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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

지식창고지기 2012. 1. 26. 08:29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면 구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이해는 보통 개념적인 설명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설명은 이론 전개를 가져오고, 이론은 관념을 낳는다. 개념, 관념, 이론, 설명과 같은 것은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집착하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이율배반적인 관계에 있다. 이해하기 위하여 설명하고 이론적으로 전개하고 개념화하고 관념화해버리면 확신을 가지는데 때로는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개념과 "사건"을 항상 연결시켜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개념적 선언을 전개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의 명령이고 나아가서 하나의 개념이다. 거기에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사건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개념에 얽매어서 그것을 설명하려고 애쓴다. 성서에 나타난 관념적, 개념적 차원의 이야기, 특히 하나님의 명령인 십계명이나 율법의 조문들은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그러한 것은 사건이 있기 전에, 흑은 사건이 있은 후에 그것을 설명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사건이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서 일이 전개되고 있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사건이란 사실이 아니라 신앙 사건을 가리킨다. 신앙 사건들 찾아야 한다. 특히 신앙 사건 중에서도 변화 체험이 일어나는 사건을 찾아서, 그 사건을 본문으로 하고, 교인들에게 소개하면 모든 교인들이 그 사건에 동참하게 된다. 사건을 소개하고 교인들이 거기에 동참하였을 때 비로소 개념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때에는 그것이 관념이나 개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명령이어야 한다. "너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 바로 그 때 충격이, 감동이 오는 것이다.

성서의 개념적인 언급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틀림없지만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의 작업을 통하여 성서가 쓰여지고 만들어졌을 때와 꼭 같은 사건을 일으키도록 하고, 그 사건에 교인들과 목회자 자신이 동참하여 그 사건 속에서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면 확신이 생긴다. 전하는 자신도 확신이 있고 그 전달하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확신이 생기는 것이다. 이 때 변화 체험, 곧 구원을 체험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개념적인 내용을 설득시키기 위하여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화신을 얻어내려면 논리를 전개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논리를 전개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논리를 전개하면 자꾸 다른 이유를 달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구조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총체적으로 교인을 한꺼번에 쓸어안는 것이다. 논리는 분해시킨다. 그러나 구조적인 접근은 조합하여 전부를 얻어낸다. 구조적으로 접근할 때 깨달음을 얻는다. 구원에 대한 접근 자체가 깨닫는 사건을 체험하게 하고 그 다음에 자기 안에서 확신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아메리칸 인디언 사이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격언이 있다. "내게 이야기 해 달라 그러면 내가 잊으리라, 내게 보여 달라 그러면 내가 기억조차 하지 않으리, 그러나 나를 참여시켜 달라 그리하면 내가 이해하고 나도 동참하리라". 이것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말이지만 우리의 목회 현장에 결정적으로 필요한말이다. 우리가 복음을 이야기 하기도 하고 복음의 사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복음의 사건에 끼워주지 않는다면 복음이 가져다주는 구원을 체험하지 못하여 구원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오늘 나의 삶 속에서 확신으로 받아들일 기회를 놓치게 된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이론적으로 관념적으로 무엇이라 말하지 못하지만, 체험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구원 체험이라는 것을 쉽게 성서적으로 풀어서 말한다면 '너도 변하여 새 사람이리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다. 그 말은 성경에 수없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 말이 하였던 대표적인 경우는 이사야 43장, 에베소서 4장 21절 이하 들 수 있다. 부분을 종합하여 간단히 예증하도록 하겠다. 이 둘은 개념적인 것으로 아직 사건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선 개념적인 작업을 하고 사건을 검토하기로 하겠다.

구원의 체험을 한마디로 '변하여 새 사람 되는 것'이라고 하면,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내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나를 건져내시고 그리고 그 먼저 내어진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모세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목회자들의 뇌리 속에 새겨져 있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자연인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변하여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새 사람이 바로 신앙인이다. 어떻게 새 사람이 되는가?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은 일단 한 번 태어나면 겉으로는 새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속 사람이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전도서 1장 9-10절에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라고 하였다. 에베소서 4장 21-24절에도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다. 나에게 새로워 질 것이 무엇인가? 우리 안에 새로와 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생각'이다. 생각이 새로와 지려면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야 하고, 관계가 새로와 지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나 자신자의 관계가 새로워 져야 한다. 육체의 내가 있고 영적인 내가 있는데, 정신적인 내가 그 둘의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하며, 이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자아의식, 즉 내가 나와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과의 문제를 새롭게 한다는 것은 단지 나 자신과의 관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한쪽 끝은 육체에, 또 다른 끝은 영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고, 그 둘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정신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한편에서 문제가 해결되려면 다른 편에서도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과의 관개가 새로와 지지 않고서는 관계가 새로와 지지 않는다. 내가 변하여 새 사람된다는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 져서 나 자신과의 관계가 새로워 지고, 나 자신과의 관계가 새로와 짐으로써 내 이웃과의 관계가 새로와 지고 대인관계가 형통해 지는 체험을 하게 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임마누엘 신앙이다.

생각이 새로워 질 때에는 새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새 일을 해야 새 사람이다. 이 때 새 일이란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사 43 : 18 이하)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이 흐르게 하는 것이다. 이 지구에서 어디가 광야이고 사막인가? 중국 땅이 광야이고 사막이다. 새 일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역사 하시는 일이 새 일이다. 우리는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에베소서나 이사야서에 공통적인 전제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그 전제 조건은 옛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옛 일은 기억조차도 하지 말고 새 일을 구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 선택의 동물이다. 오늘의 나는 나의 날마다의 선택이 축적된 결과이다. 신앙도, 구원의 확신도 선택에서 시작한다.

이처럼 새 일을 하게 되면 새 힘이 생긴다. 새 힘이 생겨야 새 일을 하게 퇴는 것이아니다. 이사야 40장 29-31절에서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고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새로운 생각을 가지려고 애쓰며 새로운 관계를 가지려고 하고 새 일을 하면 새 힘이 솟아오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고 죄의식을 불러 일으켜 주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고 잘 타일러 선택하도록 할 때, 성경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는 의식화 작업이 일어날 때 신앙이 생기는 것이다. 구원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 체험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아 저절로 터져 나오는 구원의 체험이다. 이 네 가지 요인의 입체 구조 속에 들어가 휩싸이게 되면 네 가지 사건을 한꺼번에 체험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구원의 체험이고 변하여 새 사람되는 체험이며, 그 체험을 가지게 되면 목회의 현장이 역동적이 되고, 나의 삶 자체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생각, 새 관계, 새 일, 새 힘은 신앙 생성의 네 요소와 잘 연결된다.

변하여 새 사람되는 사건 속에는 독특한 특징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순간의 변화"이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갑자기 빛을 보고 눈이 멀었고, 소리를 듣고 심령에 충격을 받아 의식을 잃었다. 사도 바울의 제자 누가는 바울 회심의 전체 이야기를 사도행전 9장 1-19절, 22장 2-21절, 26장 12-19절에 세 번이나 반복하여 보도한다. 이 외에도 다른 곳에서 부분적으로 인용한 것을 고려한다면 수십 번을 말하고 있다. 신앙 사건을 체험하면 신앙 고백이 저절로 나온다. 이 때의 신앙고백이 바로 간증이며 이 간증을 통해서 증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신앙 사건이 일어난 것을 말하라는, 즉 신앙고백을 하라는 것이다. 그 신앙 사건의 핵심이 바로 예수라는 것을 말하라는 것이다.

다른 또 하나의 특징은 니고데모의 신앙에서 찾을 수 있다. 니고데모는 예수와 토론하였을 당시에는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예수를 체포하려는 산헤드린 의원들 앞에서 축출의 위험을 무릅쓰고 담대하게 어째서 율법대로 하지 않고, 곧 본인의 증언도 듣지 않고 잡으려고 하느냐고 말하였다. 니고데모는 말로 간증하지 않고 예수께서 가장 어려을 때 조용히 행동으로 그를 변호하였다. 그 뿐 아니라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대화한(요 3장) 후에도 예수께서 일으키는 신앙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에 찾아가 보면서 조금씩 변화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장 어려울 때 그 분을 도왔다(요7: 45-52). 더 나아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향유 백근을 가지고 찾아가서 예수의 시신을 그 향유로 장사지내도록 하였다(요 19'38-40 참조). 니고데모는진정한 신앙인 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두 번째 특징이 있다. 즉 점증적으로 변하여 새 사람되는 것이다. 갑자기 변하여 새 사람된 경우가 바울이라면, 니고데모는 날카롭게 지성적으로 점차 변하여 예수께서 가장 어려을 때 예수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예수가 체포 명령을 받아 피해 다닐 때 감히 산헤드린 의원들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하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난 뒤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그는 예수님을 찾아갔다. 그는 한 때 밤중에 예수를 찾아갔었지만 이번에는 대낮에 예수의 시신을 위한 향유를 내놓았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있었는가? 우리는 성경을 가시 읽어야 한다. 갑자기 변하여 새 사람되는 경우도 있지만, 조용히 성경공부를 통하여 조금씩 변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까지 동참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