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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복음서를 읽을 것인가?

지식창고지기 2012. 1. 26. 08:25

어떻게 복음서를 읽을 것인가?

(들어가는 말)
'복음'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우리에게 친근하기만 하다. 그러한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 복음서 또한 우리가 쉽게 접하고 많이 읽혀지는 성경이다. 그러나 복음서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그저 맹목적으로 읽혀지는 것이 이시대 복음서의 현주소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어떻게 복음서를 읽을 것인가?' 라는 책을 요약함으로 복음서를 복음서답게 바라보는 법을 알아보도록 하고, 후에 나의 사상적 틀을 가지고 비평함으로 올바른 길을 찾아가도록 노력해 보겠다.

(몸 말)

-제Ⅰ부- 복음서에 대한 접근

복음은 숨쉰다. 복음은 걷고 말한다. 복음은 바로 살아 계신 나사렛 예수님이다. 이러한 복음을 기록한 것이 복음서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기록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문학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어렵다. 예수님의 메시지에는 어떤 핵심이 있는데, 어느 복음서를 읽든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결정적이다. 복음서의 주된 관심사를 이해하기 위해 복음서 외부에서 어떤 틀을 부과할 수는 없다. 오직 예수님의 메시지만이 이러한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훨씬 더 기본적인 질문들을 던져 보자. 복음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는가? 이 질문에 대한 많은 대답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네 가지를 언급하겠다. 우선 복음서는 우리의 신앙을 실제 역사에 입각하게 해 준다. 둘째로, 복음서는 독특하고도 매우 중대한 방식으로 심지어 그들이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의 의미를 해석해 줄 때와 같이 우리를 나사렛 예수와 만나게 해준다. 셋째, 우리는 복음서에서 지속적인 적절성을 갖고 있는 메시지와 도전을 발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복음서는 그리스도인이 삶을 살아 갈 역사적 무대를 제공해 준다.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관련을 맺는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자.

왜 네 개의 복음서가 있는가? 복음서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는 문서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어떤 면에서 복음서들이 바울의 서신서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경우를 위한 저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각 복음서 저자들도 특정한 필요들을 다루기 위해 그의 복음서를 썼다. 고대 복음서들에 주어진 제목은 "마태에 따른" 등과 같은 제목이 각 복음서에 붙어 있었다. 이 "따른"이라는 말은 네 복음서 기자가 모두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의 이야기-즉, 하나의 복음-에 대한 근본적 일치를 암시한다. 오직 한 복음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네 명의 서로 다른 저자에 의해 표현되었다. 그렇다면, 고대 교회는 그 이야기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초점과 주제가 궁극적으로 일치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오늘날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우리는 초대교회가 네 개의 복음서를 모두 선발하여 그것들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사실상 어떤 한 복음서도 다른 것보다 "더 낫다"거나 아니면 "더 정확하다"고 주장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네 복음서가 모두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한 복음을 똑같이 타당하게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들이 그 복음을 독특한 방법들로 증거하고 있긴 하지만, 각각은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지니고 있도록 허용되어야만 한다. 각각의 복음서는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서 나름대로의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어떤 한 복음서도 단독으로 복음을 권위 있게 증거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것들은 상호 보완되고 상호 균형을 이루며, 각각은 한 복음의 특성의 서로 다른 측면을 드러낸다. 네 복음서가 모두 필요하다.

신약에 네 개의 복음서를 포함하기로 한 두 번째 이유는 이것이다. 단 하나의 "예수님의 생애"를 선택하지 않고 네 개의 복음서를 선택함으로써,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다른 청중들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고안해 낸 형식과 언어로 표현하려는 노력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면 네 복음서가 어떤 문학적 관계를 공유하고 있는가? 사실 종종 공관 복음이라 불리는 처음의 세 복음서는 문학적 관계를 공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첫째로, 이 세 복음서들은 내용에 있어 서로 매우 유사하다.

둘째로, 이 복음서들은 똑같은 일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 번째는 결정적이다. 공관 복음서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는 많은 부분들 안에는 그 사용한 어휘만이 아니라 문체와 말의 표현에 있어서의 일치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누가와 마태가 마가복음을 사용했다는 것은 어떤 차이를 보아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복음서들을 해석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이런 종류의 연구를 위해서는 "복음서의 병행구"또는 "복음서의 대조표"가 꼭 필요한 도구다. 이 병행구절들에 대한 비교 연구는 각 복음서 저자들의 관점과 그들의 특별한 관심사를 파악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는 것은 사실상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해악이 아니라 혜택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대해 훨씬 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 주며, 우리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그 메시지를 적절하게 적용할 방법들을 찾아 내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복음서들의 문학적 관계를 주목하는 것은 각 복음서 저자들의 관심사를 잘 알게 도와 주며, 우리에게 복음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기초를 제공해 준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셨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보통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그 당시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가를 간과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메시지를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분이 그 당시에 어떤 분이었는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한다. 예수님이 그 분의 사역을 수행하던 무대는 20세기의 서구가 아니라 1세기의 팔레스타인이었으며, 우리는 복음서를 읽을 때 이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또한 우리는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를 단일한 하나의 운동으로 보려는 오늘날의 경향도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그 당시의 역사와 비슷하다. 종교적 운동들은 쉽게 하나의 좁은 길로 몰아넣을 수도 없고, 또한 그것들은 일관되게 동질적인 형태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식탁에서 교제를 나누듯이, 구약 시대 및 신구약 중간 시대의 배경을 알고 예수님 당시의 사회 종교적 배경을 고려하게 되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 의미를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제Ⅱ부- 복음서의 특성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이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좋은 소식"을 뜻한다. 그러나, 이 복음이라는 말의 종교적 의미는 통치자의 신탁과 활동을 묘사하는 용어로서 황제 숭배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황제의 복음"과 대비시켰으며, 그럼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선포했던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과 복음간에 밀접한 관계가 맺어지고 있다. "복음"과 "예수님"이라는 두 단어가 병행하여 나타나며, 따라서 우리가 받는 인상은 복음에 헌신하는 것은 예수님께 헌신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복음이란 말은 그가 이제 막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복음을 구두로 진술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가복음을 -아울러 다른 복음서들을- 설교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은 을 쓰면 그것을 "전파"로 부를 수 있다. 복음서를 전파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데 유용한 몇 가지를 알아보자. 첫째로, 하나의 전파로서 각 복음서들은 특정한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복음서를 "전파"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들 각각을 통해 말씀하고 계심을 이해하게 된다. 셋째로, 하나의 "전파"로서 각 복음서는 역사와 신학을 독특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이제는 복음서가 과연 예수님의 삶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오늘날 교회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복음서의 주된 기능이 단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바를 우리에게 말해 줄 뿐이라는 유혹에 빠진다.

신약을 연구해 보면 복음서 기자들-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결코 현대적 의미에서의 예수님의 전기를 쓰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쓰는 것에도, 또 그런 기록을 위한 원자료를 제공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20세기를 사는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점은 복음서에서 쉽게 예증할 수 있다. 첫째는 복음서 기록에 명백하게 나타난 연대의 문제다. 만일 복음서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이라면 그 정보가 놀랄 만큼 빈약하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서의 역사적 가치를 부인하고 있는 것인가? 복음서 저자들이 무책임하게 행동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관심사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지난 2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저술의 강조점이 바뀌었으며, 복음서를 현대의 전기나 역사 교과서처럼 읽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들의 순서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복음서 기자들이 나타내고 있는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 그들이 단지 사실적인 사건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데 그리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관찰 사항들로부터 우리는 복음서들이 단지 예수님의 삶, 또는 심지어 그 분의 공적 사역의 기록 보관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복음서는 초대교회의 창작품인가? 메시지는 선택된 자료들과 저자의 역사 해석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그것들은 연대적인 세부 사항들, 또는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나 "실제로 말한 것"을 정확하게 재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각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각자의 독특한 초상을 제시하지만, 분명 모두가 같은 역사적 인물을 묘사한다. 그렇다면, 복음서는 좋은 소식이다. 사실 이 저술들은 예수님에 대한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독자들로부터 특별한 반응을 이끌어 내려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좋은 소식이다. 복음서 자료의 신빙성을 여러 논증에서 사전에 규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자체가 제공하는 자료들을 반드시 고려해 보아야만 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복음서 자체가 역사를 기록하려 했었는지의 여부를 물어 보아야만 한다.

실상 복음서의 역사적 성격을 지지해 주는 많은 증거가 있다. 우선,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결국은 복음서, 즉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이야기들이라는 단순한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만일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삶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들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복음서라는 문학 형태를 생각할 수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부활 이후에, 그리고 심지어 그가 사역하고 있을 동안에도 특별한 권위를 부여 받았었기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의 말들이 주의 깊게 기억되고 널리 퍼져 있었다. 이에 대한 보다 많은 증거가 신약의 다른 세 군데서 발견된다. 첫째로, 사도행전의 본문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관한 세부 사항들이 초대 기독교 선교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두 번째 본문인 막1:1도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생애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있어 마찬가지로 중요한 본문이다.

세 번째 본문은 요한일서1:1-2이다. 이 서신서의 저자는 분명 예수님의 참된 인성을 부인하는 당파에 직면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미 서신서의 처음 시작 부분에서 예수님의 지상 생활의 확실성과 중심됨을 선포하고자 분투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복음서 기자들은 역사적 사건들을 말함으로써 기독교 메시지를 충분히 전파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복음서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 같이 역사적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들이 정말로 역사로서 쓰여진 것이라면, 그것을 역사로서, 그리고 그 나름의 역사적 배경 안에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우리는 역사적 연구가 결코 신앙을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오직 믿음으로써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단지 복음서 배후에 있는 예수님 이상의 것을 발견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복음서에 나온 예수님을 직접 대면해야만 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그들은 복음서를 썼다. 온갖 종류의 자료들에 의지해서 그들은 "예수님은 누구셨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를 썼다. 그들의 이야기를 구성함에 잇어, 그들은 사건과 그 의미를 동시에 분리 할 수 없게 말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미술가이며, 또 해석가로서 인식되어져 왔었다. 그러나 지난 25년간 그들은 점차 신학자로 여겨지고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일반적 관점을 갖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이신, 곧 역사적 인간이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님으로 계속 살아계시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글을 쓴다. 그들은 예순미의 생애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조명을 시도하며 그들의 신앙의 입장에서 글을 쓴다. 또한 그들은 특정한 사람을 염두해두고 특정한 역사적 상황 내에서 쓴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그들을 신학자로 여기는 것은 타당하다. 우리는 같은 사건을 이야기할 때에도 여러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얼마나 다른 관점이 통합될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특별히 네 번째 복음서를 언급하면서 복음서들의 신학적 특성들을 보다 광대한 규모로 설명하고자 한다. 마태복음, 아마도 마태복음의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라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강조는 그 복음서가 유대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 주는데, 이런 강조는 또한 그 복음서가 구약을 사용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마가복음, 이 기자는 예수님의 사역을, 모든 사건 진행이 메시야의 십자가 처형으로 사정없이 질주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기독론 뿐만아니라 제자도에도 관심을 가지고 었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누가의 목적에 대한 어떠한 진술도 사도행전에 대한 논의를 배제해서는 안된다. 이것들 전체에 흐르는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에 집중되어 있다. 지금까지와 같이 복음서와 사도행전 저자들 역시 신학자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작업으로 인해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훨씬 더 풍부해진다.

-제Ⅲ부- 복음서의 메시지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독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문학 형태의 하나인 설화를 사용했다. 먼저 설화로서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대해 논해 보자.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읽는 현대의 독자들이 첫 번째로 파악해야 하는 점은 복음서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사건들을 설명하는 관점과 관계된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이 그의 사역과 말을 통해 성경에 미리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믿었다. 그들의 메시지를 충분히 감지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고 그들의 관점, 곧 하나님이 여기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그들의 믿음을 받아 들여야 한다. 둘째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해석함에 있어, 그것을 설화 그 자체로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접근법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이야기의 전반적인 모든 구조와 진전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그 이야기의 흐름을 하나의 이야기로서 인식하면서 그 설화의 움직임에 대해 어떤 느낌을 얻게 된다. 우리는 저자 자신이 그 이야기에 부과한 구조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저자 자신이 독자들을 가까이 끌어들이고 자신의 요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사용한 장치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복음서에 나오는 설화들을 해석하기 위한 다섯가지 원리들을 논의해 보자.

첫째, 우리는 모든 이야기들이 본래 선택적이고 불완전하다는 점을 다시 상기해야만 한다. 둘째,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었다. 셋째, 이야기들을 모든 세부 사항과 인물들 안에 내밀한 의미들이 있는 풍유로 여겨서는 안된다. 넷째, 설화들은 종종 간접적으로 또는 예증을 통해 우리를 가르친다. 다섯째, 우리는 설화가 신학적, 역사적 관심사를 전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일 뿐 임을 인식하는 한편, 또한 설화라는 장르의 중요한 한계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많은 것이 이 이야기들 속에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야기들을 주의 깊게 읽음으로써 그 이야기들이 스스로 드라마를 펼치고, 우리에게 그 이야기 자체가 가지는 메시지를 마주 대하게 하도록 할 수 있다.

이번에는 복음서 저자들이 채택한 몇 가지 주된 문학 형태들을 하나하나 알아보겠다. 우선 마태와 누가는 모두 자신들의 복음서에 족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신학적 기능을 수행한다. 이 족보에는 특별한 변칙들이 있다. 첫째, 마태는 단순히 예수님의 가족에 대해 기록하기보다는 맨 처음부터 예수님과 두드러진 인물들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즉, 그는 예수님의 탄생을 과거와 미래의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직접적으로 관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조상 목록에 여자가 끼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수치스러운 평판을 갖고 있는 여자들을 이 족보에 포함시킴으로서 마태 자신이 예수님의 조상에 대한 엄격한 연대기를 기록하려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보여 준다.

셋째, 마태는 가계에서 몇 가지를 생략했다. 그것은 마태의 목적이 나사렛 예수의 왕적 메시야적 조상을 나타내 보이는 데 있기 때문이다. 넷째, 우리는 마태의 놀라운 계산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종종 숫자와 유형들의 상징적 사용에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보듯이 마태의 족보는 신학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두 번째로, 복음서는 묵시적 문학을 사용한다. 이 묵시적 강해는 생생한 묘사와 신앙의 상상력을 고취시키는 데 더 관심이 있고, 세세한 사건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는 관심이 별로 없다. 즉, 그것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늘 깨어 있어야만 하는 현대시대의 물질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가리키는 상징들이다. 세 번째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고별강해가 실려져 있다. 이것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첫째, 우리는 이 말씀들이 기록된 배경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이 강해의 목적을 고려해야 한다. 세번째로, 예수님의 말씀이다. 하나는 전후문맥 속에서의 말씀이다. 예수님이 어떤 형태로 말씀하셨든 간에 그의 말씀은 전후 맥락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특징적인 말씀들이다. 예수님은 그 색다른 특성 때문에 특별한 주의를 요구하는 세가지 특별한 표현을 사용하신다. 첫째는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의 권위에 근거한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람어로 아바라 부르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뜻한다.

셋째로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 즐겨 사용한 표현은 "인자"라고 하는, 문제의 소지가 많은 말이다. 그는 이것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었고,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시행하면서 그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권능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이다. 다섯 번째로, 사도행전에 나온 연설들이다. 지금까지 족보, 묵시, 고별 강해, 예수님 말씀, 사도행전의 연설-이 모든 형태들은 복음서 저자들이 사용한 갖가지 장르들 가운데 중요한 예다. 이 각각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전반적인 설화를 구성해 왔다. 그것들은 신학적, 복음 전도적, 변증적 이유로해서 사용되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방법을 연구해 보기로 하자. 이런 인식은 예수님의 메시지가 우리를 위해 그렇게 잘 보존되어 왔는지를 이해하는 데, 또한 동시에 왜 예수님의 가르침이 수천 년이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의 신비처럼 남아 있는지 설명하는 것을 돕는데 힘이 된다. 여기서는 복음서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데 사용하신 특히 중요한 두 세 가지 방법들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 보겠다. 첫째로 비유적 언어이다. 그는 청중들이 그의 말씀을 마음에 그려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온갖 종류의 비유적 언어를 사용하신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청중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사용하는 또다른 수단은 과장이다. 이것은 그의 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셋째로, 풍자이다. 앞의 세가지 의사 전달 형태들은 해석적 과정에서 중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서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인 동시에 이 말씀들 자체도 여러 형태 또는 방법들을 사용한다. 그는 말과 행동을 통해 자신이 육화시킨 복음을 전달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비유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비유라는 말은 "비교"를 뜻하는 말로 이것은 우리가 비유의 일반적 특성을 이해하는 길을 제시해 준다. 이 비유는 여러 모습을 갖고 나타난다. 즉, 직유형 이야기로서 이야기 비유로 나타난다. 또한 어떤 비유들은 풍유적 특성을 갖고 있다. 이 비유들은 우리의 등을 토닥이며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호되게 꾸짖기 위한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를 위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도전하고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비유들은 현상유지에 반대해서 큰 소리로 말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세상과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이해하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비유들은 우리의 선입견을 일소해 버리는 것이다. 그럼 비유들은 그 비유의 목적을 어떻게 달성하는가? 비유의 요점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반응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즉, 비유는 비교에 의해 도전적인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비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실마리는 문화적 배경에서 찾는 것이고, 또한 그런 가운데 갖는 기능이다.

복음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것은 복음의 메시지의 경계를 설정하고 그 유형을 제공한다. 이 "하나님 나라"는 "하늘 나라"와 같은 실체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에게 있어 하나님 나라가 갖는 특별한 의미는 우선 그의 가르침에서 그 표현이 자주 나온다는 점에서 강조되고 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묘사함에 있어 우리는 현재의 나라와 미래의 나라 간에 선택을 할 필요가 없다. 현재와 미래 두 시대가 다 포함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에 꼭 필요한 긴장을 계속 유지 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 자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인자로서의 그의 활동을 통해 현존하고 또 완성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예수님에 대한 메시지이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복음서의 심장부에서 울리는 박동 소리다.
-평가-

이 책을 요약한 후 복음서에 대한 나의 이해의 틀이 어느정도 잡힌 것 같다. 복음서란 말로 전해지던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 책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즉, 복음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복음서 기자들의 입장과 환경으로 돌아가서 그 시대의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복음서 기자들이 처해 있던 시대적 상황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처음에도 말했듯이 복음서란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간증한 책으로 역사적인 목적을 가지고 역사적 사실들을 정확히 기록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 기록한 신앙적인 목적의 일종의 설교문서이기에 복음서 기자들의 배경을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복음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교자 자신이 그들(복음서 기자들)이 되어서 그들이 지니고 있던 신앙관, 간증 등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복음서 기자들은 독자들의 신앙을 불러 일으킬 목적으로 그리고 독자들을 기독교 신앙을 통해 좀더 풍성한 삶에로 이끌기 위한 목적으로 펜을 잡은 사람들이지 예수의 교훈과 활동에 대한 정확한 역사 기록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복음서를 쓴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복음서가 역사적 사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거나, 혹은 복음서가 순수한 창작이라는 말은 아니다. 복음서에는 믿을 만한 자료와 기록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역사적 자료들이 복음서에서 역사적인 목적을 위해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들의 신앙을 불러 일으키고 더욱 견고케 하려는 신앙적, 설교적 목적을 위해서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역사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예수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이용한 복음서 기자의 설교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렇게 복음서가 역사 기록이 아니라, 설교이기 때문에 복음서를 이해할 때는 예수님이 살아 계실때의 역사적인 상황보다는 오히려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의 상황, 곧 복음서를 받아 읽게 될 독자들의 역사적 상황을 머리 속에 기억하며 이해하여야 한다. 복음서는 그 복음서가 기록되던 그 당시의 사람들을 향한 설교이기 때문이다. 물론, 복음서의 말씀들이 문맥이나 그 본래의 역사적 상황과 아무런 관련 없이도 우리들에게 감동과 은혜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 그 말씀은 다른 종교적 영웅이나 성현의 전기와 크게 다를 것이 없게 된다.

복음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있는 말씀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얻게 된 사람들의 피와 살을 통해 나오는 능력있는 설교 혹은 신앙 간증이 될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런 증언과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며 그런 의미에서 복음서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복음서는 역사기록이나, 전기로 읽힐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서 기자의 간증 혹은 그들의 설교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바로 복음서가 그러한 책이기 때문이다.

(나오는 말)

이제 성경은 크리스챤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너무 난해하고 생소한 문학의 장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삶의 지침이 되기도 하지만, 잘못 이해한다면 큰 문제와 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복음서.. 이제는 위에서 알아 본 바와 같이 체계적으로 알아야 하고 좀더 적극적인 이해가 필요할때다. 그리고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성도 필요하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이것이 이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챤에게 가장 필요하고 힘이 되어 주는 요소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천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