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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의 역사

지식창고지기 2012. 1. 28. 20:25

기독교 교회
1. 기독교 탄생과 전파
. 기독교의 탄생을 목격한 로마 제국은 도시 문명이었음.
. 4세기와 5세기의 교회의 승리 후에도 로마 제국의 기독교는 도시적인 현상으로 남아있었음
(농부들을 뜻하는 paganus가 불신자와 동의어로 사용되기까지 함)
→ 시골지역은 로마 신들을 섬기는 최후의 보수적인 보루로 남아있었음.
. 기독교는 제국의 주요 상업적 군사적 대동맥을 따라 퍼져 나갔음
. 2세기간 누렸던 평화, 훌륭한 도로, 세계적 언어가 된 희랍어 등 전도를 위해 알맞은 때
2. 특징
. 기독교 교회가 숫자적으로 또 범위에 있어서 크게 증가하고 있었음(교회의 규모가 컸던 것은 아니라 단지 교회들의 숫자가 많았을 뿐. 아직도 가정 교회가 규범적인 것)
→ 디오클레시안(Diocletian, 285-305) 황제 당시에는 기독교의 발전이 지배 엘리트 계급에게 경각심을 주 는 데까지 이르러 대 박해의 원인이 되기도 함.
.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상위층 방향으로 이동, 사회적 지위를 유산으로 얻기보다는 스스로 획득, 사회적 성공의 기회를 추구
. 기독교가 프롤레타리아나 하류 계급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 기독교 교회들은 사회의 양 극단에 속한 사람들, 즉 극빈자와 최상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포함
. 초기 기독교 교회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이 있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인정
.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상위층 쪽으로 움직이고 있던 중류계급의 기능공들, 사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그리고 "전문 직업인들"을 끌어 들였다고 결론 지을 수 있음
. 이론상으로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개인은 다 가치 있는 존재임을 가르침.
→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노예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갭을 말해줌.

. 웨인 믹스(Wayne Meeks)
- 바울 시대 교회들은 도시 사회의 한 대표적인 면모
. 로버트 그랜트(Robert Grant)
- 초대 교회를 원래 대부분 중류 계급으로 구성된 다소 긴밀히 연합된 그룹들의 작은 집단
. 프렌드(Frend)
- 기독교 교회의 사회적 수준에 대해 확실한 개괄적인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렵다.
3. 기독교 박해의 끝과 발전과 내적 분열과 싸움
1) 박해의 끝
. 밀란칙령(313)으로 초대교회의 순교와 박해 시대는 끝남
- 모든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어떤 형태의 예배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관용정책 선포
- 동방 : 콘스탄틴이 리키니우스(Licinius)를 패퇴시킴으로 10년쯤 뒤에 같은 관용정책이 적용
(보수적인 귀족과 원로원 계급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새 신앙에 적대적, 콘스탄틴이 개종해서야 이 그룹도 결국 정복)
→ 데오도시우스(Theodosius)는 도시들 가운데서 로마 종교 의식을 금지
. 박해가 없어지고 황제의 호의에 힘입게 되자 4세기 교회는 교인수에 있어서 극적인 증가
- 감독수의 증가 : 325년 니케아에서 열렸던 첫 에큐메니칼 회의 때 약 250명의 감독들이 모임, 제4차 칼케돈 회의(451)에는 630명의 감독이 참석
- 교회당 건물의 크기와 숫자가 늘어나는 교인들을 감당하기 위해 증가
2) 내적 분열과 싸움
. 내적으로는 여러가지 논쟁으로 찢기게 됨(도나투스 논쟁과 아리안 논쟁)
. 명목상으로만 신앙을 가진 사람들, 다양한 사회계급의 사람들, 교회의 승리 이전과 이후의 기독교의 성장 은 교회 내 갈등의 기회, 목사들과 회중의 시간과 정력을 소모
. 박해가 내적인 싸움을 일으켰다면 외적인 압박으로부터의 자유는 기독교 공동체들 내에 훨씬 큰 싸움을 가져왔다.
. 소동의 뿌리는 치리, 재산권, 성직자 이동, 발전하는 계급 제도, 그리고 개종자들의 증가 등을 둘러싼 논쟁
. 니케아 회의 이후 아리안 논쟁으로 야기된 소동은 다시 반세기나 지속, 그 논쟁이 교회들을 분리시켰고 또 기독교 공동체 내 폭력을 야기, 그것은 목회자적 지도력에 대한 도전

초기 기독교인들 가운데 갈등에 대한 또 다른 증언은 배교자 줄리안(361-63)의 실패한 정책에서 볼 수 있음, 30세에 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기독교에 대해 증오감을 갖고 기독교를 박멸하기로 결심 - 모든 추방자들(성직자들)이 돌아오면 현직에 있는 사람들과 추방에서 돌아온 사람들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고 그것이 교회를 약화시키리라고 믿음

고린도 교회의 긴장
.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긴장
. 고린도 교회에는 또 다른 분열 : 시릴 리차드슨(Cyril Richardson)은 그것이 카리스마적 성격의 직무와 정규적 직무 사이의 불화였다고 제시
→ 클레멘트 : 성직자의 직무의 유효성을 옹호, 성직자의 사도 계승을 주장하는 첫 사람이 됨.
2세기에 교회 내 그리고 교회들간의 불화
. 2세기에 등장한 영지주의는 철학의 역할에 대한 평가에 새로운 도전을 줌
터툴리안 : 철학을 모든 이단의 어머니라고 부름
클레멘트 : 기독교 영지주의와 신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철학의 사용을 옹호
. 희랍적으로 교육받은 기독교인들과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상류 계급과 하류 계급, 뿐만 아니라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2세기 로마는 내부적으로 교회 지도자들 : 사람들을 섬기기보다는 스스로를 섬김
. 교회의 승리 전에 기독교 교회 내 갈등의 원인이 된 것은 박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 고백자들과 감독과의 긴장은 카리스마적 직무와 제도적 직무 사이에 있었던 이전의 긴장의 연속이었 고, 그 긴장은 4세기 수도사와 성직 관료들 사이의 싸움으로 계속 이어짐
☞ 서로 다투는 공동체들 가운데는 소송 체계가 발전, 교회법정이 출현 : 법정의 재판관은 감독
소송 절차가 더욱 성장하면서 교회법이 발전 : 그라티안(Gratian)에 의해 법전화되고 얼마간 일관성 갖음
3) 긍정적인 측면
. 처음 3세기 동안 교회의 환경은 박해였고, 그 다음 제국 교회 시대가 뒤따르는데 그 시대는 온갖 약속과 실패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기독교 메시지는 로마 종교들이 만족시켜 주지 못했던 것에 대해 답변을 주 었다. 기독교인들의 친절과 자선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데 큰 몫, 사회신분에 관계없 이 모든 개인이 다 가치가 있다고 하는 사상은 이 이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임
4. 목회자적 과제
. 교인 숫자의 증가는 목회자적 돌봄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
- 서로 싸우는 당파들을 화해시키는 목회자적 과제는 성직자들 내의 당파들로 인해 더욱 어렵게 되었다.
- 목회자적 과제는 주로 서로 나누어진 진영들을 화해시키는 것이었고, 또 개종자들을 받아 들이고 교회를 양육하고 교화하는 일이었다.
- 초기 교회의 목회 지도자들은 성장과 개종자들을 받아들이는 일, 여러 다양한 사회적 계층들을 통합하는 일, 그리고 갈등을 취급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
5. 혼합주의와 미신의 위험
.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수많은 이교 개종자들이 들어오게 됨에 따라 교회 안에 옛 로마 종교들의 사상들 과 관습들이 점차 많이 들어오게 됨.
. 때때로 이교와 기독교 사이에 명백한 선을 긋는 것이 어려움.
. 깊이 뿌리박은 미신
- 말의 내재적 능력, 특별히 예수의 이름이 갖는 능력
- 성만찬 예식 : 예수의 말씀은 떡과 포도주를 변화시키는 효과를 가진 것으로 이해
- 효험이 있다고 생각된 또 다른 제스처는 십자가 성호를 긋는 것
. 아를즈 회의(Council of Arles)는 삼위일체적 상용구 사용을 유효성을 판가름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규정.
. 이교 종교의 관행들이 예배에 침투 - 목사들과 회중들의 경건에 모두 영향을 미침
→ 이 맥락에서 안수식의 의미가 발전, 손은 얹음으로 안수 받은 자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호를 남긴다는 사상이 발전
. 교회는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는 다른 이교의 영향들을 끈질기게 반대
☞ 자신들이 평생 지켜왔던 옛 종교관습과 습관, 이교 의식들을 기독교적 의식들과 축제로 대체하는 것과 이전의 우상 숭배와 관련된 과도한 부분들을 잊게 하는 것이 그의 회중과 함께 살았던 목사의 과제

예 배
초대교회에서 목사의 삶은 존재와 그 존재 이유를 기독교 공동체에서 끌어왔다. 공동체는 우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예배하기 위해 모였다.
1. 예배모임의 유형
1) 가정 교회
. 예배 모임에 대한 신약성서의 전형적인 모습은 가정 교회
. 가정 교회는 나름대로의 상징들과 신념들을 지닌 하나의 명백한 사회적 공동체
2) 자발적이고 사적인 연합체
. 초기 로마 제국에는 어떤 특별한 관심사를 중심으로 모였던 자발적이고 사적인 연합체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배타성과 비밀스러운 의식들 때문에 사회 안녕에 위험할 수 있다는 의심도 쉽게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3) 유대인 회당
. 기독교 교회들이 따를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델이었다. ecclesia라는 용어는 70인역에서 나온 것이 다. 초기 교회의 예배도 회당의 패턴에서 나왔다. 기독교 자체가 유대교로부터 발전된 것이었다.
.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용어와 그들의 기능은 회당의 것과 달랐으며, 기독교 내 여자의 역할은 훨씬 큰 자유와 책임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교회 교인의 자격은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데 달려 있었다. 유대인들뿐 아니라 희랍인들도 환영.
4) 철학 학파의 모델
. 초기 기독교 교회와 비교되어 왔던 네 번째 모델은 철학 학파의 모델. 전체 회중보다는 지도자들과 그들의 연합체에 더 적용
☞ 이 네 모델 모두 초기 기독교 교회에 대한 유비들을 제공
그러나 기독교 교회는 그 자체로 유일한, 새로 창조된 것이었으며 그것은 처음 3세기 동안의 과정을 거쳐 국가 내의 한 "국가"로 발전
2. 예배
1) 예배
. 이 새로 창조된 것 안에서 목사와 회중은 예배하기 위해 모였던 것. 초기 기독교인들은 세 가지 서로 다른 유형의 모임 - 기도를 위해, 성만찬을 위해, 그리고 사업을 위해서
. 그들은 말씀의 예배를 위해 모였던 유대인들의 전례를 따름
- 이 예배는 매 주일 모였고 그리고 성만찬이 뒤따랐음.
- 기독교인들은 식탁 기도(다니엘의 예를 따라서 하루에 세번)
. 한 밤중에 기도하도록 제안, 신랑의 도착을 알리는 외침이 들려 왔기 때문, 하루에 일곱 번 드리는 기도 관습(시119:164), Terce, Sext, None은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음
. 성만찬은 매 주일마다 기도의 예배 혹은 말씀의 예배 뒤에 거행
- 모든 교인 중보기도에 참여, 반면 목사(감독 혹은 장로)만이 성만찬을 집례하는 책임을 갖음
. 예배는 능력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치는 헌물을 받는 것으로 끝맺음
- 구호물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을 감독하는 것이 목사의 책임의 일부
. 히폴리투스때 회중은 기도와 응답, 평화의 입맞춤, 헌물, 수찬(성만찬을 받음)등에 능동적으로 참여했고 식탁과 감독 주위에 가깝게 모여서 예배를 드렸음
. 각 교회는 자치적인 단체였음 - 이 때문에 공동의 결정에 이르는 어떤 방법을 만들어야 했음
→ 신약성서시대 교회에서 이러한 결정은 하나의 실무 회의(business meeting)에서 이루어짐
→ 남녀를 불문하고 다 출석하고 토론하고 투표할 권리를 가짐
. 목사와 회중의 예배 생활은 공적인 예배와 개인적인 매일의 기도 외에도 여러 경건한 예배들을 포함
2) 세례
. 초대 교회에서 세례는 대체적으로 부활절 전 밤에 행해졌음
- 교리교육 기간은 기독교적 덕목들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
목사가 사람들과 접촉하여 상담할 수 있는 중요한 장
. 3세기 세례 의식은 극적인 상징주의로 가득 차 있었음
. 세례받은 사람들은 나머지 교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교회 안으로 들어가 새벽에 부활절 성만찬 예식을 시작
3) 순교자의 기념
. 순교자들은 교회가 생겨난 거의 처음부터 특별한 존경을 받음
. 기념은 항상 순교자 무덤에서 성만찬을 갖는 것
. 박해가 끝났을 때 정교한 묘비가 그 자리에 세워지거나 혹은 교회당이 세워지기도 하였음
. 순교자 기념일들은 교회력에서 성자의 날로 고정
. 유물을 공경하는 것은 순교자들과 관련된 또 다른 하나의 관행
. 박해가 끝난 후 순례가 유행
- 순례는 순교자의 유물을 모신 성당이나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장소를 찾는 것
- 도덕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 여행길에 오히려 죄를 짓는 경우 생김
- 빚을 지고 도망하는 사람, 가정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남편들을 위한 종교적 구실
- 중세기에 순례는 일종의 고해의 형태로 수행될 수 있었다.
4) 교회력
. 교회생활은 교회력에 의해 규정
.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축제일은 부활절
(교회력은 부활절 날짜를 중심으로 해서 다른 날짜들을 계산)
. 둘째로 중요한 축제는 오순절 - 교회의 탄생일
. 성탄절을 처음 지킨 때는 366년경 로마에서
- 그리스도의 참 인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를 배격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생김
. 처음부터 기독교 설교가들은 축제에 남아 있었던 이교적 특성들을 배격
5) 예배장소
. 초기 기독교인들은 처음 2세기 동안 그들은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 3세기에 교회의 수가 늘게 되자 교회는 재산을 소유하기 시작
- 교회는 지하묘를 소유, 그 세기 말경에는 큰 도시들 가운데 교회당 건물이 건축
. 4세기는 기독교 예배와 예배 처소에 대해 극적인 변화
- 기독교 예배는 공동체적이었고 많은 수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함
. 콘스탄틴 - 로마에 7개의 교회를 지음
- 로마의 강한 이교적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새로운 기독교 도시를 짓고 네아폴리스 (Neapolis)라 부름, 후에 그 도시는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림
6) 예배의식
. 큰 교회당이 서고 또 교회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예배의 형태도 가정 교회의 친밀성으로부터 바실리카에 어울리는 장중한 예식으로 변함
. 예배의식 자체는 순서들이 추가됨으로 더욱 더 정교하게 됨
. 공공예배는 감각에 호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 마음을 교화시키는 것도 강조
7) 기독교 음악
. 초기 기독교의 음악에 대한 태도는 처음에는 모호
. 로마 감독들은 400년부터 단선률 찬송(chant)의 발전에 종사, 예배의식적 찬송이 결정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은 그레고리 1세(c. 540-604) - 그레고리안 찬트
☞ 목회자의 지도력은 우선 교회의 예배 생활로부터 발전하게 되었다. 목자와 안내자로서의 목사의 역할이 나타난 것은 주로 성만찬 집례자로서, 그리고 설교가로서의 책임 때문, 가정 교회에서 바실리카로 발전은 성직자들의 수도 증가
교회의 성결과 윤리
. 처음부터 교회는 자신을 사회로부터 분리된 공동체로 여겼다.
. 신약성서는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새 계명외에 다른 어떤 특정 행동 규정을 제공하지 않는다.
. 십계명은 일반적인 지침이 되고 그리스도의 예와 산상 수훈이 주요 규범
. 초기 기독교 문서들은 전반적으로 이교 세상의 도덕과 비교되는 기독교의 도덕을 반복해 묘사
. 새 도덕은 삶의 모든 측면을 포괄
- 로마의 오락, 특별히 경기장과 검투 경기, 서커스, 극장은 피해야 했다.
. 가정 오락도 마찬가지로 통제를 받았다.
- 터툴리안은 청교도적인 엄격성에 있어서 극단적인 사람
[여성의 복장에 관하여](On the Apparel of Women)
[우상에 관하여](On Idolatry)
- 모든 도덕가들의 터툴리안처럼 엄격한 것은 아니었다.
. 거룩함은 직업과도 관련. 많은 직업들이 기독교도들에게는 금지
. 몇몇 교회 회의의 결정들 가운데서 거룩함을 법제화하는 초기 발전을 발견
- 앙카라 회의(314), 강그라 회의(The Council of Gangra, c. 345)
. 기독교인의 생활을 규정하려는 초기의 시도들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끄는 영역은 성 윤리 부분
- 초기의 교회 회의들은 다른 것보다도 이 문제에 관해 더 많은 법령들을 포함
-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성적인 절제와 모든 재산의 포기는 참으로 영적인 사람을 만드는 것
-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렇게 정결을 추구하였던 이러한 사회적 환경 가운데서 초기 기독교 성직자들은 그들의 과제를 수행
- 로마 사회의 악명 높은 퇴폐성 때문에 가정의 안정과 도덕성은 크게 위협받고 있었음
→ 로마의 가정의 가치는 심각할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는 강한 증거
. 결혼문제
- 터툴리안과 어거스틴 모두 결혼 예식은 성만찬 예배와 함께 드려졌음을 시사
- 교회는 이방인과의 혼합결혼 문제에 직면, 교회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합치는 것을 반대
- 결혼에 대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독신보다는 열등한 것으로 간주
. 3세기 중반과 시프리안 때부터 교회는 파문에 관한 새로운 고해의 체계를 발전
. 모든 범죄에 대해 규정 어려움 - 목사의 판단의 재량권에 맡김
- 2세기 때부터, 세례를 받은 후 저지르는 가장 심각한 도덕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공적으로 죄의 고백을 요구하고 일정 기간 동안 성만찬을 금하는 것이 교회의 관습
- 성례전으로서의 사적인 고백에 대한 최초의 증거는 589년 톨레도 회의
- 고해의 신학 근저에 놓여 있는 이론적 해석의 일부는 죄를 인격보다는 행동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 하는 죄의 신학
- 6세기가 되어서야 사적인 고백과 사면의 보다 복음적인 관행이 유행을 얻게 되었다.
.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는 기대감의 맥락 가운데서 목회자적 돌봄의 영역은 무한
- 목회자적 실행에 있어서 통일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교회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들은 목사의 역할과 성직자의 정체에 대해 직접적인 연관성 갖는다.
- 목사는 그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 판사와 징계관으로서의 역할이 강조
. 교회 회의들은 로마의 정치적인 절차를 따랐다.
. 교회를 새 이스라엘로 보는 구약성서 심상의 사용은 직접적으로 새 사제직, 희생 제사로서의 성만찬, 성직 계급주의로 이어진다.

친절과 자선
. 자선행위는 기독교 교회를 처음부터 구별하는 특징(교회의 적들도 인정)
. 구호물 분배의 궁극적인 책임은 목사나 감독에게 있었음
- 실제적 일은 집사들에게 위임 → 집사라는 직무 탄생
. 자선 사업은 목사와 회중의 삶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요소를 구성
- 궁핍한 자들을 돌보는 일은 성직자들의 삶의 정규적인 책임
. 기독교인들은 그들 가운데서만 자선을 행한 것이 아니라 믿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선을 베풀었다.
. 필요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성만찬과 관련
- 봉헌 시간에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물들, 초기에 그것은 돈보다는 물건
. 밀란 칙령 이후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거기에 상응하여 궁핍한 사람들의 수도 증가
- 고아들과 병든 자, 여행자들을 돕기 위한 자선 기구들이 발전
. 저스티니안 법전은 잘 발전된 교회 자선 조직의 상황을 반영
- 숙박소, 병원, 구빈원, 고아원, 양로원이 감독이 다스리는 소유지에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
-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을 제공하는 관행이 발전(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신뢰로 영접)
- 감독과 다른 성직자들이 관장하는 활동의 영역이 계속해서 확대
. 대 그레고리 때(600) 교회 수입의 25%는 자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법령이 발표
. 4, 5세기에 구제하는 일은 예배로부터 분리된 의무가 되었고 단지 성가신 일이 되었다.
. 초대교회-기독교인들은 친절과 궁핍한 자를 돌보는 일을 상당히 중요시
- 감독의 직무는 이 일을 돌보는 것이었고 감독의 권위는 부분적으로 자선에 쓸 기금을 모금하고 분배 하는 일에 근거
. 제국교회 - 교회가 점차 국가와 경계를 같이 할 정도로 커 가면서 제도화됨

목회자의 삶
. 목사는 기독교인의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목사는 가장 높은 차원의 성결을 지녀야 한다.
[사도들의 가르침](Didascalia Apostolorum) - 상당한 분량을 목회자의 삶에 대해 할애
. 사제로 선택된 것은 그가 전체 사람들 가운데 더욱 뛰어난 사람이고 더욱 학식이 있고 더욱 거룩하며 모든 덕에 있어서 더욱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임
- 그러한 이상이 목회자들 가운데 일치되게 유지될 수는 없었다.
- 어떤 목사들은 그들의 소명이 요구하는 것에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 아무리 사려가 깊고 거룩한 목사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리는 일을 피할 수 없다.
- 교회는 목사의 인격적 자격에 대한 이상들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실현되지는 못했다.
. 목회자의 소명은 존재론적인 차원을 포함하였다. 즉, 그는 무엇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을 뿐 아니라 무엇이 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 목사의 첫 번째 되고 우선적인 과제는 단순히 믿음의 공동체 가운데 사는 것이었다.
. 목사의 일차적 과제는 영적인 훈련
. 교회의 승리 후에는 교회 재산을 관리하는 일이 목회자의 주요 과제
. 판사의 일이 목회자의 주요 과제
- 중재는 3세기까지 성직자들의 주요 업무가 되어 있었다.
- 교회 법원의 주요 관심사는 "정의"보다는 화해였다.
- 감독의 판사로서의 역할과 관련된 것이 교회를 도망자의 피난처로 삼는 것이었다. 즉 도피처 (asylum) 권리였다. 도피처 자체는 이교로부터 온 유산.
. 콘스탄틴 이후 감독들은 대체적으로 일반 대중의 존경의 상징이었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분"과 같은 칭호로 불려졌으며, 그가 방에 들어설 때는 모두 일어서서 영접하였다.
. 초기 기독교인들은 절제의 은사를 결혼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독신을 높이 평가
→ 목사의 삶에 영향을 미침. 그래서 성직자의 독신 문제는 초기 교회에서 종종 토론
- 초기 시대에 결혼을 기피하게 만든 한 요소는 그리스도가 곧 재림하리라는 신앙이었다.
- 구약성서의 모델과 전례들의 사용이 목회자 직분의 발전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
- 엘비라 회의(306) : 성직자에게 아내와 거리를 갖고 또 자녀도 갖지 말라고 요구
- 성직자의 독신은 5세기까지 지배적인 이상. 그러나 이 관습은 보편적으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셀류시아(Seleucia)회의(486)는 성직자의 독신 정책을 재 도입하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
강그라 회의(c. 345)가 금욕주의가 유행하는 것에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는 것을 언급.
이러한 목소리들에도 불구하고 독신은 서방 교회에서 성직자들을 위한 이상이 되었다.
6세기 경, 결혼한 사제들이 안수 받는 날, 예배 의식 가운데 그들의 아내를 위한 특별한 축복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금욕주의는 4세기 동안 수도원 운동이 나타남으로 절정에 달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제도적인 교회에 대한 반응이었다.
- 수도원 운동은 평신도 운동
- 제국교회 내에서 높은 신분을 갖게 된 성직자에 대한 반대 운동
- 4세기와 5세기 동안에 거의 모든 유명한 감독.신학자들은 수도사들이었거나 수도원 생활에 강한 매력을 가진 사람들 → 이 경향은 독신 사제의 이상을 강화하였고 수도사들과 사제들을 영적인 엘리트로 만들었다.
목사의 삶은 거룩함을 요구하는 것이고 예배, 중재, 궁핍한 자들을 돌보는 일, 교회 재산을 관리하는 의무로 이루어졌다. 이들 과제 외에 그는 설교와 교훈을 통해 양 떼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또한 병든 자를 방문하고 유족들을 위로하고 죄인들을 권고하고 마음이 괴로운 사람들을 상담하는 일 등을 통해 영혼을 돌보는 일에 종사하였다.



제3장
목사와 선포

목사의 가르침과 설교는 교회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
그러한 선포는 비기독교인들을 향한 전도와,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신앙을 옹호하는 일, 이단의 위협에 대해 정통적 사도성을 보존하는 일을 포함
그러나 일차적인 목회의 초점은 신자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설교하는 일

가르침의 목회
말씀과 가르침
예수는 말씀과 행동을 통해 그의 제자들에게 이중적인 명령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목사의 삶은 그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강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
개종자들은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 외에 기독교 가르침의 기본 원리들을 배워야 했고 이 목적을 위해 교사의 직분은 처음 2세기 동안 나타남
선정된 교사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200년까지 감독/목사가 그의 교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교사로 여겨졌다.
4세기에 많은 수의 개종자들이 교회에 들어옴에 따라 일년 내내 기독교적 가르침을 위해 학습을 제공하는 것이 목사의 책임
개종자를 가르치는 것 외에 니케아 이전 시대의 목사/감독은 매일 그의 보좌인들과 함께 모임을 가졌다.
기독교인의 삶의 양육과 기독교 신학의 해석을 목적으로 매일 신조와 교리에 대해 가르치는 책임을 가진 목사의 지침을 따라 그러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세례
세례교육 기간의 성격은 시기와 곳에 따라 달랐다.
제국교회 당시- 세례 후에 지은 죄를 상당히 엄격하게 취급하고 엄한 고해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세례를 늦게까지 연기하기도 하였다.
사도신조나 니케아 신조 혹은 그와 비슷한 신조들이 세례교육의 기본
초대교회 교육에서 신조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
신조 외에 세례교육은 구원의 역사에 대한 공부를 포함
주기도문에 대한 가르침도 역시 매일 이루어지는 세례교육 강의의 일부를 형성
세례 후보자들은 세례를 준비하고 세례를 받은 후 성만찬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례교육은 이들 성례전들에 대한 교육을 포함
초기 기독교 교사들은 예화를 즐겨 사용
초기의 세례교육의 내용은 고도로 교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목적은 덕이 높은 생활, 희생적인 생활을 위한 교육

기독교 설교
기독교 설교는 본문을 읽고 해석을 하는 유대교 회당 예배에서 직접적으로 발전된 것, 회당 자체는 바빌론 포로 시대로부터 발전된 것,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은 히브리 성서의 예언들이 이제 성취되었고 메시아가 오셨다는 메시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 회당의 배경을 사용, 바빌론 포로 훨씬 이전에 우리는 예언자들이 계시에 근거해, 혹은 더욱 빈번하게는 과거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기억을 근거해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게 강론
1. 설교의 특징
1) 예언적 설교
- 대체적으로 이스라엘이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행해짐, 백성들은 회개로, 주님께 돌아 오도록 요청을 받았다.
- 기독교 설교는 그러한 예언적 설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초기 기독교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히브리 전통의 예언자들의 연속성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고 예언자의 직분이 감독/목사의 직분과 병합되었을 때 예언적 권면의 전통은 설교에서 계속.
2) 예배 의식적 설교
- 유대교 설교는 회당에서 예배의 한 부분으로서 행해졌다. 설교는 그 제의에, 혹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 제사 패턴에 필수적인 요소
3) 주석적 설교
- 주석적이라는 점에서 유대교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 모든 기독교 설교의 출발점은 설교 전 읽은 본문들에 대한 주석이었다.
☞ 유대-기독교적 설교는 고대 종교들 역사 가운데는 유일한 특징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모이도록 종교적 건물을 갖게 된 것은 회당과 교회가 처음
2. 설교에 수사학의 사용
- 고전적인 수사학이 기독교 설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 기독교 장례 연설은 기독교 문학 형식 가운데서 가장 정교한 것 중 하나, 배후에 수 백 년의 전통을 가진 이교적 희랍적인 것을 기독교적인 용도로 채용한 한 시도를 대표
- 고전적인 수사학은 또한 스타일, 배열, 그리고 전달에 있어서 기독교 설교의 모델이 되었다.
- 4세기경 몇몇 기독교 설교가들은 설교전달이 대중적인 오락행사가 될 정도로 연설적 수사학 기술을 발전시킴
3. 설교의 문화적 차이
- 라틴 설교는 희랍설교보다 덜 화려하고 덜 장식적이며, 웅변적 기술을 발휘하는 것보다 설명을 더 중시
- 유대-기독교 설교는 고대 종교들 역사 가운데서 유일한 것이지만 기독교 설교의 스타일과 방법은 희랍 과 라틴의 웅변적 전통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4. 설교자의 자세와 성경을 보는 시각
- 성서를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외하는 태도는 기독교 설교의 근본
- 모든 설교는 설교가 예언적이다라는 것과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메시지 를 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
- 가장 초기의 기독교 설교는 나사렛 회당에서 행한 예수의 설교의 예를 따랐다. 히브리 성서의 예언들은 예수의 오심과 함께 성취된 것으로 믿어졌다.
- 고대 기독교 설교는 구약성서가 "기독교" 문서이며 오직 기독론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
5. 유형론과 알레고리
- 초기 기독교 설교는 유형론이라고 알려진 방법론을 따랐다. 즉 구약성서의 사건들과 사람들(원형들)은 신약에서 성취된, 혹은 현실화된 것들(유형들)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 유형론 외에 우리는 알레고리적인 주석과 설교를 보는 데 특별히 그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였다.
알레고리적 해석은 성서는 모든 말씀이 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는 가정에서 나온다. 알레고리는 문자적 해석을 희생시키고 본문을 단지 미리 갖고 있는 사상들을 지지하는 데 필요한 상징으로만 간주하 는 경향이 있다.
6. 설교자의 신학과 설교
초기 기독교 설교들의 목적은 앞서 본 대로, 경우에 따라 달랐다. 인간적 조건 혹은 불행에 대한 설교자의 신학,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가져오는 것인가에 대한 그의 신학이 모든 설교에 근본이 되는 것이었다.
- 서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보다 비관적이었다. 즉 그들은 인간 본성이 사람 들을 죄와 죄책감으로 인도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의 설교는 그리스도에 의해 제공되는 죄사함을 강조한다.
- 동방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조건을 도덕성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구원을 인간의 점진적인 신격화(theosis) 의 관점에서 정의하였다. 즉 구원이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다
세례교육 다음으로 설교는 교리 교육을 위해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고 뿐만 아니라 설교는 권고와 격려, 책망, 칭찬, 위로를 제공하는 수단

니케아 이전 교회의 설교
니케아(325) 이전 시대는 박해와 성장의 시기. 기독교 건물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으며 교회는 상대적으로 작고 가정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러한 친숙한 환경을 생각할 때 설교는 대화적이었고 훨씬 직접적으로 청중들의 삶에 관련되어 있었다. 환경이 변하면서 연설기술과 보다 세련된 웅변 기술을 강조, 목사에게만 설교가 허용
니케아 이전과 이후 모두 사람들은 설교를 포함한 전체 예배동안 서 있었다.
베드로와 바울이 죽은 후 다음 한 세기 동안(70-170) 우리는 설교의 예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아마도 친숙하고 대화적인 스타일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설교는 실제로 교회 회중 한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현존케 하는 것이다. 성서의 가르침을 기독교 삶에 적용하는 것을 알레고리의 수단을 통해서이다. 옛날 설교자들은 그들의 교인들을 꾸짖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처음 두 세기의 설교들은 우선적으로 믿음을 깨우고 새롭게 하고, 성서를 해석하고 박해 시에 인내할 것을 권고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하라고 촉구하는 것이었다.

4, 5세기의 설교
.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박해가 종식되자 수많은 개종자들이 교회를 찾았고 여기에 따라 더욱 넓은 교회당 건축이 필요 - 교회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더욱 정교한 예배의식이 발전, 설교는 점점 대화적인 것에서 연설적인 성격
. 성직자들은 사회문제에, 정치, 그리고 수많은 개종자 무리를 교육시키는 문제에 더 많이 관여케 됨
. 니케아 이후 시대 설교-신학적으로 큰 소요의 때, 기독론, 삼위일체, 그리고 구원의 의미에 대한 논란
. 설교들은 또한 "미숙한 예식들, 형이상학적으로 난해한 것들, 그들 종교의 미신들"을 다루어서 교인들로 하여금 이단과 분파에 반대하는 열정을 갖도록 하였다.
. 초대교회는 일차적으로 희랍어를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번창
. 암브로스는 4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인(설교 능력, 수사학에서 뛰어남)
- 황제가 교회의 권위와 그 밀란의 설교가의 능력을 존경
. 최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도시 중심지들에서 설교자들은 무시될 수 없는 중요한 사람들이 됨
. 4세기에 기독교 목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엄청났다고 하는 사실은 그 직분이 매력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 그 직분에 눈에 띠게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설교할 때
. 제롬-많은 성서 주석, 편지들, 성서의 라틴어 번역(Vulgate), 완강한 독신주의 옹호, 그리고 퉁명스러운 성격으로 잘 알려져 있는 사람
제롬의 설교- 모두 베들레헴에 있는 수도사들에게 행해진 것, 호소하는 대화적인 스타일이었을 것,
. 니케아 이후 시대의 라틴 설교들은 일반적으로 동방 교회의 설교들 보다 더 본문에 충실하고 또 덜 화려
. 4세기 희랍 설교를 살펴보는 일은 필연적으로 아타나시우스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 그가 쓴 모든 것의 핵심은 구원론. 특별히 아리우스파와의 논쟁에서 그의 초점은 구원론에 있었다.
.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 비길데 없는 웅변가, 고전적인 수사학 기술에 정통. 그레고리는 기독론과 삼위일 체와 같은 그 당시에 뜨겁게 논쟁되었던 문제들에 대해 신학적 연설
크리소스톰 다음으로 그레고리는 초대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웅변가
. 가이사랴의 바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와 가까운 친구
설교가로서보다 수도원 운동과 자선에 있어서의 그의 적극적인 역할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설교들은 성서의 문자적 의미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본문을 역사적이고 문자적인 이해를 근거로 해석.
알레고리를 피했을 뿐 아니라 그의 설교들은 수사학적은 장식이나, 웅변적인 색채가 없이 직선적이다.
. 니사의 그레고리-니사와 세바스테의 감독이었고 제국 궁정에서 대다난 존경을 받았다. 4세기의 기독론적 인 그리고 삼위일체론적인 논쟁들에 깊숙이 관여된다. 설교역사에서보다는 교리사에 있어서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비주의 역사에서 하나의 선구자

요한 크리소스톰
안디옥의 요한(d. 407)은 고대 설교가로서 그와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다.
크리소스톰은 절제와 자제를 특징으로 하는, 성서 본문을 강조하는 안디옥 주석의 개화기를 대표한다. "설교자는 가끔이라도 실패해서는 안된다-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들의 공통적인 경험이지만 그러나 목사에게는 이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크리소스톰의 설교의 많은 부분은 사회의 세상성과 그의 청중들의 죄를 향한 것
가난과 부라는 사회적 주제에 대해서 약 90편 혹은 100편의 설교가 있다.
크리소스톰은 특별히 귀족들을 향해 설교할 때 겁 없이, 아마도 요령 없이 말하였다.

어거스틴
히포의 어거스틴(d. 430)은 초기 라틴 교회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을 뿐 아니라 라틴 설교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사람
어거스틴은 세 가지 스타일의 설교가 있다고 말함-차분한 설교, 온건한 설교, 웅장한 설교
그는 목사의 삶의 방식은 그의 말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킴으로 설교에 대한 그의 책을 끝맺는다.
어거스틴은 근면하고 열정적인 설교가였다. 우리는 그의 것으로 여겨지는 설교 363편을 가지고 있고, 그 외에 설교라고 할 수 있는 많은 논문들이 있다.



제4장
영혼 돌봄

대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는 그의 [목회적 돌봄](Pastoral Care)에서 "영혼을 다스리는 것은 기술 중의 기술이다."라고 말했다.
개개인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육체적 복지를 친밀한 인격적 차원에서, 혹은 현대적인 어법으로 말하자면 일대일 관계에서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상담자로서의 목회자
○ 목사에게 요구되는 주요 자격들
- 특별히 회중의 모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거룩함이 중요하게 여겨졌었다.
- 편파성, 분노, 그리고 성급한 판단에 대한 주의
- 크리소스톰은 영혼의 돌봄과 의학적 돌봄을 비교-강제성을 사용해서는 개선되지 않기 때문에 상당한 요 령이 필요하다. "목자는 많은 지혜와 영혼의 상태를 모든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천 개의 눈을 필요로 한 다."
○ 목사직에 대한 비유적 설명
. 의사의 심상을 사용(질병의 다양성과 질병마다의 서로 다른 유형의 취급을 요구)
-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오리겐
. 목자와 양떼의 비유도 빈번히 사용
- 히폴리투스[사도들의 가르침](Didascalia Apostolorum, 250년 이전), 시프리안
. 의사와 목자 외에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다른 유비들은 부모와 자녀, 배의 선장과 승무원, 군사 지도자와 군인들, 체육 코치와 팀 등이다.
☞ 상담자로서의 목회자는 철저한 비밀성 전제 -제롬, 암브로스
. 상담에 있어서 이러한 목사 역할에 대한 이미지들은 家長적이고 혹은 더 나아가 권위주의적인 불균형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초기 기독교 문헌은 성직자들에게 그들의 책임을 오용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말로 가득 차 있다.
→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성직자의 직무는 커다란 책임의 자리이지 특권의 자리가 아니라는 경고

○ 초대교회 시대의 목회상담을 위한 기록된 지침들은 거의 없다 - 간혹 암시들은 발견할 수 있지만.
. 가장 초기의 것은 그레고리의 [목회적 돌봄]. 밀란의 감독 암브로스(d. 397)는 그 보다 200년 이전에 [목회 직무에 관하여](On the Office of Ministry)라는 글에서 "직무"는 "의무"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설명
. 초기 기독교 성직자들은 목회적 돌봄에 관한 몇 가지 근본 원칙
- 이 원칙들은 교인들과의 共感, 표면적인 증상은 더욱 깊은 병폐를 나타낸다는 것을 아는 지식, 상담 관계의 민감한 성격, 지혜와 신중함의 필요, 그리고 신뢰와 의존의 관계를 오용하는 위험성 등을 포함

신자를 인도하고 유지하는 일
. 목회적 돌봄의 역사에 대한 연구에서 클레브쉬와 재클
- 초대교회에서 80년까지 시기의 일차적인 주제는 유지하는 것(sustaining)이었고, 박해 동안에는 화해, 그리고 제국 시대에는 인도하는 일이었다고 제안
. 목회적 돌봄에 관한 어려움
-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돌보아야 하는 성직자들의 어려움
- 그리스도를 부인하였지만 그럼에도 기독교인으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돌보아야 하는 어려움
○ 초대 교회에서의 가정
. 가정은 아버지를 머리로 하는 가부장적인 가정이 이상적인 가정으로 이해 - 초대교회는 가정을 가부장적 인 단위로 이해한 사회속에서 발전
. 어거스틴은 사회의 평화를 가정의 평화와 관련시킴 - 제국의 가정들이 안정되지 못하면 도시에도 안정이 있을 수 없다.
. 4세기의 주석가 빅토리누스 아퍼(Victorinus Afer)는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것처럼 그의 아내 를 위해 모든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권고
. 크리소스톰의 [허식과, 부모들이 자녀들을 올바로 양육하는 방법에 대한 설교]에서 자녀를 적절하게 양육하는 것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언급
. 4세기의 [사도헌장](Apostolic Constitutions)도 자녀 양육에 대해 부모와 성직자들에게 충고
○ 성직자들의 책임 목록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것이 병든 자들을 방문하는 일(히폴리투스, 신약성서)
. 기독교 교회는 어려움을 당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선 기구들을 설립하기 시작
- 가이사랴의 바실이 세운 바실레이아드(Basileiad)
. 목사는 환자뿐만 아니라 과부, 유가족, 그리고 건강한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방문하여야 했음
○ 상담 서신
. 가장 잘 알려진 것의 하나는 밀란의 암브로스가 390년 데살로니가 대 학살 사건 이후 데오도시우스 황제 에게 보낸 편지
.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초대교회 때의 목회 상담적 편지들 - 어떤 것들은 성직자가 성직자에게 보낸 것
- 어거스틴은 북 아프리카의 제국 사령관이었던 보니페이스(Count Boniface)와 여러 번 편지를 교환
- 가이사랴의 바실의 서신 368편을 가지고 있는데 그 서신들은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 모든 목회적 돌봄과 인도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한가지 주요 주제
- 통일성 문제, 즉 기독교인의 생활과 관습의 통일성, 믿음의 통일성, 그리스도와의 통일성, 그리고 교회 의 통일성 문제

위로 서신
위로 서신은 주로 죽음, 그리고 추방과 다름 불행들에 관련되어 있다.
. 제롬 - 그러한 편지들을 수 없이 많이 썼다. (파울라에게 보낸 편지, 헬리오도로스에게 보낸 편지, 포마 원로원 의원이었던 파마키우스(Pammachius)에게 보낸 것)
.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 "한 사제의 참 배우자"였던 어떤 무명 "자매"의 죽음에 대해 쓴 것
. 크리소스톰-"한 젊은 과부에게 보내는 편지"
. 암브로스- 밀란의 감독이 되었을 때(374), 그의 형제 사티루스(Satyrus)가 4년 후에 죽었을 때 암브로스는 두 편의 글을 씀(장례식을 위한 것, 부활에 대해 쓴 것)
- 황제 발렌티니안 2세의 장례 연설, 자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파우스티누스(Faustinus)에게 보낸 한 편지

☞ 애도자들에게 위로를 전할 때 그들은 인간성에 공통되는 주제들을 이용하였지만 언제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죽음의 정복, 그리고 영생의 소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고해제도
죄인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의 정결을 지키기 위한 열정에서 큰 죄들(배교, 간음, 살인)을 범한 사람들은 공적으로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또 공적인 속죄의 고해를 해야 했다.
. 고해는 세례를 받은 후 오직 한 번만 허용.
. 안내, 유지, 위로를 통한 목회적 돌봄에 덧붙여서 성직자들은 고해자들을 교회에 받아들이는 일, 혹은 징계 절차에 능동적으로 관여함
- 터툴리안 ; 징계를 적용하는 데 있어서 엄격함을 주장하는 대표자
; 터툴리안은 지옥을 생생하게 묘사한 후에, 자존심이 아무리 상한다 하더라도 지옥을 피하려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요 상식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 시간이 지나면서 덜 엄격한 로마의 견해가 지배적이 되었다.
- 칼리스투스 ; 가라지의 비유(마13:24-30)와 노아의 방주 안에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혼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용
. 엘비라 회의(303) - 죽을 때조차도 사면의 소망을 주지 않고 평생 파문을 명하는 수많은 법령들을 발표한 회의
. 니케아 회의(325)-법령들을 통해서 고해자들을 회복시키도록 함
. 4세기 중반과 5세기 초
- 동방 ; 바실은 여러 죄들에 부과되는 고해기간을 설명, 간음죄를 범한 성직자들은 면직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
- 암브로스 ; [회개에 관하여](On Repentance)에서 "참회하는 죄인들을 취급하는 데 있어서 관대함은 가장 높은 덕이다."
. 어거스틴의 글들은 고해를 암시하는 말들로 가득 차 있음(세 범주로)
첫째, 세례 전에 범한 죄들에 대한 회개
둘째, 일상적인 경미한 범죄에 대한 회개
셋째, 진정한 의미의 회개, 즉 "그러한 회개를 하는 사람들을 교회의 고해자라고 부르는, 보다 심각하고 아픈 회개"
. 5세기 말경, 고해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발견
첫째, 고해는 중대한 범죄들에 대해서 오직 한 번만 허용, 두 번째의 회개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exomologesis를 생애 늦게까지 연기
둘째, 죄를 고백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초기에 이것은 공개적으로 행해졌다.
암브로스는 사적인 고백도 허용, 오리겐도 고해자가 사적으로 목사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을 허용,
어거스틴은 "감독에게" 죄를 고백할 것을 권한다.
. 실제적인 고해는 반드시 공개적이었음
- 엄숙한 생활 요구, 예배 시간에 특별한 자리가 주어졌으며 성만찬 예식이 시작되기 전 세례 후보자들과 함께 교회를 떠나야 했다. 고행의 기간과 엄격함의 정도는 목사의 재량권
. 앙카라 회의(314) ; 배교자들을 다루면서 그들에게 일 년 동안의 방청자(hearer), 삼 년 동안 무릎 꿇는 자(kneeler), 그리고 이년 동안 함께 서 있는 자(costander)로 지내도록 함
. 니케아 회의- 박해 때 배교했던 사람들에게 모두 11년 동안의 고행을 요구
. 라오디게아 의회(The Synod of Laodacea, 434후)- 지은 죄에 비례하는 기간의 고행을 제안
→ 지시된 고행을 이행한 후에 죄인에게 공개적인 사면 주어짐(5세기경 이것은 종종 성목요일에 행함)
. 몇 사람들의 글을 보면 전체 exomologesis과정 가운데서 고행 자체가 죄의 고백이나 사면보다 더 중요시
. 스스로 부과하는 파문은 성례전적 효능 - 중세 교회가 막 시작되면서(600) 시작된 발전

영적인 안내자
. 오리겐
- 영적인 충고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안내를 구하는 사람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었고, 무엇보 다도 그는 고도의 덕과 지혜를 소유한 사람이어야 한다.
- 감독이 모범적인 영성을 보이지는 못하면서 단지 그의 직무의 힘으로 죄를 사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것 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말함
. 박해가 끝나고 교회가 점차 세속화되면서 많은 경건한 기독교인들은 광야에서 독거하며 수도원적인, 혹은 은둔주의적인 더욱 엄격한 생활을 추구
- 이 운동은 목회적 돌봄에 관한 상당한 분량의 문헌을 산출, 도시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영적 충고를 위해 사막의 교부와 교모들 중 많은 사람들을 찾게 하기도 하였다.
- 수도원 규칙에 복종하는 것이 일종의 안수로 해석되었고 수도원적인 이상은 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 교회의 "수도원화"과정에서 가장 의미 있는 발전 중 하나는 고해 제도에서였다.
- 죄를 고백하고 그리고 사면을 받는 이 관행은 켈틱 수도원들 가운데서 계속
. 영적인 안내자의 권위는 공적인 것이 아니었고 영적인 충고자로서의 그의 개인적인 능력에 있었다.
. 사적인 고백과 사면은 서방에서는 계속 저항을 받았다. 제3차 톨레도 회의(589)는 그러한 것을 execrabilis preasumptio라고 정죄하였다.
. 사적인 고백이 후기 중세 시대에는 규범이 되었다. 이에 대해 최소한 세 요인들이 함께 영향을 미쳤던 것 으로 보인다.
첫째, 초기 교회는 일생에 한 번만 가능한 공적인 exomologesis를 관행으로 하였지만, 그 때에도 고해자 에게 목사가 개인적으로 충고를 하였었다.
둘째,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안내자와 목회자적 관계를 갖도록 권고한 오리겐 전통의 부활
세 번째, 켈틱 수도원 관습에서 온 것인데 이것이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금욕주의자들과 수도사들이 영적인 충고자로 봉사하게 된 것은 순교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에 영웅적인 신앙의 모범들을 사람들은 금욕주의 운동에서 찾게 된 것이다.
- 어두운 면 ; 물질은 경시하는 마니교적 이원론의 부활을 의미
. 금욕주의라는 새 파도는 수세기 동안 목회적 돌봄의 관습에 영향을 미칠 문헌을 낳음
- 마르세일레스의 수도사 존 카시안(John Cassian, d. 435)
; [규칙서](Institutes)와 [협의들](Conferences)
; 치명적인 특정 죄들이 있다는 사상을 유행시킴(8가지의 주요죄)
; 도덕적 삶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여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큰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강조
- 半 펠라기우스주의의 아버지로 여겨짐
- 후에 대 그레고리는 그 목록을 일곱 개의 주요 죄로 수정(교만을 모든 죄의 "어머니"로 목록 꼭대기에)
-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the Comfessor, d. 662)는 영적인 안내에 대해 저술한 또 다른 하나의 수도사
[사랑에 관한 400장](Four Hundred Chapters on Love)은 그를 앞섰던 사막 교부들의 지혜를 요약
☞ 모든 기독교인이 각자 영적인 안내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3세기의 오리 겐에서 이미 발견, 본격적으로 실행된 것은 4, 5세기 수도원 운동이 등장하면서부터

대 그레고리-{목회적 돌봄}
그레고리(d. 604)는 590년 교황이 됨. 그전에 부유한 원로원의 아들, 로마의 자사, 7개의 수도원을 창설
그의 위대한 공헌은 그의 저술들을 통해서 이루어짐-{목회적 돌봄}(Pastoral Care, Liber Regulae Pastoralis)은 다음 세기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것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음
(1) 목회 직무의 어려움과 필요 조건
(2) 좋은 목사의 생활
(3) 사람들의 여러 병폐들을 다루는 방법
(4) 목사는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첫 부분
- "영혼을 관리하는 것은 기술 중의 기술이다" 그것은 지혜와 겸손을 요구한다.
- 목사 자신이 건강한 사람이어야 한다.
. 두 번째 부분
- 그레고리는 목사의 생활을 논한다.
- 그레고리는 명백히 목사와 평신도들 사이에 행동의 "이중적 표준"을 적용할 것을 주장한다.
- 지도자의 스타일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 돕는 사람, 양떼를 보살피는 목자(아부는 특별히 위험한 것), 온순함이 엄격함과 함께 섞여야 한다.
- 현대 사회의 큰 관심거리인 주제, 즉 일 중독(workaholism)
; 교회의 외적인 생활을 소홀히 여기는 성직자, 양떼로부터 격리된 채 연구만 하는 성직자들 성도들과 관 계 위험성 경계, 아첨을 받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 사이에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함.(목사를 사랑하는 것은 목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위해서이다)
. 세번째 부분
- 돌봄에 관해 36편의 "사례연구"를 포함, 각 사례의 극단적인 측면들 혹은 반대적 측면들을 다룬다.
그레고리는 상황에 맞춘 상담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방법을 사용, 방법은 병폐에 따라 달리 강구 되어야 한다.
☞ 그의 모든 충고 가운데는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주의가 있다.
그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는 성직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영적인 건강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짧은 충고를 주며 그의 작품을 끝맺는다.

초대 기독교의 목회자의 생활은 변천의 과정을 거쳐왔다. 목회자의 직무와 권위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토론이 있었고, 뿐만 아니라 기독론, 삼위일체, 그리고 구원과 인간의 죄에 대한 교리들에 대한 논쟁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 전체 변천 과정에서 신학의 궁극적 의미는 영혼들을 돌보는 일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

"영혼의 관리는 기술 중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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