혀 주십시오.
메시지가 설교자에게 능력으로 임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 때에는 , 회중 들에게 똑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또 준비할 때는 알지 못했는데 설교하는 동안, 생각지도 상상하지도 못하
는 일이 갑자기 일어나서 , 설교자가 놀라움과 고마움과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넘치게 되
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일에는 없는 이 같은 일, 영광스러운 목회 사역에 부름을 받았
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함이 마땅합니다.
또 설교 들을 어떤 자에게는 생의 전환 점이 될 수도 있음을 감사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설
교자가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그러므로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력 있는 증거
성령 감동을 바라는 바른 방법은 성령의 감동이 준비한 것에 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
니다. 하라고 하는 일을 마친 다음에 주의 영광이 성막에 임했듯,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는 것은 진리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면밀한 준비는 서로 상충됨이 아니라 상
호 보완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설교하기 전 성령의 기름 부으심 과 감동을 기다림은 , 설교자가 사람의 노력과 열심을 초
월하여 성령에 의해 쓰임을 당해 그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는 도구가 되는 위치에서 설교
사역을 수행토록 성령을 통해 설교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 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경우, 성령께서는 그들을 붙잡고 하나의 메시지를 주고 그 메시지를 전하
는데 필요한 권능을 주셨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영감을 감지 했습니다. 요단 강에서
예수 우리 주님에게 있었던 일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이 효과적으로 증거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권능과 기름 부음이 나타남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권능이나 권능의 발현은 반복될 수 도 있고, 매우 여러 번 되풀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성령 세례의 진정한 목적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능력 있게 증
거 하게끔 하는데 있고, 성령 세례는 중생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성화를 촉진 시키기 위
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능력의 세례 , 불 의 세례인 바 사람으로 하여금 증인이 될 수
있게 하는 세례입니다. 새로이 능력으로 옷 입혀 졌음을 의미합니다. 성령 충만이 되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성령 충만은 급박한 위기에 처해있는 사람에게 예외적 인 방식으로 그에게 임하여서 그 위
기를 대처해 나갈 수 있게 했고, 능력 있게 증언 하도록 했습니다. 특별한 능력의 재 충만
이요, 특수한 경우를 당하여, 특수한 권능을 다시 받았던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강권함을
당해서 능력을 받기 까지 일과 시기를 아무도 몰랐습니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이
의 역사' 곧 '성령의 감동'의 의미 입니다. 복음 전도, 성령의 능력, 큰 확신 , 이것이 교회
를 회심 시켰고, 교회를 창조 했고, 설립했습니다.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평상 시의 상태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요한 의 계시
는 성령의 감동의 결과입니다. 설교하는 일에 관한 정확 무오 한 성경적 증거와 증언입니
다. 능력이 임하였다가 능력이 물러 갔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주권입니다.
성령을 구하십시오. 항상 찾으십시오. 찾는 것 이상으로 구하십시오. 능력을 갈망하십시오.
능력이 임할 때 복종하십시오. 아무것도 이를 대신 할 것이 없습니다. 감동 하심과 기름
부으심은 최상 최대의 것입니다. '내 말과 전도함이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아니하고
성령과 그 능력을 따라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추구 하십시오. 이 능
력을 간절히 기대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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