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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박스가 영아 유기 조장한다? 정부 대책 내놨으면 만들지도 않았다"

지식창고지기 2011. 12. 2. 08:39

"베이비박스가 영아 유기 조장한다? 정부 대책 내놨으면 만들지도 않았다"

한국일보|

버려진 아기 거두는 베이비박스 설치 '주사랑공동체교회' 이종락 목사

아기 버리러 온 부모 설득 직접 키우게 한 경우도 23

미혼모가 입양기관 찾아가면 애 아빠도 같이 오라 돌려보내

극단적 선택 막을 대책 있어야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30일 오후 골목길을 물어 물어 자그만 교회 앞에 도착했다. 서울 관악구 난곡동 646-151번지에 있는 '주사랑 공동체 교회'. 교회 담장에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베이비박스가 설치돼 있고, 그 옆에는 '장애가 있는 아기를 돌볼 수 없다면 길거리에 버리지 말고 이곳으로 데려오세요'라는 안내 문구가 적혀 있다. 이 자그만 상자 안에 아기를 넣고 문을 닫으면 자동으로 벨이 울리며, 또 한 명의 생명이 세상에 버려졌음을 알린다. 베이비박스는 2009 12, 교회의 담임목사인 이종락(57) 목사가 버려지는 아이들을 위해 설치한 '긴급 구호 시설'이다.

 

  

 

이 목사가 버려지는 아이를 거두게 된 인연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대병원에서 14년 동안 중증 뇌성마비 아들을 돌보던 이 목사에게 한 할머니가 다가왔다. "아저씨, 내게도 뇌성마비를 앓는 어린 외손녀가 있소. 부모가 없어 내가 돌봐왔는데 언제까지 곁에 있어줄 수는 없잖아. 내가 사흘 동안 아저씨를 지켜봤는데 아이를 정성으로 돌보는 모습이 믿음직했어. 그래서 말인데, 아저씨가 우리 손녀를 좀 봐주면 내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어." 평소 장애를 가진 아들을 돌보면서 언젠가 주위에서 받은 도움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이 목사는 흔쾌히 할머니의 외손녀를 맡기로 했다.

 

그 때부터 '이 목사가 장애가 있는 영아를 대신 키워준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모들 대부분은 아이를 버린다는 죄책감 탓인지 아이를 교회 앞 길바닥에 놓아두고 갔다. 2007 12월 유난히 추웠던 어느 날 새벽 3,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갓 태어난 아이가 얇은 종이박스에 담겨 버려져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아이는 저체온증으로 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일을 계기로 이 목사는 2009 12월 가로 70, 세로 40, 높이 55㎝에 신생아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베이비박스를 설치했다. 이 목사는 "영유아들이 쓰레기장이나 화장실에 버려지는 것을 보다 못해 설치했는데, 막상 이듬해 3월 대낮에 갓 태어난 아기가 베이비박스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하도 기가 막혀 아내와 함께 30분 넘게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했다.

 

지난 2년 동안 20여명의 신생아가 베이비박스를 거쳐갔다. 대부분 장애가 있거나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는 미혼모의 아이들이다. 흔히 베이비박스를 무조건 아이를 버리는 곳으로만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아이를 버리러 온 부모들을 설득해 직접 키우도록 한 경우도 23건이나 된다고 한다. 이 목사와 부인 정병옥씨는 버려진 아이 가운데 장애를 지닌 6명을 입양하고, 4명에게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다.

 

베이비박스가 '영아 유기를 조장한다'는 논란이 일자 지난 4월부터 베이비박스를 통해 아이가 들어오면 경찰에 신고해 시설 입소나 입양 절차를 밟도록 하고 있다. 이 목사는 "국가가 버려지는 아기에 대한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는다면 왜 이런 게 필요하겠느냐"며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지금은 아기를 버리는 부모를 처벌하는 법만 있을 뿐 버려지는 아기를 살리는 대책은 없습니다. 임신한 10대 여학생이 입양기관에 상담하러 가면 '아기 아빠와 같이 와야 된다'고 하는데, 아기 아빠인 남자친구가 도망가 버린 뒤라면 여학생은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이 목사는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한 것과 같다'는 탈무드의 명언을 인용하면서, "버려지는 생명을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 내 소명인 만큼 앞으로도 이 일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